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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蘘陽의 漢詩

    345.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남효온(南孝溫) / 한글번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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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다만 보니 진견성봉(眞見性峯)이 북쪽에 당해있고 그 봉 뒤에는 비로봉(毗盧峯)이 형세 가 하늘을 고인 듯하여 여러 봉에 비하면 몇 백 배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전에 평지에 서 쳐다본 것은 바로 그 지엽이요, 상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봉우리 서쪽에 만경대(萬景臺)、백운대(白雲臺)、중향성(衆香城)이 있고 그 다음으로 마하연(摩 訶衍) 후봉(後峯)이 서 비로봉과 연결하여 한 산악을 이룬 것 같다.

    동북에 안문봉(雁門峯)이 있어 비로봉에 다음가고 안문봉 뒤에 대장(大藏)、상개심(上開 心) 여러 봉이 있는데, 다만 뾰족한 머리가 붓끝처럼 보일 뿐이며 여러 뾰족한 봉우리 남쪽에 두 봉이 있어 여러 뾰족한 봉우리에 비하면 2、3 등급이 나직하게 보이는데, 이 름은 십왕봉(十王峯)이다. 봉 뒤에 십왕백천동(十王百川洞)이 있고 냇가에 영원암(寧原 庵)이 있다. 운산이 일찍이 이곳에 올랐다고 한다. 또 십왕수(十王水)가 내려와 만폭동과 더불어 합류하여 장안사(長安寺) 앞 내가 되고 십왕봉 뒤 백천동 동쪽에 토봉(土峯) 하나 가 있어 위는 평평한데 십왕봉보다 약간 높으니, 그것은 천등봉(天燈峯)이요, 그 남쪽에 솟은 봉이 천등봉보다 한두 등급 높으니, 그것은 미륵봉이요, 천등봉 ' 비륵봉의 사이에 두 봉이 그 머리를 내보인 것은 관음봉(觀音峯), 지장봉〈地藏峯)이요 미륵봉 남쪽에 토 봉(土峯)이 있어 미륵봉보다 1、2등급이 낮게 보이는 것이 달마봉(達磨峯)이요, 달마봉의 서쪽에 또한 토산 하나가 있어 몹시 나직한데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산의 남쪽은 곧 금 장(金藏) 은장면(銀藏面)이다. 장안사(長安寺) 서북쪽에 신림사(新林寺)가 있고 신림사 서 북쪽에 정양사(正陽寺)가 있고 정양사 서북쪽에 개심대(開心臺)가 있고 개심대 서쪽에 개심암(開心庵)이 있다.

    그 산이 위까지 통해서 수목이 새파랗게 한쪽을 내리덮었다. 그러나 그 봉이 퍽이나 낮 아서 여러 봉과 비교가 아니된다. 개심대 북쪽에 토산(土山)이 있어 몹시 높아 미륵봉과 더불어 동서로 마주 섰는데, 이름은 서수정봉(西水精峯)이라 그 봉의 남쪽에는 웅호암(熊 虎庵)이 있고 봉의 뒤에는 수정암(水精庵)이 있는데, 곧 비로봉 북면의 물이 쏟는 골짝이 다. 개심대의 뒤 수정암의 남쪽에 한 토산이 있어 개심대 뒷산보다 약간 높은데 이름은 발령(髮嶺)이다. 중이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를 지나다가 이 재에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고 수없이 예배를 드리며 머리카락을 끊어 가지에 걸고 사문(沙門) 으로 들어가려는 뜻을 보였다. 그러므로 이 재를 발령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나는 대석(臺石) 위에 앉아 봉의 이름을 다 묻고서 사방을 두루보니 신기가 화평하고 상쾌하여 몸이 높은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겠다. 한 시간이 지났기로 내려가려 하는데, 안 변(安邊) 중 네 사람이 뒤미처 올라오기에 네 명의 중과 함께 내려왔다. 네 명의 중은 상운점(上雲帖)으로 돌아가고 나는 승상석(僧床石)에 오르니, 심신이 오싹하여 무서운 생각 이 들기로 도로 내려와 송라암(松蘿庵)에 당도하여 벽상을 보니, 친구 대유(大猶)의 이름 및 자와 절구시(絕句詩) 한 수가 있다. 이날에 산길을 걸은 것이 모두 25•6리였다. 윤사 월 신사일에 송라암을 출발하여 옛 성터를 거쳐 남으로 한 골짝을 내려가 왼편으로 두 봉을 지나고 바른편으로 네 봉을 지나서 안양암(安養庵)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나한전 (羅漢殿)이 있어 개명(開明)하여 앉을 수 있기로 나는 그 위에 앉아 일기를 썼다. 암자 앞에 깊은 못이 있으니, 이름은 울연(鬱淵)인데 김동(金同)이 빠져 죽은 곳이다. 김동은 고려 시대 부자 사람인데 평생에 부처를 좋아하여 울연의 위에다 암자를 짓고 모든 바 위의 면에다 불상(佛像)을 조각하여 부처를 공양하고 중을 재(齋)하니 쌀바리가 개성과 연속하였다.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 김동을 보고 외도(外道)라고 지적하니 김동이 불복하였다.

