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양양 3·1만세 운동의 전개(展開)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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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3·1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유림의 대표와 감리교회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전 군민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다. 각 면별 계획에 따라 현산학교와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인 청장년 및 마을 구장이 중심이 되어 양양군 대부분 농민과 남녀노소가 결집하였다. 양양군민의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 4월 3일 만세운동 준비(準備)상황
4월 3일 저녁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해산하려는 순간, 낌새를 미리 알아차린 당시 양양군수 이동혁에게 발각되어 급습당하는 과정에서 임천리 마을 주민 등 동조자 22명이 체포되었다. 청년층 주력 인사들은 재치를 발휘하여 피신하였으므로 양양 3·1만세 운동은 차질없이 계획대로 전개할 수 있었다.
가) 양양면(襄陽面)
4월 3일은 4월 4일부터 9일까지 독립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마지막 날로 면과 마을 책임자들은 철저 하게 준비하였다.
양양면은 최인식이 주도가 되어 감곡리, 거마리, 임천리, 청곡리, 서문리, 남문리, 사천리 등지의 청년층을 대표로 뽑아 연락책으로 삼았다. 특히 감곡리 이상온은 정손리, 청곡리, 감곡리, 강현면 금풍리, 사교리, 방축리, 적은리, 물갑리, 둔전리, 간곡리 등지를 다니며 군중을 동원하면서도 집에서 태극기 제작을 책임지고 하였다.
감리교인 김필선은 면사무소의 등사기로 종이와 옥양목에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김필선 외에도 김주호, 김계호, 김재구, 이원도, 이원희, 김두선, 이두형, 김규용은 성내리 뒷산 상여보관소인 곳집에서 태극기를 만들며 4월 4일 장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임천리에서는 이현철, 김형진, 이건충이 각자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3일 오후에 성내리 곳집에서 만들던 태극기를 청년 동지들은 1919년 4월 4일 양양장터의 만세운동 준비 마무리를 위해 임천리 이교완과 이교정 등의 집으로 옮겼다. 김필선, 김재구, 최인식 등은옥양목으로 대형 태극기를 만들고, 등사기로 태극기 문양을 백지에 복사하여 태극기를 수기(手旗)로 만들었다.
최인식은 자리를 옮겨 뜻을 같이하는 김규용(金奎容)과 함께 임천리 이교정(李敎貞)의 집에서 다시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군청 소속인 심윤택이 눈치채고 군수에게 보고를 하였다.
이에 군수 이동혁(李東赫)이 일경들과 함께 임천리 현장을 급습하였다. 태극기 374매와 제작 도구인 등사기 등을 빼앗기고, 이석범 선생을 비롯한 22명이 붙잡혀 일경에 연행되었다. 군수 이동혁은 독립만세운동을 봉쇄하고자 4월 4일 양양 장을 철시(輟市)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날 강원도장관(江原道長官)이 조선 총독부의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전화보고문이다.
“본일(本日) 양양군(襄陽郡)에서 10~13명의 청년이 집합(靑年 集合)하여 태극기 3백70매(三百七十枚)를 제(製)하고 있음을 발견(發見) 압수(押收)하다. 명일(明日)의 시일 (市日)을 이용(利用)하여 사(事)를 양(揚)코져 한 계획(計劃)임과 여(如)하여 내(內) 유력(有力)한 면장(面長)도 가(加)하고 있는지 의심(疑心)있기로 경찰(警察)과 협의(協議) 경계(警戒) 중(中)”
임천리에서 계획 일부가 발각되었음에도 청년 동지 김계호, 최인식, 이원도 등 책임자들은 일경의 포위망을 벗어나 만세운동의 준비를 예정대로 강행하였다. 일단 나머지 인쇄물을 가지고 거마리 김종태의 집으로 본부를 옮기고, 4월 4일 만세운동을 위해 거마리 곳집에서 계속하여 태극기를 밤새도록 만들었다. 임천리에서도 최항식 등에 의해 중단없이 준비되었다. 성내리 뒷산의 곳집과 감곡리의 이상온의 집에서도 태극기를 만들었고, 마을마다 책임자가 있었기에 만세운동 당일까지 필요한 준비를 차질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나) 강현면(降峴面)·도천면(道川面)
같은 날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황의 집에서 친목계를 가장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이 마을에는 유림이 열흘에 한 번씩 시회(詩會)을 열어 학문과 친목을 교류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5일 물치 장날을 기하여 강현면 만세 군중은 물치장터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도천면 군중은 대포주재소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6일은 양양장터에 가서 강현면과 도천면 군중이 함께 만세운동을 펴기로 하였다.
