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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에서 영서를 잇는 백두대간의 영(嶺)

    5. 보부상(褓負商)의 바꾸미[物物交換] 길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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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오색령은  소동라령의  기능이  미시파령(미시령)으로  옮겨간  후에도  과객(科客)이나  양반, 관료들이  다니는  공로(公路)의  기능을  일부  하였다면  필례령은  보부상이나 “바꾸미 (物物交換)”하던 일반인이 넘어 다니는 지름길(捷徑) 이었다.

    부보상(負褓商)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말인데 보상은 주로 기술적으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한데  반하여,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일용품  등 가내 수공업품  위주로 판매를 하였다. 또한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고,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도  하고  바꾸미(物物交換)도  하였다. 이에  따라  보상을 “봇짐장수”, 부상을 “등짐장수”라고 하였다.

    영동과 영서를 오가는 장사는 주로 특산물을 옮기는 부상으로 나귀나 소의 등에 짐을 싣는 질매를 이용하였다.

    영(嶺)을  넘어  인제에  도착하려면  100리길(40㎞)이라  나귀에  짐을  싣고  가면  사나흘 에서 열흘 이상씩 이장 저장을 돌며 장사를 하고 돌아와야 수지가 맞았다.

    영서 사람들도 주먹밥을 싸서 필례령을 넘어 옥수수와 감자, 콩, 나물 등을 생선과 바 꾸기 위해 왕래했지만 설 전에는 제사에 사용할 어물을 구하기 위하여 더욱 빈번히 오갔다.



    가. 양양의 토산물


    『신동국여지승람』 권44 양양부 토산(土産)조에 보면 철(鐵)이 나오는데 지금의 양양 철광의 위치인‘서선사(西禪寺) 동쪽 봉우리 아래서 나온다.’는 기록을 보아 오래전부터 철은 양양의 특산물로 진상도 했지만, 각종 농기구나 무기 등을 만들어 민간에 유통하고 영서지방으로도 많이 팔렸을 것으로 보인다.

    양양  보부상  물목에는  소금, 미역, 김  등과  각종  어류(魚類)가  많이  있다. 영서(嶺西) 지방에는 생산이 되지 않아 필수로 포함되어 있는데 짭짤한 이득을 보았다.

    소금이라면 서해안의 염전에서 나오는 천일염만 알고 있으나 조선 시대에는 동해안 바 닷가에서도  소금이  생산되었다. 조선  시대  동해안  일대에서는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염분(鹽盆, 소금가마)이  있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가마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우리나라 전통 소금 제조방식으로 만들어진 소금을 “자염(煮鹽)”이라 하였다.

    전국의  소금가마  개수가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해오는데  양양도호부는  동산현을  포함 하여 40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