    지공이 맹서를 지어 말하기를, “네가 옳고 내가 그르면 오늘 안으로 내가 천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옳고 네가 그르면 오늘 안으로 네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니 김동이 그 러자고 하였다. 지공은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자는데 과연 밤에 뇌성벽력이 일어나 김동사가 물과 돌에 부딪쳐 김동은 절의 부처와 절의 종 그리고 절의 중과 한꺼번에 울 연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한다. 울연 위 한 마장쯤에 김동사 옛터가 있다. 안양암을 지나 서 동으로 산 중턱을 돌아드니 붉은 척촉과 푸른 솜대[綿竹]가 길가에 가득하다. 미타암 (彌陀庵)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칠봉(七峯)이 열립해 있고 암자 앞에 물이 있다.

    이 물은 바로 울연의 하류(下流)이다. 주승(主僧) 해봉(解逢)에게 청하여 차 한 잔을 얻 어 마시고 식사 후에 왼편으로 명수(明水)•지장(地藏)•관음(觀音) 세 암자를 지나고 바 른편으로 양심(養心)•영쇠(靈碎) 두 암자를 지나니 십왕백천수(十王百川水)가 여기 와서 만폭동과 더불어 합류한다. 이곳을 벗어나니 냇가 돌들이 청흑색으로 변하였다. 미타암 으로부터 십여 리를 향하여 장안사(長安寺)에 당도하니, 이 절은 바로 신라 법흥왕(法興 王)이 초창하였고 원(元) 나라 순제(順帝)가 기황후(奇皇后)가 더불어 중창(重創)하였다. 바깥문에는 천왕(天王) 둘이 있고 맨 안에 법당이 있고, 좌상에 큰 부처 셋과 중 부처 둘 이 있다. 부처 앞에 금으로 쓴 액자(額字)에는 "황제 만만세(皇帝萬萬世)"라 하였다. 

    법당의 4면에 작은 부처 만 5천이 있는데, 모두 원 나라 황제의 소작이요, 그 동쪽 모퉁 이에 무진등(無盡燈)이 있는데, 그 등의 내부 4면은 모두 동경(銅鏡)으로 되고, 가운데다 촛불 하나를 두고 곁으로 여러 중의 형상을 세워, 이내 초에 불을 붙이면 여러 중이 모 두 촛불을 잡고 있는 듯한데, 역시 원 나라 황제의 소작이요, 다섯 왕불(王佛) 위에 또 다섯 중불(中佛)이 있는데, 복성정(福城正)의 소작이다. 당(堂)의 서실(西室)에 달마(達磨) 의 초상이 있고 동북 모퉁이에 나한전이 있고 당에는 금불(金佛) 다섯이 있고, 좌우로 나 한의 소상 16개가 있다. 나한의 곁에 각각 시봉승(侍奉僧) 둘씩이 딸려 기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나한전의 남쪽에 한 집이 있고, 그 집안에 대장경함(大藏經凾)이 있다. 나무로 새겨 3층 집을 만들고 그 가운데 철구(鐵臼)가 있고, 철주(鐵柱)를 그 위에 두어 위로 집 대들보와 연속하게 하고, 함(凾)을 그 가운데 두어 집 한 모퉁이를 잡고 흔들면 3층이 저절로 돌아가게 되니 구경할 만하다. 역시 원 나라 황제의 소작이다. 구경을 다 하고 나니 주지(住持) 조징(祖澄)이 차와 밥을 준비하였다.

