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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의 역사

    1. 해방과 분단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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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가. 일본의 패전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침공하면서 시작된‘대동아전쟁’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국들과 일본 사이의 전쟁으로 확전되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세를 잡은 미군은 1945년 2월 필리핀 마닐라에 상륙하고 3월에 이오지마를 점령하였으며 도쿄 등에 공습을 감행하는 등 3개월에 걸친 혈전 끝에 6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소련의 수뇌들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군도 얄타회담의 약정에 따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8월 9일부터 한반도로 진격하였다. 수세에 몰린 일본은 8월 14일 항복한다는 사실을 연합국에게 통보하고 8월 15일 쇼와 천황이 포츠담선언을 수용할 것을 발표함으로써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은 종결되었다.



    나. 한반도 해방


    “학교 교문 옆 교정에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의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등교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목총으로 세 번씩 찌르고 일본천황만세를 외치게 하던”(전 양양학연구소 소장 이종우 님의 증언) 일본제국의 단말마적 발악은 항복선언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는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해방은 온 국민에게 기쁨으로 다가왔겠지만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결사적으로 가담하여 큰 고초를 치른 양양 사람들에게는 더욱 감격적이었다. 상도문리의 유학자 오윤환은 해방을 맞은 소회를 일기에‘세상사가깨끗해졌다’라고 기록한 바 있다. 모든 학교와 행정관 서에 걸린 일본천황의 사진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신사들은 부서졌다.  중복리에 사는 김형배와 김천배 등은 마을에 조선해방기념비를 세워 해방의 감동을 주민들과 함께하였다. 8월 18일에는 양양군 주최로 범군 민적 해방환영주민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대동아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연합국들 사이에 한반도 독립과 독립 이후의 처리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1943년 11월, 미국(루 즈벨트)·영국(처칠)·중국(장제스)이 참석한 카이로회담은 일본으로부터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고, 1945년 2월 미국(루즈벨트)·영국(처칠)·소련(스탈린)이 모인 얄타회담에서는 결론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논의된 바 있었다.

     

    179_1.jpg

    조선해방기렴비



    다. 미(美)·소(蘇) 양군의 한반도 진주


    소련은 1945년 8월 상순부터 한반도에 들어온 반면, 미군 주력부대는 서울에서 1,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소련에게 선점당할까 다급해진 미국은 북위 38도선에 분계선을 설치하여 그 이북에는 소련이, 그 이남에는 미국이 주둔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자고 제안하였고 소련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한반도는 분단의 씨앗을 잉태하게 되었고 양양도 공산 치하에 들게 되었다.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1945년 8월 27일까지 북한전역을 점령했는데 8월 24일부터 경의선·경원선을 차단하고 9월 6일에는 전화·전보·우편 등 통신망을 끊어버렸다. 미군이 인천에 도착한 것은 9월 8일, 남한전역을 점령한 것은 10월 하순으로 소련보다 두 달 이상 늦었다. 


    1) 38 이북 상황


    38이북에 주둔한 소련은 각급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1945년 9월 중순 입국하면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진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발족하여 소련군의 지휘하에 행정·치안을 담당했다.  1946년 토지개혁을 통해 5정보 이상 지주의 토지는 무상 몰수되어 모든 농민에게 일정한 점수에 따라 무상 분배되었다. 한국인 소유의 중·소규모 상업이나 수공업의 경우에는 개인소유가 허용되었지만, 일본인이 소유했던 산업은 국유화되거나 폐업되었다.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숙청되었고‘건국사상 총동원운동’으로 일제와 봉건의 잔재가 청산되어나갔다. 어업분야의 영세성을 탈피하고자 1948년말부터 ‘수산합작사운동’을 전개되었는데 양양군 속초면 부월리가 수산합작 모범마을로 선정이 고려될 만큼 양양에서도 사회주의 개혁이 진전되었다. 


    2) 38 이남 상황


    미군이 진주하기 전 남한에서는 조선건국동맹을 계승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치안을 담당했다. 9월 들어 박헌영 등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고, 송진우(宋鎭禹) 등은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으며 10월 이후에는 이승만과 김구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여 백가쟁명의 시기를 맞는다. 그러다 1945년 10월 미군정 장관 아놀드는 성명을 통하여‘남한에는 미군정이라는 단 하나의 정부가 있을 뿐’이라고 선포하고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과 관리·경찰 등을 활용하였고 언론·집회·결사 등의 자유를 보장했다. 



