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남효온(南孝溫) / 한글번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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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일에 발연을 떠나 폭포 하류를 건너 소인령(小人嶺)을 올라가는데, 재가 험악하고 준급하여 걸음걸음이 쳐다보고 올라가기만 하니, 소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빈 말이 아 니라는 것을 믿겠다. 나는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어서 바야흐로 첫 번 고개를 올라가니 유점산(榆岾山)이 왼편에 있고 불사의봉(不思議峯)이 바른편에 있으며, 동해(東海)가 뒤 에 있고 환희점(歡喜帖)이 앞에 있다. 소인령(小人嶺)이 무릇 여덟 고개인데, 점점 나아 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일곱 번째 고개에 당도하면 세 불사의봉과 더불어 나란하고, 그 나머지 여러 산은 다 눈 아래 있다.
통천(通川)、고성(高城)' 간성(杆城) 등 세 고을이 산 밑에 벌여 있고 아득한 바다를 바 라보면 하늘과 더불어 가이 없다. 여덟 번째 고개를 오르니 불사의봉이 이제는 아래 있 다. 여기서 서쪽으로 돌아 산그늘을 따라가는데, 길은 너무도 험준하며 측백(側柏)은 길 에 비껴 있고 동청(冬靑 사철나무)은 섞여서 나고, 쌓인 눈은 골짝에 가득하고, 송라(松 蘿 소나무 겨우살이)는 나무를 칭칭 감았다. 나는 호표(虎豹)에 걸터앉고 규룡(虯龍)에 오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가게 되어, 몹시 피곤하기에 눈을 가져다 꿀을 타서 마시니 갈증이 문득 풀린다.
이윽고 다시 나서서 돌고 돌며 엉금엉금 기어서 환희점을 오르니, 소인령의 제 팔봉보 가 또 한두 등(等)이 더 높다 점(岾)의 동쪽은 토봉(土峯)이 하나요, 점의 서쪽은 석봉(石 峯)이 셋이다. 환희점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니 철쭉이 덤불을 이루는데 날씨가 차서 망 울만 맺고 꽃은 피지 않았다.
작은 시내 하나 있는 데를 당도하여, 손과 얼굴을 씻고 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두솔 암(兜率菴)에 당도하였는데 이름을 백전(柏田)이라고 한다. 발연에서 여기까지가 삼십여 리나 암자에 들어가 한참 동안 앉았다가 도로 나와 출발하여 1 리쯤 가서 적멸암(寂滅庵) 에 들어가니, 중 하나가 가사(袈裟)를 입고 입정(入定)하였다. 암자 뒤에 토산(土山) 하나 가 있는데 적멸봉(寂滅峯)이요, 암자 앞 골짝 동쪽에 석산(石山)이 있는데 성불봉(成佛峯) 이다. 암자를 지나서 또 돌아서 서북으로 향하여 곧장 한 골짝으로 내려가니 두 개천이 어울려 흐르고 수석이 밝고 상쾌하다. 바로 12폭포의 원류이다.
내를 건너서 올라가니 개심암(開心庵)이 있고, 그 암자에 들어가니 중이 납의(衲衣)를 입고 있을 따름이다. 또 개심전대(開心前臺)에 올라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앞에는 적 멸봉 하나가 있고 뒤에는 개심후봉(開心後峯)이 둘이 있고, 왼편으론 백석봉(白石峯) 하 나가 있는데, 이 봉은 봉우리가 스물다섯이다. 그 아래는 운서굴(雲栖窟)이 있고 바른 편 에는 동구(洞口)이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 요기하고 서울에서 온 거사(居士) 송생(宋生)이 란 자를 보니 그 말이 몹시 허황했다. 운산이 말하기를 “지금 해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이 암자에서는 유숙할 필요가 없고 다시 떠나서 더 가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따라 개심후점(開心後咕)을 넘으니, 이 재는 환희재에 비해 한두 등급이 더 높다.
