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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문화36호

    가) 연파당대선사(蓮坡堂大禪師)의 비(碑)와 부도(浮屠)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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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① 연파당대선사(蓮坡堂大禪師)의 비(碑)

    비좌(碑座), 비신(碑身), 개석(蓋石)을 갖추었으며, 비좌는 장방형으로 116cm×82cm×20cm의 크기로 상 면은 각 변의 모를 죽여 자연스럽게 경사를 주었다. 비신은 69cm×21cm×185cm로 양면에 명문을 세긴 2 면의 비석이다. 전면 개석 바로 아래는 우(右)에서 좌측(左側)으로 전서(篆書)를 이용해『연파당대선사비명 (蓮坡堂大禪師碑銘)』8자(字)가 16cm×69cm의 공간에 게제되어 있다. 음기(陰記)에『숭정기원후4무인7월 일립(崇禎紀元後四戊寅七月日立)』이 기록되어 있어 1818년 7월에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개석은 기와집 지 붕 형태의 옥개형(屋蓋形)으로 120cm×72cm×41cm로 세련되지 않았다. 비석의 총 높이는 246cm이다.

    연파당 대선사(1730년~1817년)의 비문을 요약하면 연파당은 양양부 현산(峴山) 아래서 태어났다. 경주김 씨(慶州金氏)이며. 호는 연파(蓮坡)로, 어머니는 홍씨이다. 어려서부터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모아 공양(供養)하는 놀이를 좋아하였다. 12세에 부모를 잃고 양양 명주사(明珠寺)로 출가하여 불경을 배웠다. 당 시의 고승인 호월(皓月)·풍악(楓岳)·송암(松巖)·설파(雪坡) 등을 찾아 내·외경전(內外經典)을 깊이 연구 하였다. 그 뒤 국내의 명산을 두루 순례하고 명주사로 돌아와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항 상 100여명의 학도들이 모였다. 그리고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表忠祠禪敎兩宗都摠攝)과 석왕사도원장(釋王 寺都院長)을 역임하다가 정축(1817)년 1월 9일 명주사에 거주한바 세수 87세, 법랍 73세로 입적하였다. 다 비(茶毘)하여 사리를 얻게 되자 제자 계옥(戒玉) 등이 부도를 세우고, 다음 해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영의정 품계] 서용보(徐龍輔)의 글을 받아 비를 세웠다.



    ■연파당 대선사 비명 원문 해석

    명나라 시대에 조선국 연파당대선사 비명을 새기고 쓰다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원임규장각직제학 서용보(徐龍輔)81)가 짓다.

    조봉대부 행선공감감역 유한지(兪漢芝)가 전서와 함께 쓰다.


    연파 대선사(1730년~1817년)가 이미 열반하자 옥 등 기이한 보주(사리)가 있다고 그 제자들이 알렸다. 돌 을 잘라 부도를 만들어 그 보주를 간직하기로 하였다. 장차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에 그의 생애를 전하기 위 해 나에게 글을 청했다. 3번 돌려보내니 더욱 근심하여 내가 그의 행장을 어루만졌다. 연파선사의 본관은 김 으로 월성인(月城人)이다. 법명은 영주(永住)고 연파(蓮坡)는 그의 호이다.

    대대로 양양부의 현산 아래에서 살았다. 어머니 홍씨의 꿈에 한 노승이 명주(明珠)를 주면서 이것은 우리 집안의 가보(家寶)다 라고 말했다. 몸에서 아이를 해산하니 태어난 아이는 빼어나게 총명했다. 그가 놀 때는 반드시 돌로 부처를 만들어 세우고 모래를 모아서 공양을 베풀었다. 보는 사람은 그것을 이상히 여겼다. 12 살에 부모가 죽자 몹시 슬퍼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어 드디어 만월산 명주사에서 머리를 깍았다. 선사의 처 지를 몹시 분해하던 천교(신선)들이 가르쳐 줄 것을 자임했다. 두루 알려주니 국내에서 유명한 승려가 되었 다. 널리 알고 통하도록 내·외의 여러 가르침을 받게 되니 호월당(皓月堂), 풍악법사, 송암대사, 설파대사 같은 분이다. 곧 학문에 빼어나 진실로 화엄학이 깊어져서 인간 세상을 건너는 뗏목이 되었다. 어찌 단지 잎 의 존재만 보리요, 나(蓮坡)는 장차 천하를 크고 넓게 관하리다.

