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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의 역사

    다. 양양 3·1만세 운동의 전개(展開) (3)

    페이지 정보

    조회 243회

    본문


    5) 4월 7일 상황


    오늘은 나흘째 날 양양 3·1만세 운동이 4곳에서 있었다. 

    양양읍 내에서는 4일부터 9일까지 양양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6일부터 증강된 일본군인 1개 소대가 양양에 주둔하여 양양경찰서와 주재소에 배치되어 수비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7일부터는 읍내에서 주도적인 만세운동을 할 수 없었다. 4월 7일은 양양군에 수비대 병력이 증강되어 양양읍 내로 들어오는 주요 통로 다섯 곳에 일경과 수비대를 배치하여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각 면에서 진입하던 만세 군중은 돌파하지 못하고 길목 외곽에서 만세만 부르다가 해산했다.

    전국적으로 가열해지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일제가 6개 대대의 증원부대를 보냈는데, 4월 5일 1개 중대는 제20사단 제79연대에 편입되어 강릉에서 왔다. 그중에 1개 소대가 양양에 주둔하여 양 양경찰서와 주재소에 배치되어 수비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양읍 내 주민과 천도교도가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 서면은 상평리 일대 농민이 야간에 서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낙산사 스님들의 횃불 만세운동, 봉화대 만세운동이 있었다. 현북면은 4일 만세운동으로 피해를 본 용천리 주민을 위로하는 위로만세(慰勞萬歲) 운동을 하였다. 


    가) 양양장터

    천도교 신도와 양양면 만세 군중 300여 명이 합세하여 양양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1908년 4월경창립한 천도교는 교구장 및 교역자 2명과 신도 213명으로 회당 1개소가 성내리에 있었다.

    당시 신분이 확실치 않은 손양면 간리 권병연, 도천면 논산리 손계원, 서면 상평리 박춘실은 엿장수나 술장사를 하면서 살았고, 서면 조개리 구룡령 산기슭에 사는 지석화도 양양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천도교 신도로 의병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 당시 강원도장관의 전화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양양군(襄陽郡) 7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도(七日 午後 二時半 天道敎徒)를 중심(中心)으로 약 3백명(約 三百名)의 군중(群衆)이 운동(運動)을 개시(開始)하여 양양읍내(襄陽邑內)에 압기(押奇)하여 부수모자 4명(付首謀者 四名)을 체포(逮捕)하여 해산(解散)시켰다.”


    4월 6일 서면 조개리 지석화는 상평리 김학구의 장례식에 먹을 음식 100여 명분을 준비하여 걸어서 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다음날인 7일에는 이 사건에 대하여 천도교 신도들이 양양장터에 모여 거세게 항거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나) 서면(西面)

    앞에서 말한 김학구(金學九)의 순국 및 장례식에서의 처절한 슬픈 광경과 일제의 탄압에 격분되어 폭발한 서면 지역 상평리 일대 농민 100여 명이 7일 저녁에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창문을 깨고 목 놓아울며불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외치는 소리가 남대천을 건너 북평리까지 들렸다.


    ▷ 당시 강원도장관의 전화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7일 야 양양군 서면사무소(七日 夜 襄陽郡 西面事務所)에 약 백명(約 百名)의 폭민 내습 (暴民 來襲)하여 창문(窓門)을 파괴(破壞)하고 면(面) 직원(職員)에 대(對)하여 폭행(暴行)을 가(加)하다,  그런데 중요서류(重要書類)는 팔일중 군청보관(八日中郡廳保管)을 탁(托)하여 1시 면사무(一時 面事務)를 중지(中止)하다.”


    그 후 4월 11일 강원도장관의 보고를 보면 사흘 동안 면사무가 중지되었다. 이때 유리창을 깨고 면서기를 폭행하던 주동급 김동섭(金東燮)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또 4월 4일 양양경찰서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총상을 입은 최학길(崔學吉, 명옥)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다) 낙산사(洛山寺)

    낙산사에 주소를 두고 3 1독립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불교 대표로 참여한 만해 한용운의 민족정신에 감응된 낙산사 스님들은 7일 저녁 술시정각(戌時正刻 : 오후 8시 정각)에 범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고각에서는 법고소리 계속 울리고, 스님들은 모두 오봉산 정상에 올라 바라소리 울리면서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이르도록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고서 절로 내려와서는 법당에서 자정까지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불공을 올렸다. 

