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지 실사를 통해서 본 소동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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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강원도(江原道) 간성군편에 보면 “미시파령(彌時坡嶺)은 고을 서남쪽 80리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成 宗)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 고,『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부 산천조에도“소동라령(所冬羅嶺)은 부 서쪽 60리에 있으 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외따로 떨어져 구석지고 몹시 으슥하다. 예전 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과거 소동라령으로 부르던 북암령을 실사한 결과 귀둔〔耳屯,耳呑〕에서 진동리 로 연결되는 곰배령 옛길은 이미 탐방코스가 되어있었다.
기린면 진동리 230번지 일원에서 북암령 정상까지는 완만한 고개이며 일부 도로가 유실되긴 하였으나 옛길의 도로 폭이 2m 정도로 우마차가 다닐만한 대로(大路)였다. 정상 에는 이정표를 세웠던 돌무지가 있었다.
〈그림 11〉현 북암령 정상 표지판과 이정표로 상징되는 옛 돌무지 모습
“조선시대는 6척(尺)을 1보(步),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이라고 하고 10리마 다 작은 표식을, 30리마다 큰 표식을 세웠다. 30리마다 역을 설치하도록 규정하였고, 일 정한 거리마다 돌무지를 쌓고, 장승을 세워 거리와 지명을 기록한 도로표지를 설치하였 다.”영 정상의 돌무지 주변에는 돌이 없는데도 규격이 고른 돌을 쌓은 것으로 보아서 국가에서 관리하던 역로를 표시하려고 일부러 옮겨다 쌓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상에서 북암리로 향하는 동쪽은 급경사로 계곡을 따라 길이 형성되어 폭우로 많은 구간이 유실되어 있었으나 영로가 폐지된 지 530여 년이 지났음에도 일부 구간에는 도 로의 형태가 남아있었다. 노폭은 진동리 방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2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양양에서 한(寒:발딱) 고개나 망령(송천리로 향하는 언덕) 고개를 먼저 넘 은 후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窮僻地)라는 소동라령을 다시 올라야 하는 것은 고된 길 로 보였다. 특히, 국가가 관리하는 역로(驛路) 인데도 비만 오면 유실되는 급경사인 소동 라령은 관리하기 매우 어려워 결국은 폐지하게 되었다.
지역주민에 의하면 조선말까지도 일반인들은 이 영을 많이 이용했다고 하며 이를 입증 하듯이 1911년 조선 지지자료를 바탕으로 만든『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인제편 영치현 명(嶺峙峴名)에 보면 곰밴령(丁嶺, 곰배령)을 양양으로 통하는 영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행자들이 민가에서 숙박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국가에서 관장하던 원(院)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그 기능이 쇠퇴하자 개인이 운영하는 주막〔店舍〕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진동리에서 길손들이 먹고 자던 주막으로는 갈터주막, 삼거리주막이 있었으며, 귀둔리에는 버덩말주막, 곰배골주막, 하추리에는 가래울어주막, 당수터주막, 원대리에 안삽재주막 등이 있었다. 이 구간에 특별히 많은 주막이 남아 있었던 것은 영로를 넘는 길손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림 12〉인제 기린면 진동리에서 본 소동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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