    식사 후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그 전에 오던 천변(川邊)을 따라 올라가서, 울연 보현암 (普賢庵)을 지나서 신림사(新林寺)에 당도하여 잠깐 쉬었다. 장한사에서 지나온 여러 봉 과 아울러, 아침나절 지나온 일곱 봉과 십왕동(十王洞) 어귀에서 바라보이는 여러 봉을 합쳐 헤아려보면, 냇물 동쪽에 봉 29개가 있고 냇물 서쪽에 봉 18개가 있다. 여기서부터 올라가는 데는 전록(前錄)에 실려 있다. 신림사(新林寺)로부터 천친암(庵)에 오르고, 천친 암으로부터 정양사(正陽寺)에 올라가면 절재[拜姑]가 바른편에 있다. 중이 말하기를, “고 려 태조가 산에 들어왔을 적에, 5만의 담무갈(曇無竭)이 이곳 재에서 현신(現身)하므로, 태조는 무수히 절을 올렸다. 그래서 이름을 절재라 하였다.”고 하였다. 정양사로부터 또 비를 무릅쓰고 쌓인 수목 속으로 약 10리쯤 올라가서 보현령(普賢嶺)에 올라, 거기서 서 쪽으로 3、4리쯤 올라가서 개심암(開心庵)에 당도하니, 옷이 다 젖고 또 큰 비가 오기 시 작하였다. 이날에 산길로 모두 40리를 걸었다.

    임오일에 비가 개어 개심대에 올라 여러 봉을 바라보니, 망고대(望高臺)와 더불어 대략 같고 조금 다를 뿐이다. 비로봉 중향성(衆香城)은 동쪽에 있고 선암(禪庵) 뒷봉은 서북쪽 에 자리잡고 있으니, 곧 비로봉이 서쪽 가지이다. 마가연 뒷봉은 바로 선암봉(禪庵峯) 앞 에 있고 영랑현(永郎峴)은 선암봉 뒤에 있고 서수정봉(西水精峯)은 영랑현 서쪽에 있고, 월출봉(月出峯)은 비로봉 동남에 있고, 일출봉(日出峯)은 월출봉(月出峯) 남쪽에 있고, 원 적봉(元寂峯)은 일출봉 남쪽에 있는데, 망고대(望高臺)는 보이지 않는다. 원적향로봉(元 寂香爐峯)은 원적봉 남쪽에 있고, 안문봉(雁門峯)은 또 그 남쪽에 있고, 안문봉 북쪽에 한두 봉이 있어 멀리 보이는데, 보문(普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것이다. 진견성봉 (眞見性峯)은 또 안문봉의 남쪽에 있다. 망고대는 또 그 남쪽에 있고 십왕봉은 망고대 위 에 두각만 나타내고, 천등(天燈)•관음〈觀音)•지장(地藏)•미륵(彌勒)•달마(達摩) 여러 봉은 그 동남에 퍼져있는데 이는 그 대략이다. 대 남쪽에 안심대(安心臺)가 있고 대 곁에 개심태자(開心太子)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중이 말하기를, “이는 신라국 태자와 개심 태자가 안심태자와 양심태자 돈대부인(頓臺夫人)과 함께 여기 와서 수도하였는데, 모두 법흥왕의 아들이다.”라고 한다. 지금 네 암자가 있어 그대로 옛이름을 쓰고 있는데, 그런 지 않은지 자상하지 않다.

    식사 후에 개심암으로부터 서쪽으로 묘덕암(妙德庵)을 내려가, 견극선암(見克禪庵)에 들 어가니 뒤에 느린목[緩項]이라 이름된 것이 있는데, 지공(指空)이 산에 들어오던 길이라고 한다. 천덕암(天德庵)을 지나니 암자 앞 수원부(水原府)에 사는 양반집 과부가 도산재 (都山齋)를 베풀어, 중 수백 명이 산 중턱에 열지어 앉아 떠드는 소리가 온 골짝을 요란 하게 하는데, 과부는 뭇 중들 가운데 낯을 드러내놓고 결연(結緣)하고 있었다.