이로부터는 돌과 나무가 모두 하얗다. 왼편으로 가니 높은 봉 둘이 마주 섰고, 바른편으 로 가니 석봉(石峯) 하나가 송곳과 같이 뾰족한데 아래에는 계조굴(繼祖窟)이 있다. 남쪽 가에 두 봉이 있어 솔과 잣나무가 울창하다. 두 봉이 합친 곳에 오르니 개심후절에 비해 또 한두 등급이 더 높다. 그 등성이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니 측백나무가 길을 메우고 두견화가 만개하여 진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동(洞)은 바로 대장동(大藏洞)인데 수석이 맑고 상쾌하여, 지나온 곳은 이에 비교가 안 되고 동(洞)은 또 그윽하고 깊다. 이 물 근 원을 따라가면 3、4일 후에 바야흐로 비로봉(毗盧峯)에 당도한다고 한다. 우선 눈에 보 이는 것을 기록하면 내의 북쪽에는 석봉이 다섯이요 남쪽에는 석봉이 둘인데, 그 중 하 나는 흰 돌이 포개져 서책(書册)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호승(胡僧) 지공(指空)이 이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안에 대장경이 있으므로 동(洞)이 이로 인하여 대장동이라는 이름 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행장을 풀고 오래도록 앉아 구경하며 석상에서 노숙할 계획을 하니, 운산이 말하기를, “안개가 사람에게 스며드니 곤란하다. 오늘은 날이 비록 저물었지만, 오히려 원적암까지 는 갈 수 있다.” 하므로, 그 말에 의해 대장봉(大藏峯)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돌로 된 봉 다섯이 바른편에 있고 흙으로 된 봉 아홉이 왼편에 있고, 골짝 물은 남쪽으로 쏟는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 바른편 산중 허리를 끼고 한 큰 재에 오르니, 이름은 안문점(雁門岾)인데 안문봉(雁門峯)의 남쪽 가닥이다. 재는 대장후점(大藏後岾)에 비해 또 한두 등급 이 더 높다. 고개를 내려가 서쪽으로 접어들어 시내를 따라가니 왼편에는 산이 있는데, 모두 소나무, 잣나무가 늘어서서, 그 봉우리를 분별하지 못하겠고, 바른 편에는 큰 봉 다 섯이 있는데, 모두 내산(內山)의 남쪽 가닥이다. 냇물 남쪽 토산(土山)의 서쪽에 솟은 봉 셋이 있어 그 머리가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관음봉(觀音峯)이다. 그 봉 아래 돌이 있어 부처 형상과 같은 고로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아래 원적천(元寂川)은 안문천(雁門 川)과 더불어 서로 합쳐, 맑고 넓은 것이 대략 대장동 물과 더불어 비슷하다. 잠깐 동안 앉아 구경하고 물줄기를 거슬러 북으로 올라가니, 밟히는 것이 모두 시냇가 하얀 돌이 요, 좌우로 산 수십여 봉우리가 흰 병풍을 두른 것 같았다.
이윽고 원적암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큰 봉이 있어, 지난 여러 봉에 비하면 몇 백배나 더 높은지 알 수 없으니 이른바 원적봉이요, 원적봉 남쪽에 봉이 있어 원적봉에 비하면 몹시 낮게 보이나, 여러 봉우리에 비하면 또한 차이가 있으니 이른바 원적향로봉(元寂香 爐峯)이요, 암자 동남쪽을 바라보면 토봉(土峯) 하나가 높이는 원적봉과 같고 그 위는 오 목하니, 이른바 안문봉이다. 중이 이르기를, “사자가 그 위에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백전(柏田)에서 여기까지가 또 30리이다. 암자에 중 계능(戒能)이 있어 문자를 조금 이해 한다. 기묘(己卯)일에 원적암을 출발하여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 안문수(雁門水)와 합류 하는 시내 위에 손을 씻고 입을 축이고 물줄기를 따라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묘길상암(妙吉祥庵)에 당도하니, 암자가 시냇가에 있어 수석이 매우 명쾌해 보였다. 여기서부터 철쭉이 피기 시작했다. 냇물 남쪽에 봉우리 넷이 있고, 냇물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석벽 하나가 있다.
