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양양의 3·1 만세운동(萬歲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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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양양에서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일주일간이나 일본 경찰과 군인에 대항하여 만세운동을 벌여 1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셨으며, 43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당한 독립운동가는 다 알지 못한다.
4월 9일 기사문주재소 만세운동 이후에도 일본 군경이 양양군 전 지역에서 독립운동가 374명을 검거하였고, 자수한 자는 211명이나 되었다. 60대에서 120대까지 태형을 받은 사람은 셀 수없이 많았다.
당시 양양군은 7개 면으로 농경 사회였는데, 6개 면 82개 마을의 연인원 15,000여 명이 한창 농사철인데도 양양시장과 물치시장, 양양경찰서, 대포리주재소, 기사문리주재소 등에서 3·1만세운동을 하였다.
아직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강릉이나 고성군과의 교류는 미약하였으며, 영서지방과의 왕래는 서면의 오색령 옛길과 구룡령 옛 산길을 도보로 넘어 다닐 때여서 양양시장은 영서지방의 물화(物貨)를 교류하는 곳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이곳의 문호(門戶)는 대포항구였다. 이곳에서 바닷길을 이용해 원산으로, 이어 경원선 철도를 이용하여 서울로 갔었다. 대포가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부근의 물치시장이 상업적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시 이 지방의 성격은 보수와 개화 세력으로 크게 구분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여 독립을 위한 3·1만세 운동은 보수와 개화 세력을 가리지 않고 함께 만세운동을 하였다.
1) 보수세력(保守勢力)의 동향(動向)
양양은 유림중심의 사회였다. 향교를 중심으로 보수적인 유림의 세력과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각 마을에는 서당이 있어 훈장이 학동들에게 한자를 가르친 다음 향교에서 유교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보수세력은 이종만(李鐘萬)과 이석범(李錫範) 선생이었다. 이석범 유학자는 한일합방 후 중앙의 군기창(軍器廠) 기수(技手)의 벼슬을 버리고 도천면(현 속초시) 중도문리(中道門里)에 살면서 쌍천서숙(학교)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청년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나라사랑 교육을 하였다. 또 신문화운동에 기여하고, 여기서 배운 학생들과 각 마을 서당에서 유학을 배운 청년들이 양양 3·1만세 운동에 공헌하였다.
2) 개화세력(開化勢力)의 신문화(新門化)운동
양양감리교회는 영동지방에 설립한 최초의 교회였다. 신앙과 신문화 세력인 개신교로 양양지역에 1901년 성내리교회(지금의 양양감리교회)가 처음으로 들어서고 1908년 조산교회(조산리 소재), 1910년경 물치교회(물치리 소재)와 광정교회(상광정리 소재)가 들어서면서 하나의 교회 구역을 형성해 왕성한 활동을 벌여 나가고 있었다.
김영학(金永鶴) 목사는 1918년 양양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남감리회 간성구역장으로 물치·조산· 광정교회를 순행하며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19년 당시 양양감리교회는 김영학 목사와 조화벽(趙和壁)의 아버지 조영순 전도사에 의하여 전도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의 상당수가 교인이었으며 엡웰청년회가 조직되어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김영학 목사에게 배운 신앙과 애국사상에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강현·양양·현북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현산학교는 강원도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 이다.
양양지방에서 신문화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구한말 개화운동의 선구자로서 독립협회의 총무,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 등을 역임한 바 있는‘남궁 억’선생이 1906년에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을 하면서다. 그는 이 학교를 통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지역은 청년을 중심으로 신문화의 조류가 널리 퍼져 있었다. 학구열이 왕성한 양양보통학교 학생들은 곧바로 대포항구를 통하여 원산으로, 다시 개성과 서울 등으로 진학하였다. 이러한 신문화운동의 영향으로 양양은 혁신적인 풍토가 마련되었다.
남궁 억, 김영학, 조영순은 양양지방 근대사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조화벽은 후에 유관순열사의 오빠 유우석(柳禹錫)과 결혼한후 민족운동에 더욱 정진하였다.
