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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의 역사

    2. 인민공화국 통치하의 양양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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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함에 따라 북위 37도와 38도 사이에 걸쳐 있는 양양군도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 38도선을 기준으로 현남면 전체와 현북면의 잔교리, 대치리, 명지리, 법수치리, 면옥치리, 어성전리, 원일전리, 장리와 서면의 서림리, 황이리와 갈천리가 강릉군으로 편입되어 미군정에 들어가고 양양군의 대다수 마을은 8월 말부터 소련군정을 받게 되었다.  38선의 동쪽 끝은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지역인데 잔교리 297번지에 있던 한 민가는 분계선으로 갈려 부엌은 이북에 속하게 되었고 방은 이남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양양의 내륙인 38선 인근 서면의 주민들은 북쪽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기도 하였다.


    가. 견고해진 임시군사분계선 


    분단 초기에는 경계선이라 하지만 경계가 될 만한 시설물도, 통행을 막을 장애물도 없는 상태였다.

    명지리 및 대치리와 영덕리 등 몇 개 지역에 표지석 형태로 위치를 나타내는 정도였는데 표지석이 설치된 지점도 실제 38도보다 다소 남쪽에 있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주목적으로 주둔한 미군과 소련군에게 한국인의 통행을 막을 적법한 근거는 없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위한 예비회담이 1946년 초에 열렸는데 이때 남북 사이의 모든 여행에는 허가가 필요하고 규제를 받는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하지만 38선이 생긴 이후 한동안은 남북의 주민들이 삼팔선을 넘나들며 교역도 하고 선호하는정치체제를 따라 월남하거나 월북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양양에서 명태 등을 가지고 주문진이나 강 릉으로 가 필요한 다른 물건들과 바꾸어 돌아온 일이 빈번하였다고 한다. 1947년 5월에는 미·소 군정당국이 남북교역장을 설치하기로 하여 남북간의 물물교환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바도 있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남북한 양측에서 경계선에 경비대를 배치하여 였는데 그때부터 국경을 넘나들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양양군 영덕리에 세워진 38표지석을 읽다보면 분단의 아픔을 절감할 수 있다. 

    “1945년 8월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일본 점령지의 전후 처리를 위해 설정한 임시군사분계선이 하나였던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며 12개의 강과 75개 이상의 샛강을 단절시켰고, 181개의 작은 우마차로,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전천후도로, 8개의 상급고속도로, 6개의 남북간 철로를 단절시키며, 하나의 독립국가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깊어지고 적대감이 고조된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이 선이 무너지나 1953년 휴전협정으로 휴전선이 성립될 때까지의 남북한의 정치적 경계선이 되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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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지리와 영덕리 38선 표지석



    나. 남파공작 전진기지로서의 양양


    1) 강동정치학원과 양양인민유격대훈련소


    북한은 남한의 적화를 위하여 군사력을 증강하는 한편 스파이와 유격대를 양성하여 남파하였다.

    1946년 평양학원에 대남반(對南班)을 설치하여 월북한 남로당원을 대남공작요원으로 훈련하여 남한에 침투시켰다. 이들은 주로 남한 내 좌파세력 또는 남로당원과 연계하여 공작을 폈는데 일부는 정부기관 과 군대 내부에까지 침투하였다.

    1948년 1월에 강동정치학원을 설치하여 인민유격대라 불리는 무력요원들을 양성하였다. 강동정치학원에서 양성된 유격대원들은 양양인민유격대훈련소에서 재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는데 양양인민유격대훈련소는 지금의 향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2) 침투 사례


    제주도 4·3사건과 여·순반란 10·19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국군과 경찰병력이 후방으로 투입된 상황을 파악한 북괴는 남한 내의 치안을 교란하고 각지에서 폭동 반란을 일으키는 등 공산화를 획책하

    였다. 좌익계열에 지령을 내려 붕괴된 지하조직을 재건하고 유격대를 남파하여 무장봉기를 꾀하였다.

    1948년 11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남파된 유격대는 10회에 걸쳐 2,400여 명인데 그중 2,000여 명이사살 또는 생포되었다. 다음은 영동지역과 그 인근에서 발생한 인민유격대의 대남침투사례들이다. 


