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주사의 창건과 연혁(沿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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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사는 고려(高麗) 목종(穆宗) 12년(1009) 혜명(惠明) 대사와 대주(大珠) 대사가 창건하고 사찰의 명칭을 두 스님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명주사(明珠寺)14)라 하였다.
혜명 대사에 대하여는‘1006년(목종 9)에 관촉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관촉사(灌燭寺) 은 진미륵(恩津彌勒)과 관련한 전설이 있어 아래에서 따로 정리하겠지만 생몰(生歿)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대주 대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어 따로 기록할 것이 없다.
창건 당시 비로자나상(毘盧遮那像)을 조성 봉안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여러 차례의 소실로 남아있지 않다. 법신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셨으면 당시 사찰규모로 보면 대적광전(大寂光殿)이 금당(金堂)15)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은『화엄경 華嚴經』의 교주(敎主)로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다. 때와 장소 및 사람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낸다. 이 는 비로자나불이 잠시도 쉬지 않고 진리를 설파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로자나불상은 보통 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16)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는 지권 인이 변형되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가 나타난다. 비로자나불에 의해서 정화된 세계는 바로 우리들 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비로자나불은 좌 보처에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우 보처에 실천을 통한 자비의 화신인 보현보 살(普賢菩薩)을 함께 모시는데 명주사 창건 당시에는 오대산 문수보살(文殊菩薩) 신앙17)으로 인하여 더욱 그러 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특히,『건봉사급건봉사말사적』165쪽에 명주사 전각 중에 문수보살을 뜻하는 만 수실(曼殊室)18)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명주사에도 문수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확신을 할 수 있다.
또한 혜명 대사가 관촉사(灌燭寺)에서 은진미륵을 조성할 당시 불상은 세우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제마을 의 동자 2명은 나중에 문수(文殊)보살과 보현(普賢)보살의 현신(現身)이었음이‘관촉사사적비(灌燭寺事跡 碑)’에서 밝혀지는데 이 두 보살은 바로 비로자나불의 보처(補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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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절의 본당
16) 금강계(金剛界)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만드는 인상(印相).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쳐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쥠. 오른손은 불계 (佛界)를,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닌 일체라는 깊은 뜻을 나타냄. 곧, 무지(無智)를 떨치고 불지(佛智) 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함.
17) 오대산 문수신앙은 자장(慈藏 :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대국통을 지낸 승려)에 의해 시작.
18) 문수보살의 산스크리트어 원명은 만쥬수리(Manjusri)이며 한역(漢譯)으로는 문수사리(文殊師利), 만수시리(滿殊尸利) 또는 만수실리(曼 殊室利)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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