    라. 분단의 고착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의 3국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영·중·소가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신탁통치에 대하여 국민들은 찬반양론으로 대립하였다. 대체로 우익진영은 신탁을 또 다른 형태의 식민통치로 보고 반대한 반면, 좌익진영은 통일독립을 위한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찬성했다.

    이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 아래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대하여 우익진영은 찬성하고 좌익진영은 반대하였다. 남북간에 의견수렴이 불가능해지자 1948년 5월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인공’이라 부름)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으나 그해 12월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승인했다.



    마. 남북의 창군 과정


    1) 북한의 창군과정


    소군정은 1945년 10월 21일 무장단체 해산령을 발표하고 1945년 11월에 보안대를 조직하였다. 보안대는 소련군정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사상이 투철한 자 중에서 선발된 2,000명 규모로 진남포에서 창설되었는데 1946년 초까지 각 도에도 보안대를 설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치안과 시설경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1946년 1월에 평양에 본부를 둔 철도보안대를 창설하였는데 그 규모가 점차 커지자 정규군으로 편성될 것에 대비하여 7월에는 북조선 철도경비사령부로 개편되었다.  1946년 2월 8일 진남포에 군간부와 정치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평양학원을 설치하였다. 전쟁 직전까지 모두 2,500명이 배출되었다. 1946년 7월에는 평안남도 강서군에 군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중앙보안간부학교를 설치하였다. 이곳 출신들은 후일 인민군의 소대장, 중대장, 교관요원 등이 되었다. 지휘체계를 일원화할 필요에 따라 1946년 8월 15일 평양에 군지휘부인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설치하였다.  1947년 5월에 이르러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인민집단군(최용건 사령관)으로 재편하였고, 공산정권수립 7개월 전인 1948년 2월 8일 정규군 창설 선언과 함께 조선인민군으로 개편하고 인민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병력은 18세 이상 25세까지의 청년으로 모병하였으나 기피현상이 심해지자 강제징집을 시행하여 민청대원과 장정을 집단적으로 입소시켰다. 장비는 초기에는 일제 38식 소총으로 무장하였으나 소련제 소총과 탄약을 확보하고 소련군 장교를 고문관으로 두어 조직적인 체계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2) 남한의 창군 과정


    1945년 11월 13일 공포된 군정법령에 따라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에 군무국과 경무국을 두고군무국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였다.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였다. 약 4개월간 110명을 임관시킨 후 폐교하였다. 최초에는 차수별 학생정원을 60명으로 하여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게 각각 20명씩을 배분하여 파벌이 조성되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광복군 출신자들은 국군이 광복군의 법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응모를 기피하여 학생의 대다수를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자들이 차지하였다. 총 임관 110명 중 광복군 출신이 2명,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이 108명이었다. 그 후 1946년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새로이 창설하고 군사영어학교에서 졸업하지 못한 인원들을 입교시켰으며 후에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정치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군 창설에 관한 어떤 공식적인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조선국방경비대는 군정법령(46.1.14)에 기초하여 2만5천 명의 경찰예비대와 해안경비대로 조직되었다. 창설 시‘불편부당’이란 구호를 내걸고 사상문제를 거론치 않음으로써 좌익사상을 지닌 이도 다수 입대하였다. 초기에는 일본군의 38식 및 99식 소총으로 무장하였는데 1946년 9월 이후 점차 미제 병기와 미국식 피복으로 교체해갔다.  1946년 3월 29일 군정청의 국무국을 국방부로 승격하였는데 이 점을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문제 삼자 국내경비부로 개칭하였다. 국내경비부를 한국 측에서는 통위부(統衛部)라고 불렀다. 군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독립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통위부장을 광복군계 인사로 천거하여 9월 12일에는 한국인 초대 통위부장에 유동렬 장군이 취임하였다. 통위부장의 취임을 계기로 미군은 고문관의 역할을 하고 한국인들이 지휘권을 잡았다. 경비대 총사령부를 비롯한 각 연대의 지휘권도 한국인이 행사 하게 되었다.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에서 점령군 철수문제가 제기되자 미군은 경비대를 5만 명으로 증원하고 필요시에는 포병화기 및 장갑차량을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남한의 치안유지능력의 개선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국방력을 증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조선경비대는 국군이 되었다. 국군조직법에 따라 군은육군과 해군으로 조직하되 통수권을 대통령이 장악하고 역종에 따라 정규군과 호국군(예비군)으로 구분하였다. 미국의 지원불가로 공군은 창설되지 못하고 육군에 항공부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