한편 중도문리에서는 전주 이씨 종가인 이종국의 집에서 마을 책임자들이 모여, 이종국이 제공한 하얀 옥양목에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5일 물치장터에 최대한 많은 군중이 나오도록 독려하였다.
이종황, 이종인, 이재훈, 김영경, 장세환 등은 독립 만세운동에 사용할 소형 태극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2) 4월 4일 만세운동(萬歲運動) 상황
독립선언서가 양양지역에는 3월 하순에 입수되었고, 비밀리에 준비하다 보니 기간이 매우 짧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이석범 선생과 책임자 일부가 4월 3일 밤 임천리에서 체포되어 불안과 긴장감은있었지만 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이 밝았다. 우려와는 달리 양양 장마당에서 첫 번째로 독립 만세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나 산불처럼 타오른 날이었다. 4월 1일 각 면의 책임자가 이교완 집에서 결의하고 계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손양면 송현리 군중이 먼저 들어와 장터와 군청, 경찰서가 내려다보이는 구교리 뒷산에 모여 최인식·김재구·김필선·김계호 등과 함께 첫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양양 만세운동의 첫 신호탄이 울린 것이다. 만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이십 리 밖 손양면 수여리 이준재(李俊在)는 아침에 논을 다듬는 일을 하다가 만세 소리를 듣고 일을 중단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4월 4일은 양양면·서면·손양면이 운동을 주도하여 실행하였다. 양양읍 내에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가 다섯 개가 있었는데, 4월 3일 사전에 탐지한 양양군수는 양양장터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마다 일경을 배치하고 길목에 서서“오늘 양양 장은 철시했으니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당시 일경의 힘으로 장날의 수천 군중을 수색하거나 막을 수는 없었다. 태극기도 두루마기 속에 감춰져 있어 군중을 일일이 수색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총을 겨눌 뿐이었다.
각 마을 지도자들은 주민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주민의 행군대열의 앞에서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행진했다. 집을 떠날 때는 장꾼인 척하고 장터에서는 만세 군중으로 변하였다.
가) 양양면(襄陽面)
양양면은 동·서·북쪽에서 장터로 들어와 읍내의 군중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동쪽은 낙산사로 통하는 신작로(新作路)로 최영덕(崔永德), 최영직(崔永直)이 인솔하는 조산리 군중과 이정희(李貞熙)가 인솔하는 사천리의 군중들이 청곡리 군중들과 합세하여 양양 장터로 들어오다가, 연창리 대미소[(竹尾沼) 현 연창리 삼거리 부근]에서 일경과 충돌로 최영원 등 다수가 체포되었으나 군중은 일경 저지를 뚫고 들어왔다.
서쪽은 임천리로 통하는 방면으로 아침부터 만세 군중이 일경과 대치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곳곳에서 만세 군중이 나오는 데다 전날 거마리로 피해 갔던 최인식, 김종태 등과 함께 거마리, 임천리의 주민과 장꾼들이 점점 늘어나 행군대열이 형성되었다.이 때 최인식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까지 행진했다. 김종태와 거마리 주민은 서문 밖 고개부터 태극기를 휘두르며 장꾼들에게 만세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면서 들어왔다. 이통로를 경비하던 일경이 만세 군중에게 완전히 제압되어 경찰서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북쪽에서는 감곡리 군중들이 북문을 넘어 들어오다가 포시(浦市:일본인 상점) 앞에서 일경의 저지로 대치하다가 앞장섰던 이원희(李源喜)가 현장에서 체포되었음에도 계속 돌파하여 들어왔다. 일경이 철수하자 이관진(李寬鎭), 이원도(李源燾)가 감곡리 방면의 만세 군중과 인근 주민 수백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까지 행진했다. 장터 안에서는 거마리 김명기, 김종태와 임천리 최항식이 거마리와 임천리의 주민 대열에 앞장섰고, 김명기가 베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며 장터로 가는 사람들에게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오전 11시경 양양장터에 이르러 이들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나) 서면(西面)
서면은 서쪽에서 노용수가 앞장선 북평리(北坪里)와 의병 출신 박춘실의 지도를 받은 서면 상평리(上坪里)의 주민이 대열을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춘실은 상평리 주민 대열의 선두에 섰고, 노용수도 북평리 주민 대열의 선두에서“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양양장터까지 행진했다.
