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양양 3·1만세 운동 계획(計劃)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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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입수 경위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될 때 양양에서는 유림 이석범 선생 일행이 현장에 임하여 취득하였고, 또 다른 루트로는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조화벽 학생이 가지고 왔다.
고종황제의‘인산(因山:고종황제의 장례)’에 참례하고 3월 20일에 귀향한 이석범 외 9명은 먼저 양양 유림 대표 이종만 옹을 찾아가 파고다 공원에서 목격한 3·1독립 만세운동을 이야기하였다. 양양에서도 ‘서울처럼 독립운동을 대중화하고, 일원화하면서도 비폭력으로 한다.’는 원칙을 결의하였다.
한편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때 이미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학 중인 조화벽(趙和璧)은 학생 비밀 결사대원으로 3월 3일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임시휴교령을 내리자, 독립선언서를 가방에 숨겨서 경원선 열차를 이용하여 원산에 도착한 후 다시 뱃길을 이용하여 대포항에 도착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조화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학교에서 만세운동을 한 후 학생들은 지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내가 대포항에 도착했을 때 경찰이 가방과 몸에 소지한 물건을 전부 압수하고 나를 일경(日警) 서장 관사로 끌고 가 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가방의 버선목 솜 속에 숨겨놓은 독립선언서는 발각되지 않았다.”
양양감리교회에서는 개화 세력 조화벽을 중심으로 청년부 김필선(金弼善), 김재구(金在龜), 김규용 (金圭容), 김계호(金啓鎬), 김주호(金周鎬), 김봉운(金鳳運) 등이 비밀리에 합력(合力)하여 독립 만세운 동을 준비하였다.
2) 양양 3·1만세 운동 계획
양양군의 만세운동은 이석범 선생이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강현 면과 도천면의 만세운동 계획과 실행은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李載勳:異名 能烈]에게 맡겨 놓고, 이석범 선생은 양양군 전체의 독립 만세운동의 준비를 위해 양양면 임천리로 갔다.
이석범 선생의 고향인 임천리 이교완의 집을 본부로 하여 양양의 유림과 청장년들을 참여시키고자 양양보통학교 1회 졸업생 최 인식(崔寅植)을 계획에 참여시켰다.
최인식은 직업이 목수로서 군 관내의 대·소 규모의 토목사업을 거의 도맡아 시공함으로써 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 4월 4일 독립 만세운동의 동지들의 규합에 앞장섰다. 최인식의 처남인 거마리 김명기는 유림이 접근하기 힘든 청장년 사회와 농민 사회에 만세운동의 동참을 권유하는 한편, 양양보통학교 졸업생들을 참가시켰다.
같은 시기에 양양감리교회에서는 3월 하순 조화벽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교회 청년 지도자이며 양양보통학교 8회 졸업생인 김필선·김계호·김주호 등에 전달되어 조화벽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계획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양양감리교회 5대 김영학 목사와 조영순 전도사의 신앙지도를 받은 청년부는 항일정신과 독립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옛 감리교회
▷ 양양 만세운동 주도자(主導者)
(양양 만세운동의 주요 세력)
유림 세력(보수세력) - 이종만(유림대표), 이석범, 이교완
감리교(개화세력) - 김영학(목사), 조영순, 조화벽
양양보통학교 출신인 최인식과 김필선 등이 선후배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림세력과 감리교 세력은 양양보통학교 출신들에 의해서 연결되어 민족의 독립을 열망하는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되어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함께하게 되었다.
가) 1차 회합(會合)
3월 27일 저녁에 율계(律契)를 계기로 임천리 이교완의 집에 추진세력들이 모여 계획을 논의하고 독립선언서 등사 및 복사의 책임자와 태극기 제작 책임자와 각 면의 연락책임자를 각각 선정하였다.
▷ 양양만세운동 각면별 책임자(責任者)
면 / 책임자
강현면 / 장세환, 김원식
도천면 / 이국범, 이재훈, 김영경
서면 / 노용수, 박춘실
손양면 / 신세묵, 김종택
양양면 / 최인식, 김필선, 김영기
현북면 / 오세옥, 박규병, 이성윤
독립선언서 등사 및 복사 책임자는 김필선이며, 태극기 제작은 성내리의 김두선과 거마리의 김종태 그리고 각 면의 대표를 책임자로 정했다.
