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38선 이남 양양 인근에서의 반공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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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영동지부 결성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청년들이 능률적으로 대공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로 1946년 11월 30일 설립되었다. 조국의 자주독립 쟁취, 균등사회 건설, 세계평화에 공헌을 설립목적으로 정하고 우익세력의 선봉 역할을 자임하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를 비롯한 38선 인접지역에 지부를 두었는데 1947년 6월에는 대전에 남선(南鮮)파견대 총본부를, 부산에 경상남도 본부를 설치해 남한 전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영동지역에서는 1946년 7월 21일 월남한 반공청년들이 유낙춘(한국전쟁 때 낙동강에서 사망)을 주축으로 한 24명이 친목도모를 명분으로 주문진에서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후일 서북청년회의 영동지부가 된다. 주문진에 본거지를 두고 서림과 인구 및 연곡에 분단을 두었다. 조직원들은 주로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출신이었다. 적지 않은 양양 청년들도 서북청년회에 가담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전투기록에서 알 수 있다.
‘김남흥은 양양 금풍리 사람이었고 이계화는 서문리 사람이다. 38선이 그어지자 둘은 월남하여 서북청년 영동지구본부에 들어가 활동하였는데 계림부대를 거쳐 호림부대에 들어가 5대대 대원으로 활동한다. 1949년 7월초 고향인 이북 땅 양양으로 잠입하여 사교리 마을을 정찰하던 중 그들이 사용한위조지폐가 인민군 보안대 요원에게 발각되어 결국김남홍은 사살당하고 이계화는 자폭하였다. 당시김남홍은 21~22살이었고 이계화는 20살 정도였다.’
서북청년회는 군사·경찰의 권한까지 행사하였는데 영동지방의 공산분자 및 38선 이북에서 침투하는 간첩을 색출하여 응징하는 것이 주요 임무이고 이북에 있는 반공청년들을 지휘하는 등 동해안 일대의 지하 공작도 시도하였다. 김세환(金世煥)은 경제 혼란을 목적으로 북한 지폐를 위조하기도 하였다.
위조지폐
나. 계림공작대(鷄林工作隊)와 호림부대(虎林部隊) 결성
북한의 게릴라 남파에 대응하여 북파공작을 할 것을 역설하던 서북청년회는 이범석 국방부 장관에게비밀유격대 창설을 건의하였다. 1947년 7월 서북청년회 강원도 횡성지부위원장 박만화와 기린지부위원장 박동학이 주도하여 영동지부에 계림공작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대북첩보수집 및 북한 내 지하조 직 구축 활동을 하였다.
남한정부 수립 후 계림공작대는 국방부 제4국과 연계된 동해특별유격대로 활약하였는데 남북 충돌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 군사고문단이 국방부 제4국을 해체시키자 1949년 2월 25일 국군 당국은 동해특별유격대를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로 이관시키고 명칭도 호림부대로 변경하였다. 월남한 청년들의 사설 군사단체가 국방부 관련단체가 되었다가 대한민국 육군 소속 북파공작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소속이 육군으로 이관됐다고 하지만 호림부대는 정식으로 편제된 정규부대는 아니었다. 호림부대원들도 대북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면 그때 정식 군인으로 전환시켜주는 어정쩡한 신분이었다.
호림부대는 서북 출신 367명을 기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과장 한왕룡 소령이 부대장을 맡아 출범하였다. 1949년 2월 28일 대구로 이동한 호림부대원들은 18연대에서 기본군사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훈련을 끝낸 부대원들은 수원의 육군수색학교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유격교육을 받았다. 당시 교관은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희성 소위였다. 훈련을 마치자 이들은 경상남도 거제도와 경상북도로 이동해 그곳의 지방 게릴라 토벌에 투입됐다. 일종의 실전경험이었던 셈이다. 호림부대는 5월 25일 서울로 귀환해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의 사열을 받았다.
호림부대는 4개 대대로 구성되었는데 제2대대는 서부전선을 맡고 있었고 제5대대와 제6대대는 북파공작을 하고 제3대대는 지원임무를 맡았다. 북파대대인 제5대대는 계림부대 후신인 동해특별대를 모체로 하고 제6대대는 오대산유격대를 모체로 하는데 두 개 대대 합쳐 252명으로 구성되었다.
