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서(書) 별지(別紙) / 우암(尤庵) 송시열 (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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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북쪽에서 배소로 옮길 때 영동(嶺東) 촌가 에 이르렀는데 그 집에 써 붙인 시구에
세 사람이 저자에 호랑이가 나왔다고 전하니 사람들이 다 믿었고 三傳市虎人皆信
한번 치마속의 벌을 잡으니 아비도 또한 의심하네 一掇裙蜂父亦疑
세상의 공명을 위해서 나무와 매를 보아야 하고 世上功名看木鷹
좌중의 담소에 뽕나무와 거북을 삼가라 座中談笑愼桑龜
하였으니 그 사실이 자못 이상하다”
하였습니다. 사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기는 도중에 갑자기 큰 비를 만나 양양 물치촌(勿緇村)의 양 민 정입(鄭立)의 집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그 집 기둥에 과연 그대가 물어본 바와 같은 시구가 붙어 있었네. 그런데 윗 구절은 바로 쓰고 아래 구절은 거꾸로 써져 있었네. 주 인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주인의 말이 “지난해 5월 상놈도 같고 양반도 같은 어느 과 객이 써 주고 갔다”하였다. 그 글씨는 소박하면서도 몹시 익숙했네. 뽕나무와 거북이의 출처는 보았는가.
외서(外書) “동해의 어떤 사람이 한 마리의 신령한 거북을 얻었는데 그 거북이 하는 말 이 '천하의 나무를 다 태워도 나를 삶아 죽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자 이를 들은 도인 이 하는 말이 '아무 곳에 있는 마른 뽕나무로 삶아도 죽지 않느냐'고 하였다. 거북이 이 말을 듣고 곧 머리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그러니 오늘날 좌중에 한가하게 감소하는데 있어서도 경계할 줄 알아야 하겠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이야 이미 솥에 든 고기가 되었으니 털을 태워도 곧 익어 문들어지게 되어 되었네. 어찌 뽕나무까지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날은 바로 윤 5월 27일이었네. 정입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이 글을 써 주고 가면서 명년 이 날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하였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였네. 이 일은 몹시 이상하나 또한 함부로 이야기를 하지는 말게.
「宋子大全』
송시열(선조 40년, 1607년~숙종 15년, 1689년)의 본관은 은진이고 아명은 성뢰(聖賚). 자 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김장생(金長生)•김집 (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인조 11년(1633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시작하였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 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효종 9년(1658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 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 서 활동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 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碁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을 주장하면서 3년복(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鐫)와 대립했다. 예송은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碁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 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 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 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종 9 년(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 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 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 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젊은 시절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근간으로 형성되 었다.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저서로는 『주자대 전차의』•『주자어류소분』•『二程書分類』•『論孟問義通攻』•『經禮 疑義』•『心經釋義』•『纂定小學諺解』•『朱文抄選』•『戒女書』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는 숙종 43년(1717년) 교서관에서 간행된 『우암집〉167권과 정조 11년(1787년) 평양감 영에서 출간한 「宋子大全』215권이 있다. 그뒤 9대손 병선(秉圖•병기(秉夔) 등이 『宋 書拾遺』9권, 『續拾遺』1권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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