    또 원통암(元通庵)을 지나니 암자의 좌우에 두개의 내가 있어, 암자 앞에 와서 합류하 는데, 역시 승경이다. 여기를 지나서 원통암 뒷재 영랑현(永郎峴)을 오르니 지나온 봉이 일곱이었고, 또 윤필암(潤筆庵) 고개를 넘어 윤필암을 지나고, 또 사자령(獅子嶺)을 넘어 동으로 가니 바로 지난 날 보던 사자암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역시 전록(前錄)에 기재 되었거니와, 산천이 다름없고 하얀 돌도 여전한데, 다만 냇가 양쪽에 철쭉꽃이 지난 밤 비에 활짝 피어 끊임없이 서로 연속하여 가다가는 무더기로 있으니 구경할 만하다.

    나는 그전 길을 따라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안문점(雁門峴)을 채 못가서, 동남으로 한 골짝에 들어가 요기하고 수점(水山峴)을 넘어 동으로 내려 왼편으로 시내 줄기를 보고, 바른편으로 남산을 끼고 나무 그늘 속으로 거닐어 성불암(成佛庵)에 당도하여 불암 위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니, 비가 지난 뒤라 더욱더 환하여 전날에 비할 바 아니었다. 객승(客 僧) 죽희(竹熙)란 자가 나를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였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죽희、성통 (性通)과 더불어 불정암(佛頂庵)을 가보니 암자가 지난해에 화재를 만났다. 불정대(佛頂 臺)에 올라가니 대 가운데 구멍이 있어, 산 밑 깊은 못에 통하여 바람이 그 속에서 나온 다. 중이 말하기를, “옛적에 용녀(龍女)가 이 구멍에서 나와, 차(茶)를 불정조사(佛頂祖師) 에게 받들었다.” 하는데, 그 말이 매우 순진하고 대 아래에 청학(靑鶴)이 해마다 그 가운 데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나는 대 위에 앉아 바라보니 동에는 바다가다고 한다에는 안문봉이 있고, 북에는 상개심(上開心)、적멸(寂滅)、백전(柏田) 등의 절이 있고, 그 아래 는 흰 바위가 한 벼랑을 이루고 폭포가 아래로 드리워 11층을 내려가는데, 반은 숲 속에 들었고 내가 바라본 것은 6층일 따름이다. 저물녘에 돌아와 성불암(成佛庵)에서 유숙(留 宿)하였다. 이날에 산길을 걸은 것이 60리였다.

    계미일에 성불암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여명(黎明)으로부터 하늘 동쪽에 붉은 빛이 비치 더니, 잠깐 사이에 해가 솟아올라 온 바다가 다 붉게 보이고, 해가 간대[竿] 세 길이쯤 올라오니 바다 빛이 맑고 하얗다. 나는 단편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 작은 고개를 넘어 10리쯤 가서 유점사(榆岾寺)에 당도하니, 구 연동(九淵洞) 물 근원이 미륵봉(彌勒峯)에서 나와 절 앞에 당해서는 수점천(水岾川)과 함 께 합류한다. 절에 수각(水閣)이 있어 내 남북쪽을 깔고 앉았는데, 물고기가 앞에서 뛰다 가 큰물이 지면 연어(連魚), 송어(松魚)가 모두 수각 앞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절의 바깥 문은 해탈문(解脫門)인데 천왕(天王) 둘이 있고, 다음은 반야문(般若門)인데 천왕 넷이 있 고 다음은 범종루(泛鍾樓)가 있는데, 누 곁에 한 방에 노춘(盧偆)의 상(像)이 있고, 맨 안 에 능인보전(能仁寶殿)이 있고 전 안에는 나무를 새겨서 산 모양을 만들어, 53구의 부처가 그 사이에 열립해 있고 전 뒤에는 한 우물이 있어 이름을 오탁수(烏啄水)라 한다. 맨 처음 까마귀가 쪼는 것을 보고 발견했기 때문이다. 절에 명(明)이란 사주(社主)가 있어 묵헌(黙軒)、민채(閔漬)의 유점기(榆岾記)를 내보는데, 그 대략에 53구의 부처에 대해서 는 본시 서역(西域) 사위국(舍衛國)에서 세존(世尊)을 보지 못한 삼만가(三萬家)가 문수보 살의 말을 받아서, 석가의 상을 지어 부에[鑄] 쇠북 속에 담아 바다에 띄워 저 갈 데로 가게 하였다. 부처가 월지국(月氏國)에 이르자 그 나라 왕이 집을 지어 부처를 안치하였 는데 그 집이 화재를 만났다.

