12.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치사 유공 묘지명 /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李奎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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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치사 유공 묘지명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庚公墓誌銘)
예로부터 사대부들을 보면, 처음에는 일찍이 염치로 조심하여 가득 차지는 않을까 주의 하지 않는 이가 없다. 부하고 귀한 데에 처하게 되면 대체로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태연히 물러갈 줄을 모르는 자가 많았는데, 우리 복야부군(僕射府君)은 이와 아주 달랐다. 나이 64세에 이미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니 거기서 3정승까지 가는 데에 몇 등급이 있는데 그 지위를 밟지 않았는가. 이보다 앞서 6년 전에 물러났으니 은총이 넘치는 것을 피하여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전에 벌써 최고 지위에 이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주역』에 이르기를 진퇴존망을 알아서 그 바른 것을 잃지 않았다. 유씨(庾氏)는 근원이 금성(錦城)의 무송(茂松)에서 나왔으며, 문벌에 있어서 갑족(甲族) 이 되는데, 공은 그 출신이다. 공의 휘(諱)는 자량(資諒)이요, 자는 담연(湛然)이다. 증조 부의 휘는 모씨인데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였으며, 조부의 휘는 모씨인데 검교태자 태사(檢校太子太師)였다• 아버지 모씨는 종묘에 배향한 공신으로, 문하시중수문전대학사 판이부사증공숙공(門下侍中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贈恭肅公)이며, 어머니 장•씨(張氏)는 상 의 봉어(尙衣奉御) 휘는 찬(贊)의 딸로, 이것이 공의 세계(世系)이다 공은 사람됨이 중화 (中和)하고 순수하며 장중하고 말이 적은데, 어질고 미더운 것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 며, 청렴하고 검소한 것은 세상을 다스릴만하니, 이것이 공의 타고난 천품이다. 의묘(毅 廟 의종) 때에 이르러 문신(山東 즉 동반의 의미)들이 점점 성하였는데, 공의 나이 16세 에 귀한 가문의 자제들과 더불어 언약하여 친교간이 되었다.
공이 무관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있는 오광척(吳光陟), 이광정(李光挺) 등을 끌어들 여 참여시키려 하자, 여러 사람들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공이 특히 나서서 의논하기를, “비록 사사로이 노는 중에도 문、무가 구비하면 역시 잘 될 것이지, 무엇이 불가하겠는 가. 후에 반드시 뉘우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얼마 안가서 경인년의 난리가 일어나고 문신들이 거의 탕진(湯盡)되었는데, 무릇 그들과 친교가 있는 사람은 모두 화를 면하니, 이것은 오(吳)·가(李) 두 장수가 구하느라고 많이 힘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이 젊어서 부터 벌써 기미를 아는 도량이 있었다.
나이 들자 재상의 아들이라 하여 바로 수궁서 승(守宮署丞)에 보직되었으며 마침내 대 악서승(大樂署丞)에 전근되었다. 좀 있다가 나가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었으며, 정사 를 하는 데 있어, 사리와 대체를 잘 알아 적발하기를 귀신 같이 하니, 한 지방에서 이름 이 났는데 이는 공이 처음 고을을 다스린 것이다. 여러 번 역임하여 어사 상의봉어 시어 사 호부낭중 어사잡단(御史尙衣奉御侍御史戸部郎中御史雜端)이 되었으며, 사금자 대부소 경얘易金紫大府少卿)으로 병 형부 시랑·대부경·지삼사사(知三司事)·판대부사재사(判大 府司宰事)·태자첨사(太子簷事)·판합문(判閤門)·지다방사(知茶房事)에 이르렀는데, 이 때의 관직 등급은 모두 정의대부(正議大夫)였으며,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관직 등급 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이르니, 이것은 공의 역임한 관직 차례이다. 동남쪽 지역을 염 문 안찰하고, 동북쪽 지역에서 군사를 지휘할 때에는 그 위풍이 미치는 곳마다 무서워하 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짐과 미더움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니. 이 때문에 공이 사명을 받들어 나가서도 칭찬을 들었다.