나는 시냇가 반석 위에 앉아 양추를 하고 암자에 들어가 제명(題名)하였다. 암자에는 노승 도봉(道逢)이란 자가 있었는데 용문사(龍門寺)의 사승(邪僧) 처안(處安)과 회암사(檜 岩寺) 사승 책변(策卞)이 모두 대우하여 스승으로 섬기니, 이 때문에 명망이 여러 절에 떨쳐 재물을 모은 것이 가장 많았다. 나를 보고 인사하는데 매우 거만하므로 나는 말도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절터가 있고, 절터 안에 돌부처가 석벽 사이에 새겨져 있다. 절터 아래 큰 돌이 있어 위가 편편한데, 냇가 곁에 있으므로 나는 그 위에 앉아 잠깐 쉬었다. 북쪽에는 봉 여덟이 있고 남쪽에는 관음봉 이하 다섯 봉이 있고, 북쪽에는 여덟 봉이 있고 그 뒤에 큰 봉 둘이 있어 그 머리가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원적봉으로 서쪽으로 향해 있고, 그 중 하나는 월출봉(月出峯)인데 남쪽으로 향해 있고, 그 아래는 불지암(佛知庵)과 거빈굴(去賓窟)이 있다.
나는 이 두 암자를 지나서 마하연(摩訶衍) 전대(前臺)에 이르니, 담무갈(曇無竭)의 석상 (石像)이 있다. 대(臺)는 바로 이 산의 한 중심지인데 담무갈은 이 산의 주불(主佛)이다. 그러므로 승속간(僧俗間)에서 여기를 지나는 이는 손을 모아 절하고 가지 않는 이가 없 다. 그런데 운산은 지팡이로 그 이마를 두들겼다. 늙은 중 나융(懶融)이 마중 나와서 나 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마하연의 사적을 보여 주었다. 이때에 우는 비둘기가 뜰 안에 가 까이 다니니, 산 사람의 기심(機心)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뜰에 있는 풀은 그 형상이 부추와 같은데 그 꽃이 조금 붉다. 나옹은 말하기를 “옛날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 말하기를, '이 산은 흙이나 돌이 모두 부처형상으로 되었는데 유독 여기에만 없다.'하여, 부처를 세워 예배하였으니 바로 산정(山頂)의 석관음(石觀音)이다. 그 부처가 선 곳에 이 풀이 나서 지금 백여 년이 지났어도 시들지 아니하니, 산 사람이 지공초(指空草)라고 부 른다. 지공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술사(術士)로서 고려 말에 들어와 그 도술로서 불법을 널리 선포하였다.”고 한다.
나는 만경대(萬景臺)로 가는 것을 나옹에게 청하니, 나옹은 자못 싫어하며 비로봉의 정 상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나옹과 작별하고 만회암(萬灰庵)에 당도하여 종놈 을 시켜 밥을 지어 싸가지고 만경대에 오르기로 하니 만회암 중도 역시 싫어하며 말리 면서 하는 말이, “길이 없으니 가서는 안 됩니다” 한다. 그리고 운산 역시 가고 싶어 하 지 않는데, 내가 강행하여 한 산마루를 넘어 한 골짜기를 내려가고 또 한 마루를 올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그리는데, 낙엽이 쌓여 무릎이 빠지고 썩은 나무가 겹쌓여 동쪽인 지 서쪽인지를 분간할 수 없고 새 한 마리도 울지 아니하며, 다만 두어 길 폭포가 숲 밖 에서 울릴 따름이다 운산이 바윗돌을 타고 올라가니 폭포 위에 또 폭포가 있어 아래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운산은 몸이 오싹하여 간신히 내려오며 하는 말이, “산길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수목 밑만 억측하고 무인지경을 찾아가서는 안 된다.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만회암으로 와서 요기를 하고 도로 마하연을 지나고 또 묘봉(妙逢) 사자(獅子) 두 암자를 지나서 사자 목에 이르니, 그 돌에 쇠줄이 밑으로 드리워져 사람이 더위잡고 올라가는 잡이로 삼았다. 민채(閔漬)의 유점기(榆岾記)에 이르기를, “호승 종단 (宗旦)이 이 산에 들어와서 차지하고자 하니, 사자가 길목에 와서 막고 있으므로 종단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운산은 산마루의 한 돌을 가리키며 저것이 사자의 형상이라 하는데, 나는 자세히 보니 자못 사자와 같지 아니하고 바로 투박한 하나의 둥근 돌이다.
