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현재 지명과 비교 및 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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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동라령과 소어령, 북암령
그렇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기록들을 바탕으로 소동라령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보고자 한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유 금강산기』를 보면 “(낙산사에서) 20리쯤 가서 양 양부(襄陽府) 앞의 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또 10리를 가서 설악에 들어가 소어령(所於嶺 : 소동라령의 옛 이름) 아래 고개에 오르니, 냇물은 왼쪽에 있고 산봉 우리는 오른쪽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 냇물을 건너 왼쪽으로 가니, 산은 맑고 물 은 빼어나며 흰 바위가 서로 포개진 것이 대략 금강산 대장동(大藏洞)과 같다. 물줄 기를 따라 올라가서 오색역(五色驛)에 이르니 산 위의 달이 이미 흰빛이었다.”84)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어령(所於嶺)은 일본인들이 만든 지명으로 지금도 옛 지명인 소어(所於), 소래 〔所川〕라고 부르며 소동라령의 준말을 소어령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림 10> 오늘날의 지도에 고지도를 연계시켜본 소동라령
양양에서 오색으로 향하노라면 중간쯤 지점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개가 있다. 일 명 발딱고개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한령(寒嶺)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송어리와 송천리인데 두 마을 사이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 북암리(北崦, 北庵 里)로 기린면 진동리로 연결되는 대로(大路)에 옛 고갯길이 있다. 지금은 북암령이라 고 불리고 있으나 이 고개의 옛 지명이 소어령 즉 소동라령이다. 이는 박달령이 일본 식 한자인 단목령(檀木嶺)으로 바뀌었듯이 북암령이라는 지명도 1916년 행정구역 폐 합에 따라 북애미85)를 일본식 한자인 북암리로 고친 후, 영의 이름도 일본식 지명인 북암령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로인 옛길은 있는데 고지도에는 소동라령만 있을 뿐 소어령이나 북암령의 표기는 없다. 그러나 위치가 일치하기에 소동라령의 다 른 이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유 금강산기의 남효온선생도 소어령 아래 고개를 지 나 오색으로 갔다고 하고 있어 소동라령 아래 한(寒)고개나 망령(望靈 : 송어리에서 송천을 넘는 재) 고개를 지나 오색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그림 10〉에서 보듯이 소동라령은 양양부관아에서 흑간리(양양 광업소 사항골)를 거쳐 소량치와 가라피리를 내려와 망령고개(望靈峙)나 한령을 넘고 송천이나 송어리를 거쳐 지금의 북암령(소동라령)을 넘어 기린현 내 진동리 현 점봉 산산림생태관리센터86)로 산을 내려간 후 곰배령을 거쳐 귀둔, 추동, 고사촌, 합강정을 경유해 인제로 연결되는 영로였다.
2. 현지 실사를 통해서 본 소동라령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강원도(江原道) 간성군편에 보면 “미시파령(彌時坡嶺)은 고을 서남쪽 80리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成宗) 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87)고 적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부 산천조에도 “소동라령(所冬羅嶺)은 부 서쪽 60 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외따로 떨어져 구석지고 몹시 으 슥하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88)고 기록되어 있 다. 그런데, 과거 소동라령으로 부르던 북암령을 실사한 결과 귀둔〔耳屯,耳呑〕에서 진동리로 연결되는 곰배령 옛길은 이미 탐방코스가 되어있었다.
기린면 진동리 230번지 일원에서 북암령 정상까지는 완만한 고개이며 일부 도로가 유실되긴 하였으나 옛길의 도로 폭이 2m 정도로 우마차가 다닐만한 대로(大路)였다. 정상에는 이정표를 세웠던 돌무지가 있었다.
“조선시대는 6척(尺)을 1보(步),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이라고 하고 10리 마다 작은 표식을, 30리마다 큰 표식을 세웠다. 30리마다 역을 설치하도록 규정하였 고, 일정한 거리마다 돌무지를 쌓고, 장승을 세워 거리와 지명을 기록한 도로표지를 설치하였다.”89) 영 정상의 돌무지 주변에는 돌이 없는데도 규격이 고른 돌을 쌓은 것 으로 보아서 국가에서 관리하던 역로를 표시하려고 일부러 옮겨다 쌓은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림 11> 현 북암령 정상 표지판과 이정표로 상징되는 옛 돌무지 모습
정상에서 북암리로 향하는 동쪽은 급경사로 계곡을 따라 길이 형성되어 폭우로 많 은 구간이 유실되어 있었으나 영로가 폐지된 지 530여 년이 지났음에도 일부 구간에는 도로의 형태가 남아있었다. 노폭은 진동리 방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2미터 이상 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양양에서 한(寒 : 발딱) 고개나 망령(송천리로 향하는 언덕) 고개를 먼저 넘은 후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窮僻地)라는 소동라령을 다시 올라야 하는 것은 고된 길로 보였다. 특히, 국가가 관리하는 역로(驛路)90) 인데도 비만 오면 유실되는 급경사인 소동라령은 관리하기 매우 어려워 결국은 폐지하게 되었다.
지역주민에 의하면 조선말까지도 일반인들은 이 영을 많이 이용했다고 하며 이를 입증 하듯이 1911년 조선 지지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 인제 편 영치현명(嶺峙峴名)에 보면 곰밴령(丁嶺, 곰배령)을 양양으로 통하는 영로라고 기 록하고 있다. 여행자들이 민가에서 숙박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국가에서 관장하 던 원(院)91)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그 기능이 쇠퇴하자 개인이 운영하는 주막〔店 舍〕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진동리에서 길손들이 먹고 자던 주막으로는 갈터 주막, 삼거리주막이 있었으며, 귀둔리에는 버덩말주막, 곰배골주막, 하추리에는 가래울 어주막, 당수터주막, 원대리에 안삽재주막 등이 있었다. 이 구간에 특별히 많은 주막 이 남아 있었던 것은 영로를 넘는 길손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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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至襄陽府前川上歇馬。又行十里入雪岳。陟所於嶺下峴。則川水在左。峯巒在右。過盡山麓。涉川流而左。山明水秀。 白石交加。略如金剛山大藏洞。沿流而上。至五色驛。山月已白矣。是日。陸行三十里。山行四十里。
85) 『한국지명총람』 한글학회, 1967, p217
86) 점봉산산림생태관리센타 : 기린면 진동리 218번지
87)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강원도(江原道) 인제현 彌時坡嶺在郡西南八十里許有舊廢不行 成宗二十四年以襄陽府所冬羅嶺險危復開興路
88)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부 산천조 在府西六十里重巒疊嶂地勢險阻舊有路通京師今廢
89) 『양양군지』 양양군, 발행일 2010, 11, 30, 163페이지 교통과 통신
90) 국가관리의 역로(驛路)는 오늘날의 국도와 동일한 개념이다.
91) 원(院)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 길목에 설치한 편의 시설이다. 때때로 일반인도 숙식하였다. 원은 대체로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 역과 원을 합쳐 역원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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