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 영동지역 최초의 본당, 양양성당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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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당(子本堂)과 손자본당(孫子本堂)으로 번성하다.
1921년 양양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한 서울 교구는 영동지역에 본당을 하나 더 둘 계획을 갖고 양양 본당 초대 주임신부를 발령낼 때 보 좌신부로 이철연 프란치스코를 파견한다. 1921년 12월 양양 본당 최문식 신부는 이 신부 를 금광리(현 강릉시 구정면) 공소로 파견하여 본당 역할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철연 신부는 향후 발전 가능성을 감안하여 최 신부와 협의 하여 주문진에 새 성당을 짓고 1923년 주임신 부로 발령받는다. 이로써 양양과 강릉 지역은 두 개의 본당이 양양군 현남면 이남과 이북으 로 나누어 사목하게 되었다.
양양성당 제3대 주임신부였던 이광재 신부 는 1940년 현재 위치에 성당 건물을 신축하고 양양지역뿐 아니라 양구와 화천, 평강과 원산 등에 있는 공소를 순회하며 사목하다가 한국 전쟁 중에 순교하였는데 그즈음 이 지역의 종 교활동이 많이 위축되었다. 전쟁이 소강상태 에 접어들자 1952년 성골롬바노 외방선교회 의 맥고완 신부가 영북지역을 관리할 목적으 로 양양군 속초읍으로 파견되어 속초 본당(현 동명동성당)을 세운다. 금광리 본당(주문진성 당의 전신)이 양양에서 분할된 이후 30년만에 속초 본당은 두 번째로 양양 본당의 자본당(子 本堂)이 되어 속초 이북 고성 지역의 사목을 맡았다. 전쟁 통에 양양성당은 완전히 타버려 잿더미가 되었는데 동명동성당을 완공한 후 맥고완 신부는 1954년 11월 양양성당을 신축하였고, 속초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있던 설리번 신부가 양양성당 의 주임신부로 부임함으로써 양양성당은 다시 사목자와 성전을 갖춘 본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당을 재 건한 당시 양양성당의 신자는 170명이었는데 1942년에 집계된 1,400명과 비교하면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일 제 말기에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신자와 해방 후 공산치하를 벗어나 월남한 신자 및 육이오 전쟁 중 사망하 거나 피난한 교우들도 적지 않은데 무엇보다 속초 본당이 설립되면서 속초읍에 사는 신자뿐만 아니라 도문리와 물치 등 인근 공소 신자들이 속초 본당으로 편입된 이유가 큰 것으로 보인다.
(위)최문식(배드로)주임신부와이철연(프란치스코)보좌신부
(아래) 금광리공소와 1955년에 건립한 주문진성당
(위) 맥고완(원 파트리치오)신부와 설리번(서 토마)신부
(아래) 1953년에 건립한 동명동 성당과 현 동명동성당
제4대 주임신부로 설리번 신부가 부임하자 신자들이 해마다 증가하는데 170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958년에 는 941명, 1962년에는 1,273명이 되었다. 설리번 신부는 1959년에 현북공소 강당을, 1960년에 물치공소 강당 을 신축하였다.
간성은 과거 양양성당에서 관리하던 공소 지역이었는데 그후 속초성당에서 사목하다가 1958년에 이르러 간 성성당이 설립된다. 속초 본당이 양양성당의 자본당이니 간성성당은 손자 본당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속초 에 인구가 늘면서 속초에는 교동성당, 청호동성당과 설악동성당이 설립된다. 소속되었던 물치공소는 1984년 설악동성당에 편입되었다가 2018년 1월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양양성당 산하에는 현재 현북공소만 있다.
1954. 11월 양양성당 축성기념사진과 현 양양성당
1954. 11월 양양성당 축성기념사진과 현 양양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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