냇물이 여기 와서는 더욱더 기이하고 맑아서 10여 리가 한결같이 하얀 돌이 끊어지지 않고, 곳곳마다 폭포가 있어 그 아래는 깊은 못이요, 못 아래도 역시 폭포가 있다. 그러므 로 동명(洞名)을 만폭동(萬瀑洞)이라 하니, 폭포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 이다. 나는 서쪽 가를 따라 내려갔다. 사자항에서 서쪽 가로 내려가면 봉 넷이 있는데, 하 나는 윤필봉(潤筆峯)이요, 하나는 비로봉(毗盧峯)의 향로봉(香爐峯)이요, 하나는 향로봉의 다음 봉이요, 하나는 금강대(金剛臺)이다. 동쪽에 봉 셋이 있는데 모두 이름이 없다.
이 세 봉을 다 지나면 보덕굴(普德窟)이 있고, 굴 앞의 냇가에 하얀 큰 반석이 있어 수 백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아래위로 폭포가 있고 폭포 아래는 모두 못이 있다. 반석에 앉 아서 암자를 쳐다보니 매우 아름다웠다.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와서 이 산을 구경할 때 에, 한 두목이 있어 하느님께 맹서하기를, "이는 참으로 불경(佛境)이니 원컨대 여기서 죽어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부처의 세계를 보련다" 하고 드디어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지금 저 위 못이 바로 그 못이다. 나는 바위 면에 이름을 쓰고 굴에 오르는데, 돌을 쌓아서 운제(雲梯)를 만들어 높이가 수백여 길이 된다. 그 계단을 다 지나면 암자가 벽 사이에 걸려 있는데, 구리 기둥 두 개가 약 두어 길 되는 것으로 고이고, 기둥 위에다 집 하나로 짓고 쇠줄 하나를 만들어, 한 끝은 기둥에 매고 한 끝은 돌에 매어 또 쇠줄 하나를 만들어, 그 집을 묶어서 두 끝을 돌에 매고 관음(觀音)의 소상을 그 위에 안치하였 다. 또한 사(社)를 지어 중이 거처할 곳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그 곁에다 집 하나를 만들 어 포주(庖廚)로 삼았다. 승사(僧舍)의 서쪽 관음굴(觀音窟)의 위에다 대(臺) 하나를 두어 이름을 보덕대(普德臺)라 하였는데, 보덕(普德)이란 것은 관음 화신(化身)의 이름이다.
나는 먼저 승사(僧社)에 들어가니, 바로 친구 동봉(東峯) 청한자(淸寒子)의 벽기(壁記)가 있고, 허주(虛舟)의 그림이 있다. 이윽고 사(社)에서 굴로 내려오니 쇠줄이 둘이 있으므 로 나는 더위잡고 내려오는데, 판자 소리가 삐걱삐걱하여 공포심이 들었다.
이른바 관음 앞에는 원장(願壯)이 자못 많았다. 나는 나와서 대상(臺上)을 둘러보고 도 로 승사(僧舍)로 들어가 밥을 먹고 내려와, 다시 냇물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흰 돌이 하도 윤택하여 맨발로 거닐어도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앞으로 나가 수건암(手 巾岩)에 당도하니, 동봉(東峯)이 기(記)에 이르기를, “관음이 변해서 아름다운 계집이 되어 수건을 이 바위에서 씻다가 중 회정(懷靜)에게 쫓겨서 바위 밑에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바윗돌이 비스듬하여 혹은 깊은 못이 되고 혹은 폭포도 되었으며, 바위 가에 많은 사람 이 앉을 수 있게 되어 볼수록 심신이 상쾌하므로, 나는 앉았다 누웠다 하며 물을 희롱하 여, 그 기이(奇異)함을 구경하고 떠날 줄 몰랐는데, 운산이 떠나자고 재촉하여 표훈사(表 訓寺)로 내려왔다. 서쪽으로는 금강대(金剛臺)로부터 이하에 열 한 봉을 거쳐왔고 동쪽으 로는 보덕굴(普德窟)로부터 이하에 일곱 봉을 거쳐서 왔다.
