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풍악록(楓岳錄) 백호(白湖) 윤휴(尹鑴) / 한글 번역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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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숲을 모두 태우거나 베어 내어 토석(土石)이 전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장마라 도 한번 지는 날이면 모두 무너져 흘러내려 산은 산대로 깎이고 시내와 평원은 막히고 메워져서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던 산과 물이 깊던 못들이 전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와 짐승은 다 도망가고 물고기도 자라도 자리를 옮겨 근세 이후로 토지는 더욱 척박해지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에 찌들리며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말라 비 구름도 일지 않고 수재 한재가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 모두가 사람들이 살피지 않아서 그렇지 다 원인이 있어 그리 된 것이다. 그대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하였다. 유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금 그것을 금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 것인 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만약 호구(戸口) 정책을 엄하게 하여 떠돌이의 길만 막는다면 옛날처럼 위 아래로 풋나무 새 짐승까지도 다 제 삶을 즐기는 정책을 실 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를 다 설명하자면 말이 기네.”
했더니, 역리가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상객(上客)의 말씀이 옳습니다. 꼭 할 말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산에 들어가 경작하는 자들은 참으로 국가로 보아 간교한 백성들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산골 백성들이 더 입 고 있습니다.” 하였다.
21일(계해) 아침날씨가 음산하더니 이어 가랑비가 내렸다. 조반 후 출발하여 부창현(富 昌峴)을 넘어 부창역 마을에서 말에게 꼴을 주었다. 가랑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기락 이천(祈樂伊遷)을 지났는데, 기락이는 방언으로 기어서 나온다는 말로서, 그 천의 길이 너무 좁고 또 바위 구멍이 있어서 누구나 그 곳을 가는 자는 반드시 기어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전(泉田)의 길가 큰 시내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날은 하루 내내 산골 험한 길만을 걸었는데, 여기에 이르자 산들이 확 트이고 그 가운 데 큰 평야가 펼쳐 있었으며 강물이 굽이치고 돌아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북쪽을 바라보니 높다란 산이 하나 있고 그 아래 민가 수십 호가 있었으며 뒤에는 소 나무 숲이 울창하고 느릅나무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데 유군의 말로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후(李煦)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시냇가에 작은 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 생 후평(李生后平)이 집에 있는가 물었더니, 지금 양양(襄陽)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0여 리를 가면서 북으로는 청평산(淸平山)을 바라보고 남 으로는 소양정(昭陽亭)을 가리키며 오다가 배로 앞강을 건너 소양정에서 잠시 쉬었다. 그 곳 벽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월봉(月峯)、청음 (淸陰)、백헌(白軒) 그리고 유창(俞㻛)의 것을 보고 드디어 춘천(春川) 읍내로 들어와 유 군 종의 집에다 여장을 풀고 주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주수는 병이 있어 나오지 못하 고 비장(裨將) 신완(申椀)을 보내 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주수의 형 이생 석(李生錫)이 왔고, 또 최남(崔男)의 아들 상인(喪人)인 이억(爾嶷)도 왔으며, 이생을 통해 서울에 있는 집안 소식도 대강 들었다 유군이 이르기를,
“듣기에 청평산에 이자현(李資玄)의 식암 영지(息菴影池)가 있다는데 식암은 자현이 홀 로 앉았던 곳으로 동사(東史)에 이른바, '둥글둥글하기가 곡란(鵠卵)과 같다.'고 한 것이 그것이고, 영지는 식암 아래 있는 겨우 반묘(半畝)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못으로, 해 뜨는 아침, 달 돋는 밤이면 식암의 풍경과 사람의 동정까지도 모두 그 못 속에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현이 죽었을 때 불가의 법대로 화장을 하여 불에 탄 그 뼈를 아직까지 그 곳 중이 간직하고 있는데 빛이 푸르른 청옥(靑玉)과 같다. 그리고 용마루에는 또 김열경(金 悅卿) 친필이 있다. 그래서 신상촌(申象村)의 송인시(送人詩)에, '이자현 유골은 풍류가 대단하고[李資玄骨風流遠], 김열경 글씨는 유일의 자취로세[金怳卿書逸躅存]라고 하였으 니, 그 모두가 다 값진 고적들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자현으로 말하면 능히 세리(勢利)의 길에 초연하여 몸을 운수(雲水)에 의탁하고 거기 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퇴계(退溪)는 그를 위해 억울함을 밝혀 주고 그 사실을 영탄 (咏嘆)했으며, 열경(悅卿)은 국가 위난을 평정한 세상에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뜻을 높 이 샀는데, 사실은 동방(東方)의 백이(伯夷)인 것으로, 그의 청고한 풍도와 모범을 남긴 행위는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길에 그 유적지를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가 탄 말이 걸음이 더디고 바탕이 둔해서 외삼촌을 따라가야 겠기에 마음대로 못하겠네.”