3) 천도교(天道敎) 사회
양양의 유림들은 동학군의 세력이 확산되자 양양에서 동학군을 토벌할 정도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1860년 최제우(崔齊愚)가 창시한 인내천(人乃天)의 동학사상이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해 양양에 유입되었다 최시형은 1869년 3월부터 1870년 10월까지 양양의 산중에 은거하면서 포교하였다. 최제우의 장남 최세정(崔世貞)은 인제, 양양 등지로 피신생활을 하면서 이 지역의 교인들을지도하였다 그러나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양양 김덕중의 집에 머물다 더 안전한 첩첩산중인 인제읍 귀둔리(貴屯里)로 거처를 옮겼다. 귀둔리는 오색령과 점봉산에 인접해 있어 귀둔리에서 양양이 80리 정도 되는 거리이다. 귀둔리 사람들은 곰배령을 지나 양양 북암령, 소동라령을 넘어 양양 장을 이용하였다. 이때 최시형에 의해 포덕(布德) 된 양양의 신도들은 서로 오가며 신앙생활을 함께하였다.
양양, 인제, 영월, 정선 지방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이 점차 뿌리를 내려 교세가 확장 되었다. 교세가 확장되면서 농민들은 불만이 늘어나고 1894년 고부에서는 민란이 일어나 점차 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농민군은 가장 큰 사회 모순인 양반 신분제를 타파하는데 앞장선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 수탈과 불평등 관계를 시정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군 토벌대가 증원되고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의 파견으로 전국에서 농민군은 패퇴하여 더 깊숙이 숨어들었고 신분을 숨기고 술집이나 엿 장사로 살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05년부터 손병희의 지도 아래 근대적인 종교로 재정비되었으며, 그 같은 재정비과정에서 교육·문화·출판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교구조직을 정비하여 3·1독립운동의 전개 기반을 확립하였다.
3.1 만세운동에서 천도교는 기독교와 불교 연합을 성립시켰으며 보성사(普成社)에서 21,000매의 독 립선언서를 인쇄하여 3월 초에 걸쳐 서울과 각 지방에 비밀리에 배포하였다.
4) 불교(佛敎) 사회
통일신라시대 이후 불국정토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온 불교 성지가 양양이었다. 낙산사, 영혈사, 억성사, 오색석사, 서림사, 진전사 등 대찰이 세워졌었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선종의 근본 도량인 조계종찰(曹溪宗刹) 진전사가 설악연화지(설악산의 봉우리들이 진전사를 연꽃잎처럼 감싸고 있는 모습)에 있었다.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양양에는 설악산 신흥사에 원적을 두고 낙산사에 주소를두었지만 큰 뜻을 품고 전국을 다니며 민족의 깨우침과 독립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실천하신 만해(卍海) 한용운(韓龍 雲)스님은 용성(龍城)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에 불교 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추가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출가 수행자이면서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만해는 국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대의 정신이었다.
또한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민족에 대한 믿음으로 올곧은 길을 걸은 민족의 스승이었다. 특히 전국의 주요 사찰을 직접 방문하여 동참을 호소한 일은 널리 알려졌다.
만해가 3·1만세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신흥사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신흥사와 낙산사 승려들이 물치 삼거리에서 환영식을 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양양 3·1 만세운동은 이러한 만해의 정신과 실천이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5) 일제의 침탈(侵奪)과 만행(蠻行)
1908년 6월 손양면 송전리 쌍호에 오리 사냥을 온 일본 순사가 송전리 고씨 집 안에서 베를 짜고 있던 부인을 보고 희롱하자(성희롱) 당시 이 마을 서당 오산재 훈장을 하던 고익주가 분개하여 일본인을 꾸짖고 추방하려 하자 이에 무참히 총으로 사살 시켰다. 이를 본 고혁주와 고광하가 항의하자 역시 차례로 총을 쏘아 즉사하였다. 이를 경찰서에 항의하자 받아주지 않아 억울함을 어찌하지 못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헌병과 경찰제를 통하여 무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하면서 산림령, 광산령, 어업령을 내려 이 지방의 산업을 침탈하였으며,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을 내려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 업을 구실로 농민들의 토지를 약탈하여 농민들은 생활이 곤란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강화는 신문화의 강요와 함께 경제적 착취로 이어지게 되면서 보수적인 유림과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진보적 청년에게 식민지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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