    나의 가슴은 광대하여 관동지방의 모든 승지를 두루 답습하였다. 이에 또 남쪽의 가야 기림사(경주 함월 산)에 이르러 고운 최치원과 의상의 옛 자취를 보았다. 또 남쪽에 이르니 보길도 부황리(윤선도 유배지)에서 달이 떠오른다. 서쪽에 이르니 단군과 서산대사가 남긴 향기를 찾아보았다. 또 서쪽에 이르니 용만의 통군정 (의주군 압록강가 정자)에 올라 오랑케를 조심하라는 글을 보았다. 북쪽 마운령 산맥에 이르러 백두산과 장 백산을 바라보니 기상(氣像)이 극에 이른다. 다시 재촉하여 만월산(명주사)에서 수련하니 사방에서 승려들이 배우기 위해 쫓아오는 자가 100명 이상이다. 그 근기에 따라 가르치는 것에 게으르지 않았다. 정축(1817)년 1월 9일 명주사에 거주한바 세수 87세로 법랍 73세에 일찌기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 석왕사도원장으로서 소임을 맡은 채로 열반하였다.

    시답 천편에서 나는 부처님께 들었다, 선은 가섭이 전하고, 가르침은 아난이 전하니 선사께서 즐겁게 말씀 하시는 경전의 그것은 아난의 학파인가?, 달마가 작은 배로 바다를 건넜다하여 틈을 넓게하여 그것을 가르 치면 불제자가 못 된다. 또한 장차 그 가슴을 넓게하라하시며 선사께서는 구름을 사용하여 사방을 여행하였 다. 그 또한 달마의 뜻인가?,

    세존께서 열반하여 그의 두 발을 보여 꺼지지 않음을 보였다. 선사의 영주(사리)는 그 또한 세존의 두 발인 가? 마침내 새기어 말했다. 아난의 가르침과 달마의 뜻은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찌 전하며, 기록이 아닌데 어 찌 전달되었는가?, 마음이 도와 융합하면 시문이 되어 나타난다. 패수 위에서 한 수 읊는 소리에 먹구름 가 득한데 석장 짚고 거의 땅끝 팔연(팔방의 변두리)을 다 돌아봐도 명주사만 신령스럽게 보인다. 만월산 꼭대 기에 달이 뜨니 험하고 가파른 산 흩어지고 바닷물은 깊고 거칠다. 천년을 칡처럼 얽키고 만년을 비단실처럼 이어져도, 선사를 생각하니 연화장 세계의 보물이다. 숭정기원(1628)후 4무인(1818년) 칠월 일 세움82)


    ②연파당 대선사 부도(浮屠)

    연파당 대선사의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 形) 부도이다. 탑신은  물동이  모양의  항아리로 둥글고  기단부와  옥개석은  8각으로  1818년(순 조 18)에 세워졌다.

    지대석(地臺石)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듦어 지면과 높이를 맞추었으며 하대석(下臺石 )은 12cm×37cm×8면으로 된 비좌(碑座)이다. 중 대석 받침은 높이 20cm로 한면마다 2잎의 연 꽃이 반씩 걸쳐있어 총 8개의 연꽃잎이 복련(覆 蓮)으로 표현되었다. 중대석(中臺石)은 32cm× 21cm×8면으로  각  면마다  6자대명왕진언83)인 옴마니반메훔이  범자문(梵字文)으로  한자씩  음각되어 있다.

    상대석(上臺石)은 32cm×32cm×8면으로 중대석의 복련을 뒤집어 앙련(仰蓮)으로 표현하고 8각 좌대(座 臺)를 얹었다. 8각 좌대의 면마다 마름모꼴 속에 구름무늬가 음각되어 새겨져 있다. 탑신(塔身)은 앙련(仰蓮) 위에 앉은 항아리 모양인데 규격은 204cm(둘레)×48cm(높이)이다. 탑신 정면에는 한문 해서(楷書)로 위에 서 아래로 연파당(蓮坡堂)이라고 당호가 음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귀꽃이 없고 처마가 날렵하지 못하고 다소 투박하지만 옥개석 위에는 보륜(寶輪)과 보주 (寶珠)가 있다. 총 높이는 23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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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2〉연파당대선사비 / 연파당 부도



    ③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과 석왕사도원장 지위(地位)

    연파당(蓮坡堂) 대선사께서는 정축(1817)년 1월 9일 명주사에 거주한바 세수 87세로 법랍 73세에 일찌기 표충사선교양종도총섭, 석왕사도원장으로서 소임을 맡은 채로 열반하였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승직 가운데 최고의 직위로 1566년(명종 21) 선교 양종과 함께 승직제인 양종 판사직 이 없어지고 선조 이후에 새로 생겨난 승직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전국에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부르짖고 일어선 노승(老僧) 서산대사 휴 정(休靜)에게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의 직을 제수했다.

    표충사란 임진왜란 때의 구국승장(救國僧將)인 서산대사(西山大師)·사명대사((泗溟大師) 등의 공훈을 기 려 밀양·해남·묘향산의 세곳에 세운 국가적 기념사이다. 이 세곳의 표충사에다 각각 도총섭을 둔 것이다. 연파당 대선사는 밀양 표충사에 진영이 모셔져 있다.