서남쪽으로는 용천리와 북평리 군중이 당시 구장이던 노병우와 최명옥[(이명 최학길)과 최선극은 부자간임]의 지도를 받으며 선두에는 보통학교 학생 최선극(崔善極)과 노병례(盧炳禮)가 대형 태극기를 들고 북평리 나무다리를 건너 장터로 들어왔다. 군중 모두는 태극기를 들었고, 옥양목과 베와 한지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양양장터까지 행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곳곳의 만세 군중과 장꾼은 점점 늘어나 행군대열이 형성되었고, 양양 변두리에서 경비하던 일본 경찰 병력은 만세 군중에게 완전히 제압되어 경찰서 안으로 쫓겨갔다.
다) 손양면(巽陽面)
손양면은 동면 구역인 송현리·수여리·금강리·가평리·송전리·오산리·수산리·도화리·학포리·동호리 그리고 인접 마을 상운리·여운포리·간리 주민이 각 마을의 구장 인솔하에 고송(古松) 고개에 집결하였다가 가평리 전 구장 신세묵(辛世默)의 지휘 인솔에 따랐다. 맨 앞에는 구장 함홍기가 선두에 서서 차례로 질서 있게 지축이 꺼지도록 독립만세를 부르며 월리 앞을 지나 남대천 목교(木橋)를 건너 동운교[(東雲橋): 현 양양속초산림조합 청사 앞 교차로 지점〕앞에서 저지하는 일경과 대치하다가 동운교를 건널 수 없게 되자 동운교 위아래로 분산되어 물을 건너 양양장터에 들어가 각 면에서 모인 수많은 군중과 함께 종일 만세를 불렀다. 날이 저물어 가평리 구장 함홍기와 의병 출신인 간리 권병연을 다시 볼 수 없는 통곡과 울분 속에서 암흑의 길을 걸어 돌아선 날이 되고 말았다.
라) 양양장터에서
양양장터에는 각 마을 구장들이 깃발을 앞세우고“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 군중이 따라 외치며 다섯 개의 통로를 따라 물밀 듯 들어오니 온 읍내와 장터가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양양감리교회 청년회 김필선, 김계호 등과 교인들은 주민과 장꾼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는 한편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영학 목사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증언자 목사 사모 안원정의 말을 들으면 “김영학 목사는 순회 강연 등을 통해 청년들에게 애국애족 사상을 고취 시켰다. 아울러 만세운동 당시 시위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행진을 지도하다가 일경에게 잡혀가 무수히 매를 맞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을 보내고 출옥했다.”고 하였다.
이날의 상황에 대해 강원도장관이 작성한 전화 보고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4월 5일 오전 0:30 접수
“본일(本日) 편(扁)히 양양군(襄陽郡) 읍내(邑內) 부락(部落)으로부터 야소교도(耶蘇敎徒)를 중심으로 한 수백명(數百名)의 일단(一團)이 읍내(邑內)로 진입(進入)하려 함을 저지(沮止)함에 읍내(邑內) 배회자(徘徊者) 수백명(數百名)과 호응(呼應)하여 만세(萬 歲)를 창(唱)하다. 주모자(主謀者)를 검거(檢擧)하고 해산(解散)시켰으나 상(尙) 불온(不穩)의 상태(狀態)이다.”
이같이 양양면·서면·손양면 만세 군중이 만세운동 당일인 4월 4일 오전 11시경 집결지인 양양장터에 모두 모였다. 양양장터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철시가 된 줄도 모르고 장 보러온 사람들까지 모두 4,000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대한독립만세’를 불러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부근에 전달되니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까지 모두 참가하였다. 증언자 용조원(龍照轅)의말에 따르면 서면 북평리에서는 나가지 않고 농사를 짓기 위해 도랑을 파고 있었는데, 이날 낮에 갑작스럽게 회의가 열려 일하던 사람이 모두 삽과 괭이를 버리고 양양장터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였다.
김종현은 양양보통학교 학생(당시 10세)으로 독립 만세운동 대열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외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나이 어린 학생임을 감안하여 석방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양양 독립 만세운동은 양양군의 남녀노소와 어린 학생이 동참한 운동이었다.
점심때를 전후하여서도 만세 소리와 태극기의 물결이 장터와 경찰서,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군청 주변의 취산루(醉山樓)를 가득 메우며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되었다.
