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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에서 영서를 잇는 백두대간의 영(嶺)

    2.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피래(避來)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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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필례  계곡을  중심으로  내린천로  방향을  따라가면  대부분  지명이  군사용어  같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난리(亂離)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라는“피래(避來)”“필예(必曳)”는 은둔(隱遁)의 계곡(溪谷)에서 재기를 꿈꾸는 범상치 않은 곳임을 의미한다. 한계산성(寒溪 山城), 군대의 진을 뜻하는 원진개(遠鎭介), 갑둔리(甲屯里), 귀둔리(貴屯里), 식량과 관련 이 있는 군량밭〔軍糧田〕, 소와 말을 기르던 쇠물안골〔牛馬洞〕, 망을 보는 곳인 망대암(望 臺岩)이 그것이다. 이런 이름들은 항몽투쟁(抗蒙鬪爭),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들과 관계있다는 기록도 간혹 있지만, 구전되고 있는 마의태자의 전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 으로 알려져 있다.



    가. 신라의 멸망 후 마의태자가 된 사연과 이주(移住)


    『삼국사기』권 제12 신라본기 제12를 보면 경순왕 9년(935년 10월)에“경순왕이 사 방토지가 모두 다른 나라의 것이 되고 국력은 약세로 고립되니 스스로 안정시키기 불가 능하여 아랫사람들과 더불어 토지를 들고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까 하는데 신하들의 의견 은 가한지? 불가한지? 를 논의하라 하니”“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天命)에 달린 것 이오니. 오직 충성스러운 신하, 의로운 선비와 합심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스스로 지키다 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주 겠느냐고 태자가 왕에게 울며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 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치니”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일설은 경순 대왕께 태자가 크게 반발하자 신하들도 삼국사기 원문에서처럼 전 쟁도 없이 나라를 바치는 것에 대하여“혹은 반대하고 혹은 찬성(或以爲可, 或以爲不可)” 하였으니 반대파는 태자가 움직일 때 한 무리에 소속되어 함께 하였다고 한다.

    마의태자는 신라를 출발하여 충주와 원주를 거쳐 양평에서 홍천을 지나 인제로 들어오 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사찰과  인연이  확인된다. 가까운  곳  위주로  살펴본다면  홍천군 동면에는  왕이  지나갔다  하여  지왕동(至王洞)과  왕터인  왕지(王址)가  있으며    인근에는 사찰이 있었다 한다.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金富里)에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의태자 김 일(金鎰)의 위패를 모신 대왕각(大王閣)이 있는데 마을에서 일 년에 두 번 재(齋)를 모신 다고 한다.


    ■ 위패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이다. 신라 경순 대왕의 태자 김일(金鎰)의 신위를 지금까지 모시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태자 공 후손들의 집성촌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 마의태자가 세상을 등지고 이동해 오는 곳마다 사찰과의 전설이 전하는 것은 당시 에 충신들이 신라의 복원을 꿈꾸며 승려로 신분을 숨기고 의탁할 수 있는 좋은 곳 으로 사찰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마의태자와 가까운 거리에서 합법적으로 대 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사찰이었을 것이다.



    나. 마의태자의 유적과 진위 논란


    이 지역에는 마의태자에 대한 지명과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신라의 옥새(玉璽)를 숨겼 다는  옥새바위, 마의태자의  수레(手車)가  넘어  다녔다는  수구네미, 맹장군이  마의태자를 수행하며  의병을  모으고  군사적인  준비를  하던  맹개골, 군량미를  경작하던  군량전(軍糧 田), 고토를  회복하고  항거운동을  하기  위한  다물리(多勿里), 이  밖에도  옥터골〔獄垈谷〕 과 갑둔리(甲屯里), 을둔리(乙屯里) 등으로 대부분이 군사적인 용어이다.

    부령 김씨 세보(世譜)에는 경주김씨 29세인 경순왕의 아들 태자 일(鎰)을 시조로 모시 는데 자(字)는 겸용(謙用) 시호는 태자공(太子公)이라 기록되어 있다.

    ‘김부리의 김부(金富)가 마의태자 김일(金鎰)이 아니다’라는 논란도 있지만 향찰 표기 의 전문가인 청주대 양원철 교수는 일(鎰)자와 부(富)자는 같은 뜻으로 일(鎰)자는 무게 단위인‘스물넉 냥’을 나타내지만, 그 뜻으로는 잘 쓰이지 않고 아래와 같이 해석되어 두 글자는 “넉넉하다”와“많다”는 뜻으로 쓰여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이런 표기는 당시에 신분과 이름을 감출 때 사용되었으며 옛 문헌에도 가끔 볼 수 있어 사례로 소개된 것을 인용한다.