    가) 오대산(五臺山)지구 침투

    소위 해방산(解放山)이라고 부르던 오대산 일대에 있는 공비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병력을 보충할 목적으로 북한은‘양양인민유격대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남로당 출신 등 약 180명을 선발하여 괴뢰군복을 입히고 일제 99식 장총으로 무장시켜 1948년 11월 14일, 양양군 서면에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침투시켰다. 이들 남침공비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타고 오대산과 흥정산(興亭山)을 거쳐 1948년 11월 15일에 홍천, 평창, 횡성의 3군 접경에 있는 태기산(泰崎山)에 도달하였고 계속 남하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육군 제8연대(원주에 주둔)는 즉시 일부 병력을 출동시켜 경찰과 합동으로 남하 루트를 차단하고 수색 작전을 전개하였다. 태기산 포위 작전에 걸려든 공비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 흥정산, 보래악, 매봉산을 우회하면서 다시 남하를 시도하였다. 군경은 이러한 공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지휘본부를 간고개(間峠)로 이동한 후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수색·추격 토벌작전을 전개하였고, 다시 지휘본부를 평창경찰서로 이동시켜 이들이 서울~강릉 간 도로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봉쇄하였다. 그러나 군경의 봉쇄망을 교묘히 탈출한 공비의 주력은 가리왕산, 치악산, 백덕산 방면으로 남하하여 영월지역으로 들어가 마차탄광지역에 침투했다.


    나) 태백산(太白山)지구 침투

    경북 보현산 인근에서 국군과 경찰의 포위망에 발이 묶여 섬멸 직전에 놓인 김달삼 부대를 구출하고자 북괴는 극렬분자로만 편성된 정예부대 700명을 월남 침투시켰다. 1950년 3월 24일 새벽, 38°선 경비대가 남측 전초 참호진지에 일제 공격을 하는 사이에 김상호가 이끄는 선발대 약 300명이 양양 정족산 벽실령을 넘어 오대산 산줄기를 타고 남하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주문진 주둔 1개 대대의 병력을 출동시켜 경찰의 협조하에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공비들을 노인봉에서 청계동계곡으로 유인하여 공격하여 선발대장 김상호 이하 176명을 사살하고 36명을 생포하였고 12명을 귀순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김무현이 인솔하여 침투한 350명의 무장공비는 인제에서 홍천으로 이동하여 방대산을 거쳐 남하하였다.


    다) 현북면 면옥치리 침투

    북괴는 1949년 9월 28일 39경비여단 예하 병력의 엄호하에 약 50명의 유격대를 양양군 현북면 면옥치리로 침투시켰다. 그러나 국군 제8사단에 의하여 격퇴되어 분산 월북하였다.



    다. 인공치하 반공 활동기지로서의 양양


    양양은 북조선 통치 아래에 있었음에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반공 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1) 민일당(民一黨) 사건


    민일당은 반공의식과 민주사상이 투철하고 결사적 투쟁력을 가진 양양 청년들이 무기를 탈취하는 등반공투쟁을 하기 위해 1946년 6월 13일 서문리에서 조직하였다. 만주군 출신 김석진(金錫振) 등을 지하조직책으로 하여 통천에 있는 청년조직 자당(自黨)과 속초 부월리의 노장파와 협조하는 등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는데 1947년 5월 18일 비밀이 탄로나 전원 검거되었다. 

    그때 윤석갑은 북한 보안부대원과 싸워 임천다리에 떨어뜨리고 남하하였으나, 나머지 대부분의 대원들은 교화장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5개월을 보내다가, 살기 위해 공산당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혈서를 쓴 뒤 집행유예 4~5년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1947년 12월까지 전원 월남하여 교원(敎員)이 되었거나, 경찰이나 경비대에 입대하여 반공투쟁을 계속하였다.


    2) 반공의거(反共義擧) 


    1947년에서 1949년에 사이에 양양읍 군행리의 김양진(金良鎭)과 서면의 최병주(崔秉周)가 10여 명의 대원들과 함께 북한 당국의 감시와 감독을 피하면서 지하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한 각 기관의 활동을 탐지하여 남한의 서북청년회와 군부대 등에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의 조종을 받아 반공의거를 계획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발각되어‘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징역 3년에서 무기징역까지 받았는데 그 숫자가 지하조직원 포함 50여 명에 달하였고 대부분 원산형무소와 아오지 탄광 등지로 끌려갔다. 대개는 복역, 노역하다가 6·25 한국전쟁 시 국군이 북진하자 인민군에 의해 방공호 속에서 총살당하였다. 이운영(李雲榮)은 체포 당시 탈출하였고, 김문학, 천봉득(千奉得)은 군국 진격 시 감시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귀향하였다.