양양의 유림이 중심이 되어 전체를 총괄하였고, 조화벽은 기독교를 이끌었으며, 최인식은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한 양양군민 전체가 참여하는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군청에서 각 면사무소까지 도보(徒步) 소요 시간은 서면과 손양면은 30분 정도, 강현면은 1시간 정도, 도천면과 현북면은 2시간 정도, 현남면은 5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양양면·서면·손양면은 계획과 운동 현장을 함께하였고, 강현면·도천면·현북면·현남면은 각 면의 계획에 따라 만세운동을 전개토록 하였다.
나) 2차 회합(會合)
4월 1일 각 면의 연락원이 이교완 집에 모여서 독립 만세운동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양양면은 양양장터에서 4일부터 9일까지 만세운동을 실행한다. 손양면과 서면은 양양장(襄陽場)터에서 4일부터 6일까지 양양면과 함께 만세운동을 한다. 강현면과 도천면은 물치장(沕淄場)터와 대포리에 소재한 대포주재소(大浦駐在所)에서 5일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6일은 양양장터의 만세운동에 동참한다. 현북면은 9일에 양양장터 만세운동에 합류한다.
구장이 중심이 되어 마을 주민을 동원하고 반드시 책임자가 인솔하되 한 집에서 한 사람 이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한다.」
▷ 양양군 독립 만세운동에서 선두인 기수가 사용한 대형기는 다음과 같다.
‘태극기’ ----- 옥양목, 베, 한지에 그림
‘대한독립지기(大韓獨立之旗)’ ----- 한지, 옥양목에 씀
‘태극기와 조선독립’ ----- 한지에 쓰고 그림
‘대한독립' ----- 옥양목에 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기
▷ 수기(手旗)
손에 들고 흔들 수 있는 소형 태극기는 종이에 등사(謄寫)하여 수기(手旗)를 만들었다. 또 다른 종류의 수기로는 '대한독립만세 양양군(大韓獨立萬歲 襄陽郡)'이란 글씨와 태극 모양을 인쇄한 수기도 만들었다.
기미년(1919년) 만세운동 당시 양양군은 7개 면이었다. 그중에서 6개 면이 참가하였는데, 각 면의 만세운동 계획과 실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3) 양양면(襄陽面) 만세운동 계획
양양면은 유림사회와 각 마을 구장 그리고 현산학교와 양양보통학교 출신의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계획하였고, 감리교회 신도들이 철저히 준비하여 계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양양면 감곡리는 이관진(李寬鎭)·이원도(李源燾)·이원희(李源喜)의 삼부자, 거마리는 김명기(金明基)·김종태(金鍾台), 임천리는 최인식(崔寅植)·최항식(崔亢植)·안광수(安光洙), 조산리는 최영덕(崔永德)·최영직(崔永直) 형제, 청곡리 김계호(金啓鎬), 서문리 김주열(金周烈)·김규용(金圭容) 부자, 남문리는 김재구(金在龜)·김주호(金周鎬)·김필선(金弼善)·김봉운(金鳳運), 사천리는 이정희(李貞熙)를 책임자로 세워 태극기를 수기로 만들기로 하였다.
임천리에서는 이교정·이건충 집에서 이현철(李鉉喆)·김형진(金衡鎭) 등이 참여하여 4월 1일부터 옥양목과 백지로 태극기를 1,100여 개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성내리 뒷산 곳집(상여보관소)에서도 김두선(金斗善)이 중심이 되어 김필선·김주호·김계호·김재구·이원희·이두형·김규용 등이 4월 1일 오후 7시부터 모여 밤을 새워가며 3일간 5천여 장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조화벽도 86장을 만들었다.
독립선언서는 면사무소 급사인 김필선이 김주호·김계호 등과 면사무소 창고에 촛불을 켜놓고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4월 2일 밤새도록 등사한 뒤 새벽에 김필선이 밀봉하여 임천리 본부에 전달하였다.
김명기는 4월 3일 양양읍내와 서면(西面) 등지에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양양군에서 서로 이웃하고 있는 3개면 즉 양양면·서면·손양면은 양양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같이 하는 것으로 임천리 본부를 중심으로 계획하였다. 또 감곡리 이상온(李相瑥)은 자기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청곡리·기정리·강현면의 금풍리·사교리·방축리·물갑리·둔전리·간곡리 등을 다니며 군중을 동원하였고 4월 3일 김규용·최인식·김필선·김재구는 옥양목과 백지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4일 양양 장날에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양양면·서면·손양면 가평리 등에서태극기를 만들며 준비가 한창이었다.