    ■ 당시는 일(鎰) = 일(溢) 같이 쓰였으며 가차별작(假借別作)으로 하면 익(益)으로 부 (富)와 같은 뜻(많다, 넉넉하다)으로 쓰였다.

    ■ 牛首州(우수주) = 牛頭州(우두주) ⇒ 수(首)와 두(頭)는 ‘머리’를 뜻하므로 같은 지명 

    ■ 月明里(월명리) = 月明巷(월명항) ⇒ 리(里)와 항(巷)은 ‘마을’을 뜻하므로 같음. 

    ■ 居柒夫(거칠부) = 荒宗(황종) ⇒ ‘居柒’은 ‘거칠’로  읽히며, 부(夫)는 ‘마루’이다.

    ‘荒’은 거칠황이니 ‘거칠’이고, ‘宗’은 마루 종으로 ‘마루’이니 같은 사람이다. 논란은  있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김부(金富)가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이라는 것이다.



    다. 삼국사기에 대한 의구심(疑懼心)


    『삼국사기』에서는 “왕자가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 를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의 태자에 대한 입산(入山) 이후의 행적은 어디에도 없다.

    개골산이 금강산으로 확정적으로 되어있기는 해도 혹자는 개골산은 낙엽이 진 앙상한 겨울산으로 눈 덮인 설악산(雪岳山)과 그 의미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금강산과 설악산의 물리적 거리는 생각보다 매우 짧은데 1911년 일제가 사찰을 통제하기 위하여 시행한 본·말사법(本末寺法)에 의해 우리 지역의 모든 사찰은 금강산 건봉사의 말사로 관 리되어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에 올라 있었다.

    1987년 갑둔초등학교 이태무교사에 의하여 발견된 인제 갑둔리 5층 석탑은 신라가 멸 망한 뒤에도 유민(遺民)들이 오랫동안 고토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였으며, 김부와 그 가계 (家繼)의 역할을 놓아줄 수 없어 간절한 발원으로 붙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의하면 요나라 연호 태평 16년이면 1036년으로 신라가 망하고 이미 100년이 흘러 고려 정종 2년이다. 그때까지도 김부를 기렸다면 신라의 부흥 운동은 계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인제 갑둔리 5층 석탑 명문의 해석문

    “널리  보살계를  지키는  부처님의  제자  구는  상주(돌아가신  왕)인  김부와  가문의  수명 이 오랫동안 보존되도록 5층 석탑을 만들어 영원토록 공양합니다. 1036년 8월”


    『고려사(高麗史)』권21, 세가(世家), 신종(神宗) 5년(1202년) 음력 10월에 “최충헌(崔忠獻)이 이 소식을 듣고 재상(宰相)과 여러 장군을 대관전(大觀殿)에 모아놓고 의논하기 를, 경주 사람들이 함부로 옳지 않은 일을 하더니 지금 다시 패거리를 모아서 인근 고을을 공격하고 있으니, 마땅히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해야 합니다.”라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망한 지 20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신라 유민의 반발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마의태자의 금강산행은 좌절한 왕자가 도망치듯 속세를 등진 것이 아니라 재 기를 위해 기회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한다.

    양양군 서면의 구룡령 아래인 갈천리 소재 “왕승골〔王承洞〕”에도 절골〔寺谷 : 옛 절터〕 이 있는데 곳곳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그래서 이곳이 마의태자의 “왕궁터”였다 는 전설이 전한다. 이곳에서 북쪽 고개를 넘으면 진동계곡을 거쳐 귀둔리로 이어진다.

    필례령을 넘으면 이어지는 필례 계곡은 1003.8m봉-망대암산-점봉산-작은 점봉산-곰 배령〔丁嶺〕-가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1003.8m봉-가리봉-주걱봉-삼형제봉으로  이어 지는 가리 능선 사이의 깊은 골짜기다. 이 정도 계곡과 산성(山城)이면 마의태자가 머물며 요새(要塞)로 삼아 신라의 부흥을 꿈꾸었을 개연성(蓋然性)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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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9〉갑둔리 5층 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