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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문화36호

    가. 대흥사 동종(銅鐘)의 명주사 이안(移安) 내력(來歷)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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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현재 명주사에 소장 중인 양양 명주사 동종의 봉안처는 대흥사(大興寺)로 1704년(숙종 30) 갑신(甲申) 2월 강원도 울진 남령 태백산에 위치한 대흥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대종으로‘대흥사명(大興寺銘) 범종’이라고 한다. 이 동종의 원봉안처(元奉安處)가 울진군(蔚珍郡) 태백산에 소재했던 대흥사(大興寺)75)였기 때 문이다. 대흥사는 대형 화재로 소실된 정림사(井林寺)의 옛 터에 1675년(숙종 원년)에 세워진 사찰로 산내 암자로 적조암과 수도암을 두면서 19세기 중반까지 불영사와 함께 울진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으나, 1872년 부터 1909년 사이에 폐사되었다.76)

    이 동종은 주조된 후 강원도 울진현(蔚珍縣) 대흥사에 봉안되었다가 폐사 후 1897년(대한제국, 광무 원년, 丁酉) 이후에 양양 명주사로 옮겨졌을 것으로 보여지며, 1906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방법은 매매(賣 買)로 추정된다.

    『건봉사급건본사말사적』에 의하면 1897년 명주사(明珠寺)가 소실되었다. 차후로부터 원통암(圓通庵)에서 사무(寺務)를 행하니 지금의 명주사는 원통암을 말하게 되었다. 1906년(대한 광무 10년, 丙午)에 원통암(圓 通庵)을 확장하여 중건하였다. 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범종의 매입 시기는 사찰이 소실되어 매우 어려워진 시 기인 1897년보다는 사찰을 확장하고 중건하던 시기가 범종을 맞이할 수 있는 여력이 더욱 있었을 것으로 보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향시청 학예연구사 김수현의『양양 명주사 소장 1704년 작 울진 대흥사범종과 제작 주종장 연 구』논문의 1쪽에“1878년 큰 화재로 소실되자 원통암으로 이전하여 지금의 명주사가 되었다. 이 작품은 1879년 이후에 대흥사에서 명주사로 이안되었고,”라는 기록은 오기(誤記)로 1879년이 아닌 1897년에 명주 사가 소실 된것으로 바로 잡는다.

    사찰을 창건하면 사찰의 규모와 재력을 고려하여 종을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드물게는 범종을 제작하는 대신 다른 사찰의 종이나 폐사지(廢寺址) 등의 범종을 구입하여 봉안하는 경우도 있는데「봉인사부도암금종기」·『조계산 송광사사고』·「진남군벽발산안정사대종 연기」등의 사례가 있어 양양 명주사 동종 도 같은 방법으로 이안(移安) 되었을 것으로 확신하나, 재원에 대하여는 대시주(大施主)에 의한 보시(布施)로 추정된다.

    특히, 동종의  제작과  전혀  관계없는 문자가 동종표면에 선각(線刻)되어 있는데‘정충득수복발원(鄭忠淂壽福發願)’이다.

    범종을 훼손 했다고 느낄만큼 종(鐘)의 표면에 뚜렷하게 선각된 이 발원문으로 보아 동종을 대흥사에서 명주사로 옮기는 불사(佛事)에 큰 도움을 준 시주자가 정충득(鄭忠淂)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렇기 때문에 대시주(大施主)인 정충득을 주종 당시의 예(例)로 종의 표면에 선각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강원대학교중 앙박물관지 제29호에 발표된『양양 명주사 소장 1704년 작(作) 울진“대흥사명 범종”과 제작 주종장(鑄鐘 匠) 연구』에서는‘이 선각이 동종을 명주사로 이안(移安)된 시점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는 틀림 이 없다.’라고 발표한 바 있어 가능성은 더욱 짙다고 하겠다. 또한 범종의 이안과 관련한 기록이 명주사에 없는 것은 오로지 시주자에 의하여 범종이 명주사로 이안되어 왔을 가능성을 더욱 짙게해 준다.


     

    040-1 (2).jpg

    〈그림 17〉명주사 동종과 정충득수복발원 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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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대흥리 295번지 일원 44

    76) 양양 명주사 소장 1704년작 울진<대흥사명 범종>과 제작 주종장 연구, 김수현, 고양시청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