한편, 본부 임천리의 이교완·이건충 집에서 등사기로 태극기를 대량 인쇄하여 다른 마을로 보내어
수기를 만들게 하였다.
여기서 옥양목으로 행렬의 선두에서 기수가 들고 갈 대형 태극기를 만들고, 백지는 손에 들고 흔들수 있는 태극기 문양을 등사기로 인쇄 또는 그려서 수기를 만들었다.
4) 서면(西面) 만세운동 계획
서면은 조직을 확대해 북평리·용천리·상평리 등에서도 연락책을 뽑고 군중을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서면은 양양면에서 5km 정도 거리에 면사무소가 있었고, 경찰주재소가 면사무소에서 15km 떨어진 오색리에 있었다.
서면은 양양면에 이웃하여 임천리의 계획과 연계되어 추진하였다. 임천리 이교완 집을 본부로 한 만 세운동 계획을 이웃한 서면으로 확산시켜 북평리 노용수(盧龍秀)를 중심으로 용천리의 구장 노병우(盧炳禹)·최명옥(崔明玉: 별명 崔鶴吉)이 참가하였다. 상평리도 임천리에 이웃한 곳이어서 임천리와 직접 연결되었다. 임천리 본부에서 4월 3일 태극기를 전달받거나 가져다 상평리 박춘실(朴春實)의 집에서수기를 만들고 또 행군대열의 기수용 대형 태극기도 만들었다. 또한 주민이 독립 만세운동에 대거 참가하도록 권유와 설득을 하였다. 특히 상평리에서의 만세운동은 박춘실의 활동이 컸는데, 그는 원래 인제 사람으로 한말(韓末)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일제강점기 상평리에 피신하여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서면은 양양읍 내에서 양양면·손양면과 합쳐서 만세운동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5) 손양면(巽陽面) 만세운동 계획
손양면의 만세운동 계획은 다른 곳과 다르게 비교적 짧은 기간에 추진되었다. 참고로 손양면은 1914 년에 동면(東面)과 남면(南面)을 합하여 손양면이 되었다.
손양면 이전의 동면은 송현리, 수여리, 금강리, 송전리, 가평리, 오산리, 수산리, 도화리, 동호리, 학포리 등 10개 마을이고, 남면은 간리, 왕도리, 우암리, 주리, 와리, 삽존리, 부소치리, 밀양리, 양혈리, 상운리, 여운포리 등 11개 마을로 당시 동면은 유림의 우세지역이었다.
동면 지역의 만세운동은 가평리의 전 구장이었던 신세묵(辛世默)이 총지휘하였고 가평리는 구장이었던 함홍기(咸鴻基)가 담당하였다. 양양 3·1만세 운동에서 가장 장열(壯熱)하게 순국한 함홍기는 현산학교와 양양보통학교 출신으로 양양면의 동창들과 연락되어 만세운동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현북면 상광정리의 친척 관계인 오세옥 등과도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평리의 만세 군중을 동원하는 데에도 신세묵의 역할이 컸다.
남면 지방은 상왕도리 김종택(金鍾澤), 주리 최한두(崔漢斗), 우암리 김진열(金振烈) 삽존리(현재 남양리) 김주황(金周璜) 등 당시의 구장들이 중심이 되어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지역에서 양양면과 연락을 취하고 있던 김종택은 현재 손양면 사무소 옆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양양지방의 학문과 도덕의 중심이던 삼익서당(三益書堂) 훈장의 손자였다.
손양면의 만세운동에 비록 가구당 한 사람씩은 참가하였으나, 왕도리를 제외하고는 태극기를 만들지 못했다. 이는 그 계획이 단시간에 추진되었고 비밀리에추진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농기(農旗)를 들고 농악대(農樂隊)를 앞세운 점은 농민들의 반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6) 강현면(降峴面)·도천면(道川面)의 만세운동 계획
강현면·도천면의 만세운동 계획은 이석범 선생이 동생 이국범과 아들 이재훈을 중심으로 추진하게 하였다.