이날에 산을 타고 간 것이 전부 30리였다. 주지승 지희(智熙)는 운산의 친구인데, 나를 대우하기를 매우 후히 하여 등불을 켜고 차와 밥을 준비하여 준다. 절에, 지원(至元) 4년 무신 2월에 세운 비가 있는데, 바로 원(元) 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봉명신(奉命臣) 양 재(梁載)가 글을 짓고, 고려 우정승(右政丞) 권한공(權漢功)이 글씨를 썼다. 황제가 표훈 사 중을 재(齋)하여 만인의 결연(結緣)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비석의 뒷면에 태황 (太皇) 태후(太后)가 은포(銀布) 얼마,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얼마, 황후(皇后)가 얼마, 관 자불화(觀者不花) 태자(太子) 및 두 낭자(娘子)가 얼마, 완택독심왕(完澤禿瀋王) 등이 얼 마, 대소 신료(臣僚)가 얼마라는 것을 기재하였으니, 이는 곧 시주한 것을 적은 것이다. 이날 밤에 나를 위해 조그마한 침방을 치워주니 친함을 표시한 것이다.
경진일에 지희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산중의 별미를 있는 대로 장만하여 나를 대접하고 노복들에게도 역시 후하게 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부채 하나 가죽신 하나를 나 에게 선사하고 또 운상에게도 똑같이 선사하였다. 나는 냇가를 따라 오리쯤 내려가서 동 남으로 한 산에 들어가 나무 밑으로 가는데 고개를 들어 보아도 하늘이 뵈지 않으며 역 로(歷路)의 봉만(峯巒)도 헤아릴 수 없었다. 또 5,6리쯤 가니 묵은 성이 있다. 아마도 왜 적의 난리를 피할 때에 쌓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터를 지나서 한 높은 산에 오르니 절정의 동편에 두 암자가 있는데 대송라(大松蘿), 소송라(小松蘿)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발이 다 부르터 걷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대송라에 당도하여 누워서 쉬다가 잠이 들었 다. 잠이 깨자 그 절의 중 성호(性湖)에게 청하여 산길의 앞잡이가 되게 하고 망고대(望 高臺)에 올라 암자 뒤 동쪽 가의 산상을 따라 측백나무 가지를 더위잡고 나뭇가지를 헤 치고 한 산마루에 올라서 또 곧장 산 중허리로 내려가 거기서 돌아서 북으로 올라가니, 깎은 듯한 하얀 돌을 깎아 세운 것이 몇 천인지 알 수 없는데 드리운 것도 같고 떨어질 것도 같으며 왕왕히 쇠줄이 아래로 드리워 손으로 끊고 올라가 승상(僧床)、응암(鷹岩) 의 두 봉 사이로 벗어났다. 승상(僧床)이란 이름은 봉의 아래 돌이 있어 승상과 같기 때 문이요, 응암이란 이름은 봉의 위에 돌이 있어 매의 형상과 같기 때문이다. 응암(鷹岩)의 북쪽에서 절벽으로 오르는데, 혹은 나뭇가지 혹은 돌의 모서리를 더위잡았다. 모두 계산하니 암상(岩上)으로 걸은 것이 약 10여 리쯤 된다. 대상(臺上)에 오르니 4통5달(四通五 達)하여 승상(僧床)、응암(鷹岩) 두 봉이 도리어 산 밑에 있고 전일 만폭동에서 거쳐서 온 여러 봉은 구질(丘垤)과 같아 분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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