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 양양의 개신교와 독립운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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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일찍이 종교적 심성이 매우 발달한 지역으로 유(儒), 불(佛), 선(仙), 토착 신앙 그리고 기독 교까지 퍽 다양한 신앙의 형태가 타지역에 비해 일찍 뿌리 내린 곳이다.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1885년을 기점으로 언더우드·아펜젤러 목사를 통해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 다. 학교와 병원을 설립, 운영하겠다는 조건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부터 6년 뒤 1901년에 캐나다 출신 로버트 하디 선교사에 의해 양양에도 강원도 내 최초의 교회인 양양감리교회가 설립되었 고 1908년 조산감리교회, 1910년 물치감리교회와 광정감리교회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1901년 하디 선교사가 설립한 양양감리교회
양양교회는 5대 김영학 목 사와 8대 송정근 목사, 조화 벽 지사, 김주호·김필선 청 년 교인 등 걸출한 독립운동 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
김영학 목사는 3.1운동 당 시 양양교회에서 목사로 시 무하면서 양양 장날 군중들 에게 연설하다 일경에 잡혀 가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였으며‘대한독립 애국단’에서 활약하다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 를 치렀다. 이후 1922년 시
베리아 신한촌 선교사를 자원하여 애국 사상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을 하다 10년의 중노동형을 받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8대 송정근 목사도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심한 고초를 당하였으며 조화벽 지사는 양양교회 전 도사 조영순의 딸로 개성 호수돈 여학교 재학 중 개성 만세 운동 결사 대원으로 참여하였는데 휴교령 이 내려지자 독립선언서를 버선목에 몰래 감추고 귀향하였다. 이 독립선언서가 양양교회 청년 교인 김필선, 김주호, 김계호 등에게 전달되었고 지역 유림, 양양보통학교 동문, 농민들을 규합하여 양양 3.1만세 운동을 전개하는 발단이 되었다. 그녀는 유우석(유관순의 오빠)과 결혼한 후 1932년 귀향하 여 가난해 정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정명학원을 개원하고 13년 동안 600여 명의 졸 업생을 배출하는 등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양양정명학원 제1회 졸업기념 사진
김주호는 양양교회 청년 교인으로 김 필선, 김재구, 김계호 등과 함께 만세운 동을 계획하였다. 김필선이 근무하던 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를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양양읍 내와 인근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를 불 렀고 저녁때는 돌과 몽둥이를 들고 군청 과 경찰서를 부수는 등 무력항쟁도 전개 하였다. 김주호와 김계호는 각각 징역 8 월형, 김재구와 김필선은 각각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양양교회 내의 엡 청년회는 순수한 신 앙단체로 출발하였으나 시사 토론회를 열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애국 운동 단체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남궁억 선생, 김영학 목사의 애국 독립사상의 영향으로 민족주의 사상을 키워나갔다.
물치교회 설립에 앞장섰던 전달원과 김두영은 교인 60여 명을 데리고 물치 장터로 와 1919년 4월 5, 6일 이틀 동안 도천면과 강현면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광정교회의 오세옥·이응렬 권사는 양양·물치교회와 연락하며 만세운동의 정보에 따라 계획을 세우고 4월 9 일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기사문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양양의 교회들이 유교와 불교의 영향력 아래 오랫동안 살아온 양양에서의 선교 활동이 쉽지 않았으나 3.1만세 운동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기독교는 양양문화의 한 부분으로 수용되었고 만세운동 이후 교회는 양양의 아 동들에게 신문명을 교육하고 다양한 섬김의 활동들을 통해 군민들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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