강현면은 장세환(張世煥), 도천면은 김영경(金英經)을 책임자로 하여 마을 단위는 구장을 중심으로 조직망을 형성했다. 장세환과 김영경은 쌍천서숙의 동문으로 이들 때문에 쌍천서숙의 졸업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도천면은 대포리의 박사집(朴士集), 부월리의 이종순(李鍾淳)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4일 밤 양양군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국(李鍾國)의 집에서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다. 물치장인 4월 5일 장터에서 마을 사람들과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강현면은 구장들을 중심으로 몇 명의 책임자를 편성하여 진행하였다. 적은리 장세환, 물치리 김두영 (金斗榮)·박제범(朴劑範)·김대선(金大先) 등이 맡아서 태극기를 만들어 참가하였다. 강선리 전달원 (全達元)·윤순범(尹順範)·이종엽(李鍾燁), 하복리 이철우(李喆雨)·이형우(李炯雨), 중복리 김창렬(金昌烈)·심한준(沈漢俊), 간곡리 추병원(秋秉元), 장산리 양익환(梁益煥), 회룡리의 박봉래(朴鳳來), 침교리 김원식(金元植)·김진선(金振璇), 사교리의 김철기(金鐵起)·김환기(金桓起), 주청리 김경도(金敬道) 등이 태극기를 만들면서 자기 마을을 맡아서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각 마을의 연락책은 침교리 김원식(金元植)이 장세환의 지시에 따라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알렸다. 이처럼 강현면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찍이 3월 23일부터 만세운동이 완전하게 계획되었음이 매곡(梅谷) 오윤환(吳潤煥) 선생(1872∼1946년)의 일기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일찍이 3월 23일 이동렬(李動烈: 본명 李載型)이 양양의 유지이자 한학자로서 상도문리 서당 훈장으로 활동하는 매곡 오윤환 선생을 찾아왔었고, 또 4월 1일 이재훈(이석범의 자)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이때 3·1만세 운동 계획과 전개에 대한 충분한 자문과 동의를 얻었으리라 본다.
매곡 일기에 의하면 4월 14일 매곡선생께서 양양경찰서에 끌려가 4일간 구금되었다가 4월 18일 방면되었다. 고문과 태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석방되고 보름이 넘도록 장독[(杖毒) : 매를 맞은 상처의 독]의 고통을 호소하며 누워서 괴로워하였다고 5월 2일 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일제의 악랄함이 얼마나 지독하였는가를 실존 인물인 매곡선생의 친필 일기에서도 거듭 드러나게 된다.
7) 현북면(縣北面)의 만세운동 계획
양양군 독립 만세운동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기사문리 만세운동은 3월 27일 임천리 본부에서 현북면 연락을 맡은 원일전리 유학자 박규병(朴奎秉)과 서당 훈장인 이종은(李鍾殷), 감리교인 오세옥(吳世玉)이 추진하기로 하였다.
한편 상광정리에 있던 감리교회의 오세옥·이응열(李應烈) 권사는 양양군 관내의 양양 감리교회 및물치 감리교회와 연락하여 만세운동의 정보에 따라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림세력과 감리교회 세력이 연합한 계획은 4월 9일 양양 장날 양양읍 내 양양장터까지 가서 독립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현북면 내의 유지(有志)인 중광정리 임병익(林秉翼)과 해주 오씨 호족(豪族)으로 덕망이 있는 오정현(吳鼎鉉)을 참여시키고 각 마을의 구장들이 모여 역할을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복사 책임자는 박원병(朴元秉), 태극기는 각 마을의 구장들이 맡아서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를 수기로 만들었으며, 연락 문서인 통문은 면서기의 경력이 있으며 학문에 밝은 오정현이 담당하였다. 마을마다 뛰어다니며 연락하는 책임자는 교회 청년 이응열과 상광정리 포수 김종대(金鍾大) 가 맡았다.
그리고 이 운동을 책임지고 추진한 각 마을 구장은 상광정리 김익열(金益烈), 중광정리 김우근(金禹 根), 하광정리 김진혁(金振赫), 명지리 권광식(權廣植: 본명 權彦植), 대치리 김종성(金鍾聲), 말곡리 김창환(金昌煥), 원일전리 박용기(朴容琦), 도리 김재한(金在漢), 어성전리 김두칠(金斗七) 이었다.
원일전리 유학자 박용규 형제와 감리교회의 청년 오세옥·이응열 권사는 1919년 3월 초순 이래 각지역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대한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취지를 이해하고 찬동하여 자기 마을과 교회에서 그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으며 더 나아가 유림과 기독교인 그리고 각 마을 구장과 삼위일체가 되어 합력하고 모든 계획을 실행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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