    3) 양양 건견장(乾繭場) 방화사건


    양양면 서문리에는 누에고치를 건조하기 위한 목조건물이 있었다. 이 건견장을 손양면에 사는 최지선(崔祉鮮)이 경제혼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1948년 봄에 방화하였는데 발각 체포되어 복역 중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4) 학생의거(學生義擧) 


    월남하여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하던 김주철과 양양고급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고재철, 안재승, 임세삼, 이창규, 이상조, 남상중 등이 모의하여 1947년 12월, 소련군 창고에서 권총 5자루와 화약 3상자를 탈취하였다. 그 후 김복기 학생 집에서 조선공산당 간부와 소련군 정보부(콘트라지백크) 간부를 살해할 의거를 계획하다가 탄로가 나자 당시 양양고급중학교 김운봉(金雲奉)교사 집에 은신하였는데 12월 31 일 전원이 체포되어 원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강원도 인민재판소 부소장 윤두병(광복 당시 양양군청 내무과 촉탁, 손양면 하양혈리 거주)의 판결로고재철 20년, 안재승 18년, 그 외 학생은 15년형 언도를 받았다. 고재철은 함흥형무소서 1950년 4월 13일 부친 고광익(高光翼)과 마지막 면회를 하였는데 국군 진격 시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 안재승은 함흥형무소로 이감(移監)되었다가 1950년 8월 20일경 옥사하였다는 통지가 가족에게 전해졌다. 교사 김운봉은 학생 은익불고지죄로 처형되었다.


    5) 중학생 집단월남(越南)사건


    북한은 어린 학생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주입시켰고 자아비판을 하는 등 행동의 자유를 빼앗았다.

    현북초급중학교의 몇몇 학생들이 이런 교육체제에 불만을 표현하자 학교는 이 학생들을 무지막지하게 체벌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윤석진 등 6명은 1948년 6월에 집단으로 월남하였다. 

    그러나 남한당국은 자유를 찾아 월남한 학생들을 어떤 임무를 띠고 남하한 것으로 오해하였을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이므로 부모에게 되돌아가라고 38°선에 데리고 가 공산군에게 인계하였다. 이 일로 학생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동분자로 몰려 재판에서 4년에서 5년의 형을 언도받아 원산형무소에서 있다가 함흥, 청진형무소 등에 이감 복역하였다. 

    한국전쟁 이전에 박상진은 영양실조로 쇠약하여 죽었고 윤석규, 윤석종, 박상진은 아오지탄광에 끌려갔다. 6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윤석진은 천신만고 끝에 유엔군에 발견되어, 함경도 신흥군 하기천면의 이정명(치안대장)의 집에서 은신하던 중 1·4후퇴 때 함흥 감포항에서 어선을 타고 현북으로 돌아왔다.


    6) 김일성 초상화 소각사건


    소련군이 양양초등학교 건물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학생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부하였다. 시내에 있는 분교실에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평소부터 공산주의 교육체제에 불만이 많던 양양고급중학교에 재학중인 남상중(양양중학교장 남라석의 아들)은 1948년 7월 어느 날 청소하다가 김일성의 초상화를 뜯어 태워버리고 그길로 월남하였다. 

    그 뒤 다시 돌아와 정보활동을 하려다 잡혀 고초를 당하였는데 학생이고 온후하였던 남 교장의 아들이라 하여 석방되었다. 그 후 학생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행방을 알 수 없다.


    7) 현북면 도리 반공청년 비밀공작 사건


    양양군 도리는 38선 이남에 있는 장리로부터 2㎞북쪽에 위치하는데 서북청년회의 영향을 받아 반공의식이 매우 강한 지역이었다. 공산당을 타도하고 민주국가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민주당 총책인 이기호(李起虎)가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 행동대를 조직하였는데 행동대원이 이종윤(李鍾允) 등 17명이고 연락책은 이종천과 노재봉이었다.

    이들은 북한 정보를 장리지서를 통하여 서북청년회와 호림부대공작대에 전달하고 그들로부터 정보와 무기를 공급받았다. 공산당총회가 개최되는 1947년 7월 7일에 회의장을 폭파하고 적색분자들을 피살하려고 계획하던 중 안봉도(도리인민학교장. 이기호의 대원이면서 공산당정보원으로 활동한 이중첩자)의 고발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전원이 양양내무서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양양재판소에서 7년이상 무기까지 판결을 받고 원산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이종현은 체포 전에 월남하였는데 부모와 처자를 데려가려고 돌아왔다가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무기징역을 받은 이기호는 복역 중중노동에다 영양실조에 걸려 옥사하였다. 이 사건 후 많은 도리 주민은 분산 이주 되었다.