한편 경찰서와 군청 마당 근처와 뒷산에도 군중이 모여 군청과 경찰서를 내려다보면서 만세를 부르며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독립을 위한 축제 분위기에서 한편에는 복수심에서 온갖 구호를 외치며 만세를 부르니, 마치 독립을 쟁취한 듯한 분위기에서 질서 있고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옛 양양장터
마) 양양경찰서(襄陽警察署)에서
4월 3일 밤 임천리에서 체포된 책임자 22명의 석방을 4월 4일 낮부터 요구하였으나 실패했다. 또 오늘 장터에서 만세운동 중 체포되어 경찰서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점점 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만세 군중은 서쪽은 서문리에서, 남쪽은 동운교에서, 동쪽은 장터 쪽에서 출발하여 신작로를 따라 수천 명이 노도와 같이 경찰서와 군청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경찰서 마당을 가득 메운 군중 가운데, 대표자 몇 명이 경찰서로 들어가 사타쿠 서장과 면담을 시작하였다.
경찰서 마당과 주변 신작로 거리의 군중의 외침이 더욱 거세질 때, 양양경찰서에 구속되어있는 지도자들을 석방하기 위해 면담을 하던 가평리 구장 함홍기(당시 24세)가 구속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서장실 화로를 집어 들었다.
그때 경찰서장실 옆에 섰던 두 명의 일본 경찰 아끼야마와 오오이시의 칼에 함홍기는 양팔이 잘린 후 목에 칼을 맞아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이에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군중은 격분해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이때 손양면 간리에서 장사를 하던 권병연[(權炳淵: 당시 28세) 의병출신]이 뛰어 들어가 항의하는 가운데 일본 경찰이 휘두르는 칼에 목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은 더욱격렬해지기 시작하였다.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며 구속자 석방을 위해 면담을 하던 대표자 두 사람이 피살되는 현장을 목격한 군중들은 격분하여 돌과 몽둥이를 잡히는 대로 붙잡아 군청과 경찰서를 향해 던지면서 시위진압에 앞장서며 군민을 탄압한“이동혁 군수를 죽여라!”고 외쳤다. 이에 일경은 경찰서로 쫓겨 들어갔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도청에서 출장 온 산림간수 1명은 군청 마당에 나왔다가 군중에게 맞아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때 군중 속에 있다가 격분한 상평리 김학구가 경찰서를 향하여 뛰어 들었다. 양양경찰서 마당에서는 탕 탕 탕하는 총소리가 저녁노을을 깼다. 김학구가 쓰러졌다. 앞에 선 사람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선혈이 낭자했다. 이때 경찰서 마당에서 김학구는 숨을 거두게 되었다.
계속하여 젊은 청년들이 뛰어들고 시위대의 만세가 높아지며 격하게 항의하자 일본 경찰은 계속 총을 발사하여 많은 사람이 쓰러졌다. 총에 맞은 부상자는 용천리가 이흥달(李興達)·노병우(盧炳禹)·박 의병(朴義秉)·한원일(韓元一)·한원팔(韓元八)·남순극(南淳極)·박경화(朴京化)·이두하(李斗夏)·노병택(盧炳澤)·남성극(南成極)·최명옥(崔明玉)·김경숙(金敬淑) 등 12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외 북평리의 용조원(龍照轅), 가평리의 신세묵(辛世默) 등 14명이었다. 또 손양면 이준재는 일경의 군화발에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피투성의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상자는 이보다 더 많았다.
부상자가 더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일경에 의해 주동 또는 가담 등이 밝혀지면 감옥에 갇히거나 태형(笞刑)을 맞아야 하기에 일부러 숨겼기 때문이다.
유혈이 낭자한 시신을 경찰서 뒷마당에 옮겨놓자 노용수가“끌고 가자!”라고 소리치고 친구들이 모여들어 이형우가 업어서 자기 집 뒷마루 밑에 멍석으로 김학구를 안치하였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끝나 모두 각 마을로 돌아가고 일몰 후 적막이 감돌자‘나라의 독립을 목적’으로 서면용천리 주민들은 총상을 입은 최학길(별명 명옥)의 선동으로 다시 모여 양양경찰서로 달려 내려가 적막을 깨고 낮에 희생된 함홍기, 권병연, 김학구의 고혼을 부르며 대한독립민세를 부르다 기진맥진 눈물을 흘리며 어둠을 뚫고 용천리로 돌아갔다.