하고, 서로 말이 나쁘다고만 탓했다. 내가 웃으면서, 재상상진(尙震)의 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유군이 못 들었다기에 내가 얘기하기를,
“상진공이 언젠가 들을 지나는데 어느 늙은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쟁기 하나에다 소 두 마리를 메워가지고 아주 힘들게 밭갈이를 하고 있더라네. 상진공이 한참 구경하다 가 이어 말하기를, '농사일을 참 잘하시는구려, 그런데 그 소 두 마리 중에도 우열(優劣) 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상진공이 농부 앞으로 다가갔더니 그 늙은이가 이쪽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공이 물은 대로 두 소 중에 한 마리는 힘이 세고 옹골찬데 한 마리는 힘도 약하고 미련한데다 늙기까지 했 지요.'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륌는 힘대답을 않고 지 금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 힘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니, 그 늙은이 말이, '소는 큰 짐 승이어서 사람 말을 알아듣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지요. 내가 그 힘의 덕 않고 지그 놈니,봠려먹으면서지그 놈,봠족한 점을 꼬집어지그 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싶지 않 아서 그런 거라오.'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은 지그 말끝에 크게 반성을 하 지그때부터는 한평지그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장점만 말하 지단점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 그 장후(長厚)한 군자가 됐다는 거야. 지금 우리들이 그 말들 힘으로 천리 길을 두루 돌면서 온갖 험난한 곳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이 병들었거나 둔함을 그렇게 헐뜯을 일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사람도 꾸짖고 욕설 을 하면 풀이 죽고 치켜세우면 흥을 내는 법인데, 저 말들이 오늘은 뽐내면서 달릴 기운 이 더욱 없겠네. 그것은 우리가 대우를 잘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했더니,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소나 말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나 보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2일(갑자) 맑음. 아침에 이생 석이 왔고, 최이억도 왔다. 조반을 먹고 출발하여 유군과 함께 봉의루(鳳儀樓)에 올라가 보았다. 그 고을 뒷산이 날아가는 봉의 형국이기 때문에 산 이름이 봉산이고 누대 역시 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이 모양은 매우 그럴싸 했으나 거민이 100호도 안 되는데다 성지(城池)도 목석(木石)도 없어 국가를 지킬 요충 지는 못 되었다. 만약 삼악산(三岳山)에다 관(關)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한 보장(保障)이 될 법했다. 우리들이 봉의루에 올라 있음을 주수가 듣고 술과 배를 가지고 와 행장에 챙겨주었다. 외삼촌을 뒤좇아 신연(新淵) 나룻가에 와서 만나고 신완(申椀)과도 서로 만났으며 만호(萬戸) 반예적(潘禮積)이라는 자도 만나 동행하게 되 었다. 석파령(席破嶺)을 넘었는데 산 이름은 삼악(三岳)이었다. 재가 매우 높아 길은 평 평했어도 길가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 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郡)까지의 거리는 20여 리였다. 거기에서 또 20리 를 더 가 안보역(安保驛)에 다다르니 청풍부부인(淸風府夫人) 묘가 있었고, 그 아래 있는 재사(齋舍)가 매우 조용하여 거기에서 잤다. 저녁에는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
이 날은 춘천(春川)을 떠났다. 이는 대개 청평산에 들어가 진락옹(眞樂翁)과 매월당(梅 月堂)의 유적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인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시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화답을 청했다.