    라. 종교탄압에 대한 소리 없는 항거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억압하고 감시하였다. 소련군이 물러간 후 북한공산당은 종교와 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박해하였다. 그들은 사회개혁의 주요대상인 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부속건물들을 빼앗아 자기들이 필요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북한의 교회지도자들은 이러한 공산당의 만행에 대하여 저항하였으나 공산당은 자신들의 신념과 계획대로 교회를 파괴하고, 마침내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투옥하고 살해하였다. 그러자 북한의 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남쪽으로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양양성당의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는 일제에 빼앗겼다가 겨우 되찾은 성당을 지키기 위하여 공산당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이데올로기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미사 시간에 이 신부가 강론하면 인민군이 군화를 신은 채 성당 뒤에 서서 총을 들고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었다.  이 신부가 공산당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사제인 자신은 교우들이 있는 한 양양을 떠날 수 없으며, 사제로서 양양의 교우들을 보호하는 일은 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이니 남게 해 달라”고 사정하였다.

    1946년경부터 연길, 함흥, 원산 등 지역에서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남하하여 양양본당에 들렀는데 이 신부는 이들을 안전하게 숨겨 주고 본당 교우들의 협조를 구해 월남할 수 있도록 알선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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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에 건립한 양양성당


    1) 양양을 통해 월남한 성직자와 수도자


    사제로는 김성환 빅토리아 신부와 연길교구 허창덕 치로 신부가 있고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자였던 서석태 부제와 한 명의 신학생도 있었다. 수녀들은 연길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김 베네딕다 등 9 명이었고 예비수녀도 1명 있었다.


    2) 월남을 도운 양양성당 교우


    당시에는 월남을 돕다 발각되면 즉결처분으로 총살되었기 때문에 선뜻 월남을 돕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광재 신부의 간곡한 부탁과 설득으로 범부리에 사는 김봉만 보나파시오와 김성녀 루시아, 삽존리공소회장과 도문리 김문손 안나와 김경태 젤마나 그리고 최영자 요안나 등이 앞장섰다.


    3) 탈출로, 디모테오길


    육로 세 곳과 바닷길을 이용하였다. 육로는 ① 월리 뒷산~고노골~삼밭이재~삽존리 뒷산~공동묘지~풀순밭~비리골~명지리 안골 ② 서문리~임천 뚝길~중버덩~범부 뒷산~용천 섬버덩~한구렁~삼밭이재~삽존리 뒷산~공동묘지~부소치재~원일전~어성전 ③ 남대천 뚝길~범부 뒷산~수리돌고지~정족산~서림 갈천~구룡령에 이르는 코스이고, 바닷길은 송암리 앞 냇가~금강리 기바우~송전~오산 뒷산~수낭개에 이르는 코스인데 숨겨놓은 목선을 이용하여 주문진이나 강릉으로 탈출시켰다.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공적을 기려 육로 ① 구간을 디모테오순례길로 정하였다. 



    마. 양양 출신의 거물급 사회주의자


    사회주의는 1880년대에 『한성순보(漢城旬報)』 등의 신문을 통해 유럽의 사회당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가 이루어지면서 한반도에 알려졌지만 사회주의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계기는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민중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성과 대중적인 정치의식을 각인시키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3·1운동 직후 작성된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의 書)』와 1920년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 (獨立運動之血史)』에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의 세계사 변천을 언급하였다. 3·1운동 직후 조직된‘조선민족독립대동단’은 1919년 9월 조직을 재정비하면서‘사회주의를 철저하게 시행한다’는 노선을 내걸기도 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와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무기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주의 사상을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적 무기로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혼재되면서 분화하였다. 일제하의 사회주의운동은 중국, 인도, 베트남 등 식민지·반(半)식민지 국가들의 사회주의운동과도 매우 유사하다.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이들 국가에서는 사회주의의를 수용하고 공산당을 결성하였다. 1920~30년대 여러나라의 사회주의운동은 코민테른(Comintern)의 영향을 받았는데 사회파시즘론이나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초좌익적’경향 등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양양은 일제강점기 때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청년운동, 농민조합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1946년 실시한 토지개혁을 기반으로 김병환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운동을 한 이들이 이 지역의 지도자로 나선다. 최용달, 조두원, 김대봉, 최공집 등도 북한정권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해방 직후 전국적인 민간자치기구로 출범한 인민위원회에는 양양 출신 강환식과 최공집이 각각 남부강원지역 대표와 북부강원지역 대표로 활동했다. (설악문화예술포럼, 수복지구, 98쪽 요약)   


    1) 최용달(崔容達)


    최용달은 양양읍 조산리 강릉 최씨 집안 출신으로 그의 집은 사천리에 있었다. 1925년 3월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2기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는데 본과로 진학할 때 법학부를 지원하였다. 고향 양양과 관련된 행적은 대학시절 향우회 활동으로 확인된다. ‘재경양양학생친목회’와 관동 학우회에서 임원을 지냈다.