대개 정 3품의 작위는, 들어가서 정승이 될 수 있는 자리이지만, 공이 판사재(判司宰)로 있을 때에는 도리어 지방관이 되기를 간절히 청원하였으며, 호부상서로 나가 남경 유수 (南京留守)가 되었으니, 이것은 공이 가득 차는 것을 사양하고 꺼려서이다. 공은 항상 선 군사(選軍使)로 군정(軍政)을 시행하였는데, 청사 위의 기울어진 기둥이 저절로 일어서 니, 당시 모두들 이상한 일이라고 떠들어 전하였는데, 이것이 공의 공평무사에서 얻어진 일이다.
관동 지방에 장수가 되어 갔을 때에는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관음보살에게 예하였는 데, 좀 있다가 두 마리의 푸른 새가 꽃을 물어다 옷 위에 떨어뜨렸으며 또 바닷물 한 움 큼 쯤 솟아올라서 그의 이마를 적셨다. 세상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이 곳에 푸른 새가 있는데 부처에게 배알하는 자로서 그만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하니, 이것은 공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미더움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숭경(崇慶) 2년 계유(강종(康宗) 2년)에 연로함으로 하여 퇴직 청원하기를 매우 간곡히 하니, 임금이 부득이 허락하여 은 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로 사면하고 집에 있게 되었다.
당시 경상(卿相)들 중 퇴직하고 편안히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서 때로는 혹 술자리를 만들어 마음껏 즐기기도 하였는데 태평하게 놀며 성품을 수양한 지 17년이니, 이것이 공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지내던 낙이었다. 기축년 8월 7일 에, 기로회에 나가서 조용히 잔치하여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음날 정오 때에는 문 득 팔계문(八戒文 불교의 8개조 계문)을 열람하였으며, 밤에는 세수 목욕하고 편하게 취 침하였다. 아침이 되자 집안사람을 불러 시간을 묻고서는 홀연히 저승으로 가니, 향년 80세인데, 이것이 공의 마지막이다. 이에 앞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어 말하 기를. “죽어서 한 곳에 가니 궁전 누각이 매우 장엄한데, 지키는 자가 있다가 말하기를, '여기는 유복야(庾僕射)가 올 곳이다.' 하였다.” 하였다. 그 말이 비록 황당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공의 행적이 이미 부끄러울 것이 없고, 그 세상을 떠남이 이러하였은즉, 그 말 도 역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공이 선한 곳에서 살아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좌 승선(左承宣) 김씨 휘 존중(存中)의 딸에 장가들었는데, 3남 2녀가 있었다.
장자 모(某)는 국학학유(國學學諭)가 되었다가 일찍 죽었으며, 차자 모는 지금 판대복사 지어사대사 보문각직학사 지제고(判大僕事知御史臺事寶文閣直學士知制誥)가 되었으며, 계자(季子) 모는 내시의 모 관이 되었는데, 역시 공보다 앞서 죽었다. 장녀는 모 관 모에 게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계녀는 모 관 모에게 시집갔다가 지금 과부로 있 다. 장사를 지내려면 지대(知臺) 군이 공의 행적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문을 청 탁하니, 내가 글을 받들고 울며 또 말하기를, “아, 옛날에 남긴 정직한 이여, 내가 다시 공과 같은 인인 군자(仁人君子)를 볼 수 없게 되었도다. 명문을 감히 사양할 것이랴.” 하 고, 드디어 명문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드러나게 진실한 대신이여