춘주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고을인데
더구나 청평학사 별장까지 있음이랴.
청연에 물이 고여 둥실둥실 배 떠있고
구름 덮인 화악에는 바위 빛이 푸르다네
희이자 뼈 푸르다니 신선 상징 분명하지
매월당이 남긴 글씨 그 체취가 풍긴다네
서운하게 식암 영지 바라만 본단 말인가
그들이 남긴 향기 누가 가서 맡으라고
春州素號水雲鄕
况有淸平學士莊
水積靑淵舟泛泛
雲霾華岳石蒼蒼
希夷骨碧仙蹤杳
梅月書留道韻長
惆悵菴池空入望
澗蘅誰復嗅遺香
춘천(春川)과 잿마루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데, 물이 급류에다 여울이 얕다. 주(州)의 북 쪽에 청연(靑淵)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심이 배를 띄울 만한데 여기는 바로 소양강(昭陽江) 상류이다. 그 강이 양구(楊口)의 강과 합류하여 신연도(新淵渡)를 이루고 평야 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파강(巴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경운(慶雲)의 북치(北峙) 서쪽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일명 화악산(華岳山)이라고도 한다. 가파른 바위 산이 구름 높이 솟아 있어 영서(嶺西)에서는 화악만큼 높은 산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 다 경운은 청평의 원래 이름이다 유군의 화답시는 이러하다.
진락공 그 명성이 이 고을에 자자한데
더구나 청평하면 그 있던 곳 아니던가
예스러운 못과 누대 지원처럼 경개 좋고
보지의 가을 풍경 나무들이 푸르러라
치솟은 바위산과 겨룰 만한 높은 절의
고상한 풍류는 장강유수 그것이라네
선구를 지척에 두고 계획이 틀려서
선생께 판향 하나 피워 올리지 못한다오
眞樂公名表此鄕
淸平況是故時莊
祗園勝槪池臺古
寶池秋容樹木蒼
淸節漫爭山骨聳
高風直與水流長
仙區咫尺違心賞
未薦先生一瓣香
23일(을축) 새벽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가평(加平) 길을 거쳐 초연대(超 然臺)를 지나면서도 안개 때문에 올라가 구경하지 못하였다. 가평읍 아래 와서 조반을 먹고, 아현(芽峴) 남쪽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청평(淸平) 언덕을 지나 굴운역(屈雲 驛) 마을에서 잤는데 그 마을 북쪽에 있는 언덕의 형세가 매우 좋아 보여 올라가서 종을 시켜 치표(置標)를 해 두게 하였다. 그 주산(主山)의 이름을 물었더니 청취전(靑翠田)이라 고 했는데, 그 산이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운등산(云登山)이 되고 거기에서 또 동으 로 달려가다가 회강(淮江)을 만나 거기에서 멎었는데 곱게 감싸고 있는 것이 마치 누군
가의 장례를 받아들이고 싶은 듯이 보였다
24일(병인) 흐렸다. 일찍 출발하여 천괘산(天掛山)을 향하여 가다가 마치현(摩蚩峴)을 넘어 그 고개 서쪽에서 조반을 먹고 여러 사람 무덤들을 가리키고 물어가면서 길을 가 는데 시내 곁 단풍잎들이 마치 붉은 비단 같았다. 대개 평천(平川)의 가을 빛이 이제 와 서야 비로소 무르익고 있었다. 풍양(豐壤)에 당도하여 왕숙천(王宿川)을 건너고 퇴가원 (退駕院)을 지나 오릉(五陵) 밖에서 쉬노라니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이 보이기 시작했 다. 들은 넓고 시내는 편평하여 새삼스러운 감회가 있기에 율시 한 수를 읊었다.