    1927년 이강국, 박문규 등과 함께 경성제대 교내 서클인 경제연구회에 가입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부하였고, 최상해(崔尙海)라는 펜네임으로《대중공론(大衆公論)》 , 《조선지광(朝鮮之光)》 등 월간잡지에 진보적 성향의 경제논문과 정치논문 등을 발표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서 민법과 상법을 가르쳤다. 

    최용달은 대학교수가 된 이후에도 사회주의운동을 계속하였는데 이주하, 이강국과 함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벌인 원산그룹으로 불린다. 1929년 총파업을 벌였던 원산은 1930년대에 총 4차례에 걸친 태평양노조사건 등 적색노조운동이 가장 활발해 당시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지역이었다.  

    최용달은 나중에 사상전향자 단체인 ‘대화숙’에 참여한다. 대화숙 참여로 최용달은 이승엽과 조두원, 임화 등과 함께 사상 전향을 하고 친일을 한 인물로 거론되기도 하는데 그를 친일파로 보지 않는 의견도 있다. (대화숙 大和塾 : 1941년에 일제가 조직한 사상교양 단체로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는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들을 집단적으로 관리하고 관찰하며 전향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광복 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에 합류한다. 1945년 9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학술원 상임위원을 역임하다가 월북하였고 그해 11월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는데 북한정권 수립 초기 사법체제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토지개혁을 위해 법적체제를 마련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는데 그러한 공로와 능력을 인정받아 1946년 2월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장, 1947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 1948년 8월에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북한의 헌법제정위원회 위원으로 헌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북한 정권 수립 초기에 중책을 맡았던 그였지만 북로당과 남로당 사이 갈등으로 권력 실세에서 멀어지게 된다. 1948년 3월 북로당대회에서 소련파로부터 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내각 구성에서 남로당 계열로부터 초대 사법상으로 추천되었지만 북로당계열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953년 1월 산업성 산하 일반 제품 수입회사 사장으로 재직 중 박헌영 그룹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숙청됨으로써 박헌영 그룹의 최고 이론가이며 법학자요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으로 민족광복을 꿈꾸었던 지식인은 자신이 만든 헌법과 법률에 기초한 정권에 떠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 조두원(趙斗元)


    조두원(趙斗元, 1903~1955?, 일명 조일명)은 현남면 포매리에서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조원숙의 오빠이다. 일제하에서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다녔고 양양학생친목회 집행위원, 조선학생총연합회 집행위원, 조선학생회 집행위원을 지냈다. 1925년 사회주의 학생운동 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결성하고 권오설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그해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29년 6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한동안 원산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는데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 “민족해방투쟁 만세”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하여 징역 6개월의 형량이 추가되었다.

    1933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한 후 ‘공산주의 운동은 환경에 따라 그만둘 수 있다’라며 전향문을 발표하고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1938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1940년에는 중석을 채굴하는 삼각상회의 사무원으로 일했으며, 한때는 술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때 적극적인 친일 행적이 확인된다. 1938년 12월 14일 부민관에서 열린 시국 유지 원탁회의에서 내선일체의 지도원리를 세워야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아울러 1944년 1월에는 대화숙(大和熟)의 야간학교에서 3개월 동안 일본어 교사로 종사하는 등 친일 활동을 벌였다.  1945년 8·15광복 다음날 서울 장안빌딩에서 서울계와 자신의 계보인 화요회계와 함께 장안파 조선공산당을 발족하였다.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공산당조직 재편에 앞장섰으며 이승만 암살기도혐의로 미군정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조일명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해방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47년 12월 월북했다. 1949년 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서기가 되었다가 1950년 서울이 점령된 후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계획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박헌영의 비서 격으로 남로당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1953년 북한정권으로부터 미제 간첩 및 반역 행위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1955년에 진행된 박헌영에 대한 특별재판에서 이강국과 함께 증인으로 출정하여 자신과 정치적 행로를 같이 해온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박헌영 재판에서 증언한 후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