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38도보순례와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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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 9일이면 양양성당에서 남대천교를 거쳐 송이밸리 너머까지 이어지는 인파의 장사진을 보게 된다. 가톨릭 춘천교구에서 매년 전국대회 규모로‘38도보순례’를 하는데 이 행사는 양양성당의 제3대 주임이던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와 관련이 깊다.
남대천교와 송이밸리 입구의 38도보순례 행렬 모습
이광재 신부는 1909년 강원도 이천군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때까지 서당에서 공부한 후 1923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 사제 서품되고 원주 풍수원성당의 보좌를 거쳐 1939년 양양 성당의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한다. 이 신부는 당시 서문리에 있던 성당을 현 위치인 성내리로 신축 이전하는 격무 중에도 관할지역이 아닌 양구와 화천에 공소를 신설하는 등 선교를 위하여 정성을 다 하였다.
8·15해방 후 삼팔선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천주교회는 공산체제의 가장 큰 적으로 간주 되어 박해받는다. 1946년 이후부터 연길, 함흥, 원산 등에서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종교탄압을 피해 월남하려고 38선에 가장 가까운 양양성당으로 모여든다.
이들을 돕다 발각되면 즉결처분으로 총살당하는 상황에서도 이광재 신부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무사히 월남시킨다. 이는 훌륭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한 분이라도 더 월남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 신부의 간절한 바람과 이
신부를 믿고 숭고한 뜻을 받들었던 교우들의 참된 신앙과 끈끈한 형제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월남에 협조한 교
우가 여럿이 있으나, 가장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안내한 이는 청곡리 김경태(젤마나)와 범부공소의 김봉만(보니
파시오)였다.
주로 사용한 월남 루트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양양 성당→월리뒷산·고노골·삼밭이재·삽존리공동묘 지·풋순밭·한천산·명지리 안골이며, 다른 하나는 양양성당→서문리·임천리둑길·범부서낭당·범부 옹기점마을·용천섬버덩·한구렁·삼밭이재·부소 치재·곰에굴·원일전·어성전방향이다.
이 신부는 월남을 돕는 일 말고도 공산정권에 잡혀 가 신부가 없는 성당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주고 미사 를 집전하는 일을 계속했다. 1949년 4월 평강성당의 백응만 신부가 북한당국에 체포되자 백 신부를 대신 해 평강과 원산 등지를 다니며 은밀하게 신자들을 돌 보았다. 1950년 4월, 부활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잠시 양양본당으로 돌아왔던 이 신부는 1950년 6월 이천성당의 김봉식(마오로) 신부가 공산군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곳의 신자들을 찾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
이 때 신자들은 이 신부의 북쪽지역 순방을 극구 말 렸지만, 이 신부가 막무가내로 호통을 치는 바람에 더 이상 말리지 못하였다. 이 신부는 이것이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하였는지 평소 길을 떠나면 뒤돌아보는 일이 없었는데, 이날은 계속 뒤돌아보았다고 한다.
북쪽으로 가 신자들을 돌보던 이 신부는 1950년 6·25가 발발하기 바로 전날 체포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그해 10월 형무소 뒷산 참호 안에서 공산당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이와 같은 이광재 신부의 숭고한 신앙과 순교정신 을 기려 가톨릭춘천교구에서는 이광재 신부를 성인반 열에 오르게 하는 시복시성을 교황청에 신청하였고, 2009년부터 해마다‘디모테오 길’이라 부르는 38°선 길을 순례하며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 신부가 예수성심학교 입학동기생들과 함께한 사제서품 기념사진과 풍수원 보좌신부 부임기사
38선 도보순례길과 월남 탈출루트 그림.
이광재 신부와 김봉식 신부의 장례미사를 거행한 원산 혜성학교 모습 (195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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