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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蘘陽의 漢詩

    220. 스님이 찾는 영혈사(靈穴尋僧) / 삼연 김창흡

    페이지 정보

    조회 19회

    본문

    신령한 스님이 이 절에 오래 머물었는데 神僧所卓錫

    인품 모두 신비함이 있네 風氣團妙有

    돌아가는 봉우리에 따라 학이 머물고 峰廻隨鶴止

    샘이 솟고 길에서 호랑이 표호하네 泉涌經虎吼

    동재에서 불경 한 권 들고 읽는데 東齋貝葉書

    태수가 찾아 왔네 扣玄來太守

    팽택에서 높은 자리 능히 할 수 있는데 能爲彭澤高

    원공은 술로 병들지 않는 다오 遠公不病酒

     

    팽택(彭澤)-진(晋)의 도연명(陶淵明)은 팽택(彭澤)의 수령이 되었으나 관리생활에 염증을 느끼자 80여일 만에 사직한 내용이다.

    원공(遠公)-진나라 고승인 慧遠

     

    『三淵集」

     

    김창흡(효종 4년, 1653년〜경종 2년, 1722년)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이다.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아들이다 형 은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창협(昌協)이다. 15세에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친명(親命)으로 응시하 여, 현종 14년(1673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 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숙종 7년(1681년)에 김석주 (金錫胄)의 천거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89년 기사 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의 『史 記』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 픔을 잊으려 하였다. 1696년에 서연관(書筵官)에 초선(抄選)되고, 경종 1년(1721년)집의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 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 화되어 죽었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황(李滉)의 주 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하는 형 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 덕원의 충곡사(忠谷祠),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양구의 서암사(書巖祠),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포천의 요산영당(堯山影堂), 한성의 독충당(篤忠堂)에 제향 되었다. 저서 『삼연집』,『瀋陽日記』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