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태평루(太平樓) / 우재 (吁齋) 조준 (趙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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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을이 경영된 것은 나라 있기 전이어서
태평루의 아름다운 자연은 반천 년이었네
섬을 돌아보니 가로수에 해가 높이 솟았고
인어는 어촌에 낀 한 줄기 연기 속에서 말하네
남대천이 달려 흐르니 세상일이 마음 아프고
산하에 장한 공적은 하늘에 맹서하네
근래의 가혹한 부세에 백성이 고달파 하니
동해의 물 기울여 재물을 만들고 싶네
古國經營自國前
太平風月半千年
島還官樹三竿日
人魚漁村一縷烟
江漢奔流傷世道
山河壯續誓皇天
邇來瀆賦民!燃悴
欲倒東溟作布泉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四十四,江原道襄陽都護府
조준(충숙왕 2년, 1456년~태종 5년, 1405년)의 본관은 평양(平壤)이고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송당(松堂)이다. 고려 말 개혁파 사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우왕 즉위(137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사헌장령 등을 거쳐 전법판서(典法 判書)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중용되어 지 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세자책봉■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 어 자연히 이방원(李芳遠)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정종 2년(1400년) 판문하 부사로 있으면서 한때 투옥되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그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 태조의 묘정 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강릉도 안렴사로 와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하조대의 유래도 조준과 관련 있다. 조준은 개혁사상으로 조선왕조의 기반을 만들었던 중심인물로 목민관으로서의 마음을 잘 표현 하였다. 한 고을의 경영과 고려 말 가혹한 세금부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보고 관리로 서 무한한 바다를 보고 물을 기울여 재물로 만들어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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