    석왕사(釋王寺)는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사기리 설봉산(雪峯山)에 있는 절로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 우기 전 무학대사(無學大師)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성계가 왕이 된 뒤 큰 절이 되었으며 1401년(태종 1)에는 태조가 16일을 머물면서 직접 동구에는 소나무 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는데 그 뒤 소나무의 벌목을 금하고, 좋은 배는 진상했다고 한다. 같은 해 5월 절의 동쪽에 이성계의 명으로 태종이 별궁을 짓도록 했다. 태종 때는 모든 절의 재산이 몰수당했으나 태조의 원당 (願堂)이었던 귀주사(歸州寺)84)와 석왕사만은 제외되었다.

    석왕사에는 여말선초의 건물로 알려진 응진전과 호지문이 있으며 1732년(영조 7)에 개수한 대웅전·영월 루·흥복루·범종루·용비루 등이 있고, 31본산 시대에는 여러 전각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를 관장했다.

    이런 왕실 원찰(願刹)에서 연파당 스님이 사찰 내 최고 지위인 도원장(都元長)을 하셨으니 당시 불교계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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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서용보(徐龍輔, 1757년~1824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대구이며, 자는 여중(汝中), 호는 심재(心齋)이다.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후 영중추부사로 물러난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82) 有明朝鮮國蓮坡堂大禪師碑銘幷書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原任奎章閣直提學徐龍輔撰  朝奉大夫行繕工監監役兪漢芝書幷篆  蓮坡大 師 旣示寂 有寶珠之異 其徒戒玉等 伐石爲浮屠 以藏其珠 將復勒于貞珉 蓮坡大師 旣示寂 有寶珠之異 其徒戒玉等 伐石爲浮屠 以藏其珠將復勒于貞珉 圖壽其傳 求文于余 三返而愈勤 余按其狀 曰本師姓金 月城人 法名永住 蓮坡其號 世居襄陽峴山之下 母洪氏 夢一老僧 授明 珠 曰此我家寶也 己而娩焉 生而穎悟 其嬉戱 必立石爲佛 聚砂設供 見者異之 年十二 失怙恃 哀毁無所因 遂祝髮于滿月山之 明珠寺 慨然 以闡敎自任 遍謁國內名釋 博通內外諸敎 如皓月堂 楓嶽法師 松巖大師 雪坡大師 卽其秀也 允邃於華嚴 旣而嘆曰 牖世津筏 豈必只在見葉 吾將觀天下之大觀 以恢吾襟 於是遍踏關東之諸勝地 仍又南至伽倻祇林 瞻孤雲義湘之古蹟 又南至于 月出芙黃 西至于妙香 訪檀君西山之遺 苾 又西至于龍灣 登統軍亭 觀夷虁之文 北至于磨雲 望白頭長白之壯終 復趍修于滿月 四方緇徒 從學以百數 隨其根 敎授不倦 以丁丑正月 初九日 化于所居之明珠 得年八十七 法臘七十三 曾以剡爲表忠祠 禪敎兩宗都摠攝 釋王寺道院長 有詩荅千篇 吾聞佛祖 禪傳迦葉 敎傳阿難 令師喜談經 其阿難之派歟 達摩艇葦涉海 非徒郤廣其敎也 抑將以恢其襟也 師之雲遊四方 其亦達摩之志歟 世尊涅槃 現其雙足 以示不滅 師 之靈珠 其亦世尊之雙足歟 遂爲之銘曰 阿難之敎 達摩之志 非敎烏傳 非志烏致 心與道融 發爲詩文 浿上一詠 聲滿曇雲 杖錫所曁 殆遍八嬴 明珠示靈 滿月之顚 月山崒嵂 蓬海汪洋 千秋葛萬繏兮 是惟師之蓮花寶場 崇禎紀元後四戊寅七月日立

    83) 옴 마니 반메 훔(唵摩尼 鉢銘吽) 티벳 라마교도들이 외우는 관세음보살의 진언(眞言).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뜻하는 주문으로, 이 주문을 읊으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이 여섯 자(字)를‘6자대명왕진언 (六字大明王眞言)’이라 하며, 옴(唵)은 a·u·m의 합성어이고, 각각 만물의 발생·유지·소멸을 상징. 옴 마니 반메 훔(唵摩尼鉢銘吽) 은 한글로 옮기면‘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뜻이다.

    84) 함경남도 함흥시설봉산에 소재한 귀주사는 고려 문종 때 붕현(鵬顯) 선사(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며, 원래 이름은 정수사(淨水寺) 였으나 태조이성계가 귀주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85) 襄陽 地域의 傳統寺刹 2022년 12월 양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