    한편 각 면에서는 산위에서 봉화를 올려 전 군민이 봉화를 바라보며 대한독립을 염원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라) 현북면(縣北面)

    현북면은 4월 9일 양양장 날에 만세운동을 할 목적으로 원일전리의 박원병이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려고 소지한 혐의로 4월 6일 양양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그의 형 박규병은 장리 서당 훈장 이성윤과 뜻을 같이하고, 가마터에 모여든 약 40명의 군중에 대하여 만세운동을 하자고 설득하여 지지를 얻었다.

    현북면의 9일 만세운동보다 앞선 7일에 원일전리에 모여 계획을 설명하고 찬성을 얻었다. 이 기회를 타서 다수 군중의 참여를 이끌고, 다른 한쪽으로는 그 기세를 이끌고 구속된 박원병의 석방 청원을 시도하였다.  7일 아침에 9일 사용하려고 만들어 놓은 일부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를 원일전리, 장리, 도리, 내현, 수리 등의 200여 명의 주민과 서당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소지하게 하고 선두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박용규·박규병의 선창으로“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남대천을 따라 2시간 정도 걸어서 서면 용천리에 도착하니, 일본 군경이 남대천 주변의 건지산과 두물머리에 미리 대기하고 있어 얼마간 대치하다가 임천리로 건너가 만세를 부르고, 용천리로 되돌아왔다. 용천리에서 만난 일본 군경에게 조선의 독립운동가를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날은 지난 4일 양양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던 용천리 주민 중 부상자가 많았다고 위로하는 뜻에서 만세를 불렀다 하여, 이 만세를‘위로만세(慰勞萬歲)’라고 부른다.

    당시의 주동자 박규병은 체포되어 1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이성윤(본명 : 李鍾殷)도 그 후 체포 되어 1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6) 4월 8일 상황

     

    오늘은 다섯째 날 양양 3·1만세 운동이 있었다.  현북면은 독자적으로 4월 8일 말곡리 구장 김창환이 노약자를 제외한 마을 주민 대다수를 인솔하여현북면사무소와 기사문주재소에 몰려가서 대한 독립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불상사 없이 저녁때 마을로 돌아와, 내일(9일) 만세운동 준비를 위하여 각자가 소지할 수기를 다시 만들었다.

    도천면은 논산리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4월 4일부터 계속 만세운동이 일어나니 논산리에서도 만세운동에 대한 명분론이 일어났다. 원래 이 마을에는 중심인물 김주혁(金周赫)이 당시 강원도청 주사로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지시한 사실은 없었으나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온 군민이 만세운동에 참가하는 형편이 되었으니, 당시의 구장 김주철(金周哲 : 김주혁의 종형)·고광화(高光華)·황명찬(黃明燦)·박명원(朴明元)·고을주(高乙柱) 등이 주동하였고 마을 앞에서 술장사하던 손계원이 힘을 모아 집집마다 한 사람씩 동원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던 대포리를 목적지로하여 큰길로 갔다. 

    큰길은 부월리를 거쳐 대포리로 이어졌는데 부월리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이미 도천면사무소 회계서기 김우규(金宇圭)가 와서 대기하면서 만류하여 대포리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에서 만세를 부르고 모두 해산하였다.

    이날 독립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김주철, 고광화, 황명찬, 박명원, 고을주 등은 검거되어 양양경찰서에서 고초를 겪은 후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김주철을 제외한 4명이 90대의 태형을 받았다. 태형을 맞은 4명은 상처가 심하여 거적으로 만든 들것에 엎드려 이틀 동안 집으로 와서 일 년 동안 엉덩이 상처에서 구더기를 파내며 치료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