    부처가 왕에게 현몽하여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니, 왕이 부처를 쇠북 속에 넣어서 또 바다에 띄웠다. 부처가 신라국 고성강(高城江)에 이르니, 태수(太守) 노춘(盧偆)이 부처에 게 살고자 하는 곳을 물으매, 부처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지라 노춘은 뒤를 따라 찾아가 는데, 중[尼]이 돌 위에 앉아 그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이대(尼臺)라 하고, 개가 재 위에 있어 그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구점(狗岾)이라 하고, 노루가 산협(山 峽) 입구에서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장항(獐項)이라 하고, 부처의 머무른 곳에 당도하여 쇠북 소리를 듣고 반긴 데는, 그 땅 이름을 환희점(歡喜岾)이라 하였다. 노춘이 남해왕(南解王)에게 아뢰어 큰 절을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는데, 이름은, 유점사(榆岾寺)” 라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민채의 설이 여섯 가지 큰 망언(妄言)이 있는데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쇠가 물에 뜨는 이치가 없는데, 그, “사위국(舍衛國)에서 지어 부은 쇠북과, 부처가 바다 에 떠나 월지국(月氏國)을 거쳐 신라에 왔다.”는 것이 제1의 크나 큰 망언이요, 쇠란 스 스로 걸어가는 이치가 없는데, 그, “고성강에 밀린 금부처가 저절로 금강산 유점사로 들 어가고, 또 물탕에서 끓어오르는 물방울을 피하여 구연동(九淵洞) 바윗돌 위로 날아서 들어갔다.”는 것이 제2의 크나 큰 망언이요, 불교는 본시 서융(西戎)의 교로써 후한(後漢) 명제(明帝) 시대부터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고, 또 수백 년 후 남북조(南北朝) 시대로 신 라의 중엽에 당하여 동방으로 유입되어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그 법을 이룬 사실 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는데, 그, “전한(前漢) 평제(平帝)의 세상인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조정에 일이 있어 비로소 유점사를 창설하였다.”는 것은 제3의 큰 망언이요, 가령 민채 의 설과 같이 부처가 비록 한 나라 명제 시대에 비로소 중국으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 에 부처가 있기는 남해왕 때부터 비롯되어, 실로 중국보다 앞섰다면 어찌하여 사적에 실 리지 않았겠는가.

    우리 사람이 무식하여 부처를 받들기를 제 아버지처럼 받든다. 그래서 왕건(王建) 태조 의 고명(高名)으로도 속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숭상하기를, “우리가 나라를 지니게 된 것 은 실로 부처의 힘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이때를 당해서 이런 사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언어와 문장을 크게 과장하여 역사에 실었을 터인데, 사가는 오히려 기재하지 않았거늘, 민채는 바로 무식한 야인의 말을 믿고 기록하였으니 제4의 큰 망언이요, 가령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 백성의 중도 있게 되고 신중[尼]도 있게 되어, 반드시 불법(佛 法)이 그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전에 없었던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그, “노춘이 부처를 찾아갈 적에 신중이 길을 인도하였다.”고 했으니, 불교가 있기도 전에 어찌 신중 이 있겠는가. 이것이 제5의 큰 망언이요, 더구나 중국 인물들의 널리 듣고 많이 본 그것 으로도, 오히려 서역(西域)의 범서(梵書)를 통하지 못하여 호승(胡僧)과 더불어 번역을 하 고서야 그 글이 세상에 밝혀졌는데, 사위국 월지국에서 기록한 쇠북에서 글자를 노춘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