이 나라의 기강이었네
백성들은 마음으로 공을 우러렀는데
공은 문득 지위를 버렸네
지위가 지극한데 이르지 않음은
공 스스로 피하신 것이라네
공은 스스로 피하였지만
사람들은 부족하게 생각하였네
머릿털 누렇게 오래 사시는 일
공은 원하지 않았네
공은 원하지 않았지만
하늘이 진실로 도우셨네
정직한 마음 신을 감동시켜
기울어진 기등서고 새가 날아드니
공에게는 보통이지만
사람들 보기에야 이상한 일 아닌가
아
옛 덕 있는 이 가고 마니
세상의 모범 뉘게서 찾으리
저 산은 높고 높은데
물 흘러 그 아래로 감도니
이곳이 공의 계신 곳
서기가 감도는구나
돌에 새겨 광 속에 넣으니
만년토록 밝아 있으리라
顯允端揆
惟邦之紀
民方注心
遽釋其位
位不至極
公所自避
公則自避
人歉其意
黃髮壽考
公所不薪
公雖不蘄
天固相之
正直感神
柱立鳥馴
於公爲常
怪者維人
嗚呼
舊德云亡
模範疇倚
有山巖巖
水灌其趾
是公之宮
吉祥止止
纔石納竁
眉目萬祀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銘
觀自古士大夫。其始未甞不以廉恥操心滿盈爲 戒。而及富貴方酣。率翫惜日月。恬不知退 者多矣。我僕射府君大異於是。年六十有四。已登端揆。則其去台鉉能有幾級。而未踐其 地耶。但先六載引 退。求避溢寵耳。不然久已升極秩。而猶有餘矣。此 易所謂知進退存 亡。不失其正者歟。庾氏源于錦城之茂松。在版籍爲甲。而公其出也。公諱資諒字湛然。 曾祖諱某。皇檢校太子詹事。祖諱某。皇檢校太子太師。考諱某。皇配某廟功臣門下侍中修 文殿大學士判吏部事。贈恭肅公。母張氏尙衣奉御 諱贊之女。此公之世系也。公爲人中和 毓粹。莊重寡言。仁信足以感人。淸儉足以律世。此公之受之天也。方毅廟時。山東寢 盛。公年十六。與貴門子弟約爲交契。公欲引虎官御牽龍行首吳光陟,李光挺等與焉。衆 莫肯之°公挺然議曰。 雖私遊中。文虎 俱備亦得矣。何有不可乎。後必有悔矣。衆咸以爲 然。於是使之參焉。未幾庚寅亂。文臣幾蕩盡。凡人交契者皆得免。以吳,李二將營救甚 力故也。此公之自少已有知幾之量也。年若干。以宰相子直補守宮署丞。尋遷大樂署丞。 俄出爲龍岡縣令。其爲政諳練理體。摘發如神。一方稱之。此公之始莅郡也。累歷御史 尙衣奉御,侍御史,戸部郎中,御史雜端。賜金紫大府少卿,兵刑部侍郎,大府卿,知三 司事,判大府司宰事,太子詹事,判閤門,知茶房事。階皆正議。尙書右僕射。階光祿° 此公之所歷官序也。其或廉察東南。秉鉞東北。則威風所及。無不股弁。然濟以仁信。故 民便之。此公之奉使延譽也。夫三品正秩。入相可兾。而公之判司宰也。反乞郡痛切。以 戸部尙書出知南京留守。此公之辭滿忌盈也。公常以選軍使聽軍政。其廳事上欹柱自立。 時譁 傳以爲異事。此公之公平無私所感也。其帥關東 也。到洛山禮觀音。俄有二靑鳥含花 落衣上。又海水一掬許湧灌其頂。世傳此地有靑鳥。凡謁聖者非其人則不見。此公之惇德 至信所致然也。越崇慶二年癸酉。引年乞退甚篤。上不得已允之。以銀 靑光祿大夫尙書左
僕射。得謝家居。與當時卿相之退逸者。爲耆老會。時或置酒盡歡。凡優游養性十有七 年。此公之懸車閑適之樂也。歲己丑八月七日。詣耆老會。從容宴飮。還于第。明日方午。 忽覽八戒文。夜盥浴尙安然就寢。及旦呼家人問時。然後條然而化。享年八十。此公之終 也。先是人有死復生者。自言死至一處。宮觀甚嚴。守者日此庾僕射至處也。其說雖荒 唐。考公之行已無愧。及其終如此。則其言亦不可不信。公之生善處也必矣° 娶 左承宣金 諱存中女。凡生子三女二°長日某爲國學學諭早卒。次曰某今爲判大僕事,知御史臺事, 寶文閣直學士知制誥。季曰某爲內侍某官。亦先 公卒。女長適某官某早寡。李두0()1適某官 某今寡。方葬也。知臺君具公之行錄。託予以銘。予奉書泣。且曰。嗚呼。古之遺直也歟。 吾不復見仁人君子之若公者矣。銘其敢辭乎。遂銘曰。
顯允端揆。惟邦之紀。民方注心。遽釋其位。位不至極。公所自避。公則自避。人歉其 意。黃髮壽考。公所不蘄。公雖不蘄。天固相之。正直感神。柱立鳥馴。於公爲常。恠者 維人。嗚呼。舊德云亡。模範疇倚。有山巖巖。水灌其趾。是公之宮。吉祥止止。纔石納竁。眉目萬祀。
『東文選』卷之一百二十二,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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