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1928년 당시 명주사의 건물별 규모 및 용도 : 15개 전각, 95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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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명 | 규모 | 주요내용 |
합계 |
95 |
15개전각 |
독성각(獨聖閣) |
1 |
스승 없이 혼자서 깨친 독각(獨覺)인 나반존자(那般尊者)를 봉안한 전각. |
산신각(山神閣) |
1 |
산신(山神)을 모신 전각. |
어향각(御香閣) |
9 |
왕실에서 하사한 재물 등으로 사찰이 중흥하게 됨을 이유로 왕실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전각. |
응향각(凝香閣) |
6 |
“부처님의 무언의 설법이 있어 향기가 모이는 자리”라는 뜻의 전각. 참선관련전각 |
진영각(眞影閣) |
6 |
고승(高僧)이나 선지식(善知識)의 초상(肖像)을 두는 전각. |
원통암(圓通庵) |
30 |
관세음보살의 육근원통(六根圓通)을 상징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원만히 두루 통한 다”는뜻 |
현위실(弦葦室) |
6 |
현위에 현(弦) 은반달을 말하며, 위(葦)는갈대로어두운밤에갈댓잎을하나를타고 강을 건너 피안(彼岸)간다는 뜻의 일위도강(一葦渡江)으로 선방(禪房)을 가르킴. |
만수실(曼殊室) |
6 |
만수실리(曼殊室利)는 만주슈리의 음역으로 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처럼 “많은 복덕 과반야지혜”를 상징하는 공부방 |
미타암(彌陀庵) |
6 |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사내(寺內) 전각 |
삼보방(三甫房) |
6 |
절에서감무(監務),감사(監事) ,법무(法務)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절 집 |
고(庫) |
6 |
절의 곳간, 창고 용도 |
욕 실(浴 室) |
3 |
목욕하는 곳 |
족침실(足砧室) |
2 |
디딜방아로 곡식을 빻는 곳 |
수침실(水砧室) |
4 |
물레방아로 곡식을 도정(搗精)하는 곳 |
변 소(便 所) |
3 |
용변을 보는 곳으로 해우소(解憂所)로 부름 |
위에서 전각들의 용도를 정리해 놓긴 했지만 현위실(弦葦室)은 선방(禪房)이며, 응향각(凝香閣)과 만수실 (曼殊室)은 경전을 공부하는 용도의 방이었다.
특히 원통암이 30간이나 되는 이유는 회산거사(晦山居士) 정현동(鄭顯同)이 기록한『원통암중수기(圓通庵 重修記)』에 잘 나타나 있는데“보위공(용악)은 학운 선사에게서 적통의 법을 전해 받았다. 내전(불교)과 외전 (유교), 묘원(妙圓) 한 선(禪)과 교(敎)의 양종에도 정통했다. 호주와 퇴운, 자영과 더불어 학문적 체계로 일 가를 이루니 남북 사방에서 배우려는 자가 운집하여 건물이 좁아서 모두를 수용할 수 없었다. 항상 더 확장 할 뜻이 있었으나 행할 때를 놓쳤다. 42년 후인 병오(1906)년에 산에 묻힌(열반하신) 학운 선사의 선지(先 志)를 모두가 두려워하여 추진하지 못하다가 도모한 것이 그것의 중건이었다. 음력 2월 봄이 한창일 때 시작 하여 한여름인 5월에 공고하게 마치니 모두 4개월에 6천원의 금액을 썼다.”32)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학승들을 기르기위해 원통암을 강원(講院)으로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욕실(浴室), 족침실(足砧室), 수 침실(水砧室)이 있는 것도 많은 학승이 기거하기 때문에 일시에 씻어야 하고, 여러명이 먹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방편(方便)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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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圓通庵重修記(원통암중수기)』: 衛公 師之嫡傳也 精通內外二典妙圓禪敎兩宗 與虎舟 退雲 慈楹 一家於南北 四方之學者雲集 舍不能容 常有 志乎增廣 以以峕絀擧嬴 未瞰焉 後四十二年丙午 山中之人 咸懼先志之未就 謀所以 重建之 始役于仲春 至仲夏而功高訖 計四箇月 用金六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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