경찰서장에 덤벼들다 피살당한 함홍기의 시신은 경찰서 내 복도에 가마니로 덮어 놓았다가 10여 일후 가족에게 인계되어 마을 주민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을 마쳤으나, 하관(下棺) 직후 일본 경찰이 파헤치고 관을 깨버렸다. 사설 묘지라는 이유와 장례식 때 동네 전 주민이 모여서 울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상황을 강원도장관이 보고한 전신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4월 5일 오전 10:00 접수
“작야(昨夜) 다시 양양군(襄陽郡) 읍내(邑內) 부근(附近) 인민(人民) 약(約)육백(六百) 읍내(邑內)로 내습(來襲), 읍내민(邑內民) 약(約)오백(五백(百)) 차(此)에 화(和)하여 소요(騷擾)를 극(極)하며 특(特)히 유치인(留置人)탈감(脫監)을 위하여 경찰서(警察署)에 침입(侵入) 약탈(掠奪)을 극(極)함으로서 무기(武器)를 사용(使用)하여 일단(一旦) 진압(鎭壓)하였으나 형세(形勢)불온(不穩), 폭민(暴民)사상(死傷)있었다.”
▷ 이종우 선생의 증언
양양 3·1만세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심한 부상을 당한 손양면 수여리 이준재(李俊在)옹이 몸소 겪은 사실을 그의 자제인 이종우 선생이 정리한 내용을 소개한다. 1919년 4월 4일 각 마을 구장의 인솔하에 손양면 송현리 고송고개에 집합하여 청년들이 앞장서고노·장년층과 부녀자들이 뒤에 이어 오던 중 월리를 거처 남대천 나무다리를 건너 다시 동운교(東雲橋) 를 건넜다. 양양장터 마당에는 각 면에서 모인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서 만세운동에 참여했었다.
장마당에 솔선하여 참여한 인원이 인산인해였으며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자 일경들이 놀라 경찰서 마당에 모여 만세 군중의 동태를 살필 때 날이 저물었다. 전날인 4월3일 임천리에서 체포된 이석범 선생과 마을 주민들의 석방을 외치며 손양면 청년들이 맨 앞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전진하다가 일경의 저지선을 뚫고 양양경찰서로 진입하였다.
그때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거부하는 일경들과 격렬하게 대치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에 격분한 청년 중 가평리 구장 함홍기가 경찰서장실로 들어가 화로를 집어 던지려 하니 서장을 호위하던 순사가 일본도로 화로를 든 두 팔을 내려치고 이어 허리와 배를 찔러 쓰러졌다. 이를 본 간리에 사는 권병연이 격분하여 서장실로 들어 닥치니 서장을 호위하던 순사가 권병연을 일본도로 내려쳐 쓰러뜨렸다. 이에 군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당황한 일경이 일제히 사격하므로 군중들은 더 이상 돌진하지 못하고 총소리를 뒤로하고 모두 엎드리며 흩어지는데 이준재도 겁에 질려 동운교 쪽으로 도망쳐 나오는데 계속 총소리가 나므로 당시 제방둑 넘어 월리 쪽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데 총소리가 나지 않으므로 상황이 어떠한가 보려고 고개를드는 순간“고노야로(이~놈)”라고 소리치며 일경이 인정사정없이 군화발로 안면을 걷어찼다. 이준재는 순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보니 앞니가 모두 부러지고 피투성이인데 일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응급처치를 하고 누워있으니 두려움과 억울함 그리고 적개심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때는 논에 가래질을 할 시기라 가래질 품앗이 약속이 되어있어서 4월 9일 아픔을 무릅쓰고 퉁퉁하게 부은 얼굴을 싸 동이고 송전리 앞 쌍호 부근 논에서 가래질을 하고 있는데 만세소리가 들려오므로 이준재를 비롯한 가래질 일꾼들 모두 몸도 씻지 않고 그대로 양양 장마당으로 달려가 입이 아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한다.
이준재는 일제강점기에 일경에 맞았지만 두려워 이 사실을 숨기고 살았으며, 만세운동 후 10여 년이 지나니 그나마 성치 않게 남아있던 치아(齒牙)마저도 한대도 없이 모두 빠져 평생을 편하게 먹지도 못하고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삶을 살았다 한다. 이같이 양양에는 일제강점기를 보내며 가슴앓이하는 슬픈 사연을 가진 가정이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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