만 겹이나 푸르른 봉래산을 꿈에 보고
구름 따라 동쪽 땅을 한 바퀴 다 돌았네
아침이면 넓은 바다 부상의 해를 보고
밤에는 비로봉 가을 나무에 의지했다네
자장처럼 호탕하게 놀자는 뜻 아니었고
나그네 모진 시름 달래려고도 아니었네
돌아와서 동산에 다시 올라 바라보니
끝도 없는 연파가 한강 섬에 자욱하네
夢入蓬萊翠萬重
一筇東盡白雲求
朝看滄海扶桑日
夜將毗盧碧樹秋
不因子長疏宕擧
非關楚客慍惀愁
歸來更上東山望
無限煙波江漢洲
늦게야 성안에 들어와 동소문(東小門) 안에서 외삼촌과 작별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무 사히 돌아왔음을 고하였다.
풍악(楓岳)의 경치가 삼한(三韓)에서 으뜸이요 천하에 소문이 나 있어 내 늘 사영운(謝 靈運)처럼 나막신을 장만하여 사마자장(司馬子長)같이 한번 마음껏 구경을 해보려고 벼 르기는 했으나, 세상일도 뜻대로 되지 않고 병마에도 시달리다 보니 속절없는 풍진 세월 에 흰머리가 이미 머리에 가득해갔다. 임자년 7월 내가 동성(東城)에 부쳐 있으면서 마 침 유동(榆洞) 사시는 통제사 외삼촌과의 자리에서 옛 친구 정극가를 뜻밖에 만나 담소 하던 차에 산수(山水) 구경 얘기가 나왔다. 외삼촌 말씀이
,,내가 진작부터 관동(關東) 구경의 뜻이 있었으나 몸이 무부(武夫)라서 미처 못했었는데 지금 마침 집에 있게 되었으니 구경갈 때는 바로 이때다. 극가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는 가?” 하자, 극가가 대답하기를,
“그렇잖아도 지금 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인데 안 가다니요.”
하였다. 외삼촌은 또 나더러도,
“너도 이번 걸음에 불가불 동행을 해야겠다.”
하시기에, 나 역시,
“가구말구요. 그것이 저의 평소 원이었는데요.”
하고, 드디어 중도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그 해 윤월(閏月) 정유일에 침석정(枯石亭)에서 내가 외삼촌과 만나 동소문을 출발했는데 유군 여거(柳君汝居)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뒤좇아 왔다. 연산(漣山)에 가 미수(眉叟)에게 문안하고 석록(石鹿)에 서 극가를 데리고 그로부터 9일 만에 풍악의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이틀 밤을 정양사에서 자고 천을대(天乙臺)를 구경하고 마하연(摩訶衍)으로 옮겼다가 안문(鴈門)으로 나와 남천 (南川)을 끼고 동으로 갔었다. 유점사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산영루(山暎樓)를 산책하고 만 경대(萬景臺)를 바라보았으며 맑은 가을의 운물(雲物) 등 온갖 경치를 두루 감상하였다. 내 늙고 병들어 비록 비로봉 절정에 올라 깊은 구룡연을 내려다보면서 아주 높고 으슥 하고 험한 곳까지 샅샅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풍악산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 산 빛이나 늦가을 풍경에 관하여는 그런대로 볼만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성(高城)을 경 유 해산정(海山亭)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청간정(淸澗亭)에서 거닐었으며, 선 유담(仙遊潭),영랑호(永郎湖)에서 쉬기도 하였다. 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묵으면 서 동해를 바라보며 부상에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기도 하고 중추에 바다에 뜬 달도 완 상했다. 그리고 다시 신흥사(神興寺)에 들러 설악산을 바라보고 천후산을 답사했으며, 또 춘천에 들러 회강(淮江)을 건너고 몽口(夢미에 올라 우수(牛首 춘천의 옛이름) 평야를 굽어보고 경운산(慶雲山)、화악산(華岳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왔다. 비록 사방 을 두루 돌아보고 싶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평생의 소원을 다소는 풀었 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길에 들른 고을이 15개 주에 달하고, 길은 1천여 리 길이었으 며, 왕복에 한 달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동안 작은 일기책에다 날씨와 그날그날 가고 구 경한 곳을 적어 옛 분들 유행록(遊行錄)에 대신하였고, 또 동정부(東征賦) 한 편을 써서 거기에 나의 영귀(詠歸)의 뜻을 대강 펴 보았다.
임자년 9월 일 침석정(枯石亭)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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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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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