다. 호림부대의 활약과 종말
호림부대 5대대와 6대대 대원들은 1949년 6월 23일에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 횡성을 거쳐 동부전선에 도착했다. 6월 29일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252명에 달하는 호림부대원들이 인민군복장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어둠 속을 조심스레 전진하여 38선을 넘어 300m 지점에 있는 고산봉에 도착하였다. 이후, 부대원들은 점봉산과 오색리를 지나 대청봉을 거쳐 7월 1일에 봉정암을 정복하여 그곳에서 자신들의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묻어 생무덤을 만들면서 결사의 의지를 다졌다.
호림부대의 목표는 원산과 평양을 잇는 평원선을 차단해 군수물자 수송을 저지하는 것이다. 원산을 통해 대거 유입되는 소련산 군수물자로 인해 북의 군사력은 남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빨리 저지하지 못하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질 것이고, 북측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호림부대는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북파된 것이었다. 험한 산지를 통과하는 평원선에는 터널이 여러 곳 있다. 5대대는 함경남도 고원으로, 6대대는 평안남도 양덕으로 진출해 터널을 폭파하고 철로를 파괴해서 군사물자 수송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군 수뇌부는 평원선을 교란하면 북한의 남침의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판단하였다. 현지의 반공인사들을 포섭해 장기 주둔할 예정이었으므로 호림부대는 남으로 귀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설악산에서 싸웠던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군사령부가 1965년 국립공원 설악산에 건립한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
1) 6대대의 활동
오대산유격대를 이끌며 태백준령을 넘나들던 김현주 대대장이 지휘한 6대대는 봉정암을 출발하여 백담사에 도착하여, 인제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체포해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7월 4일에는 용대리 내무소를 기습해 내무서원 3명을 사살한 뒤 소비조합에서 식량을 노획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위치가 파악되고 말았다. 곧 38경비여단과 인근 부대로 편성된 토벌대가 추격에 나섰다.
잠시 용대리 뒷산으로 철수했던 6대대는 토벌대의 규모가 연대 규모의 병력에 이르는 것을 확인한 뒤, 교전을 포기하고 후퇴하여 7월 7일에 인제군 서화리 가마골로 이동하던 중 북한군 연대병력과 교전하였다. 전투력 열세로 김현주 대대장은 전사하였고, 이영주 제1소대장 등 일부만 생존하여 탈출하였다.
2) 5대대의 활동
동해특별대를 이끌었던 5대대장 백의곤이 지휘하는 5대대원 120여 명은 군장을 정비하고 행군하여 7월 5일에 예정대로 화채봉에 도착하였으나, 현지 정보원을 통하여 이미 이 지역 일대에 경계령이 펼쳐졌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북한군의 수색을 피하려고 강행군을 하였는데 7월 8일 새벽 4시에 양양 강현면 상복리 핏골(皮谷)에 도착하여 김종모(金鍾模)와 김정배(金正培)의 집에 4일간 거주하면서 향후의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피로를 회복한 5대대원들은 별 어려움 없이 핏골 내무서 공격에 성공하여,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고 인민위원장과 보안대원 6명도 처단하였으며 신형무기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범구(李範九)의 신고로 한차례의 교전이 있었고, 속초애국동지회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원의 정보누설로 5대대의 행보가 북한군에 예상보다 빨리 발각되었다. 5대대는 쫓기는 신세가 됐지만 5대대는 쉽게 뒤를 잡히지 않았다. 치고 빠지며 북상을 계속 7월 9일에는 신선봉에 진격하였다. 12일에는 마산리에서 처음으로 토벌대와 맞닥뜨렸는데 1개 소대 병력의 북한군은 정예 호림부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교전 끝에 북한군은 8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했다. 이후 향로봉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교량 2곳을 파괴하고 트럭을기습해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7월 15일, 소양강의 발원지인 삼치령 전투에서 전력의 열세로 패한 뒤. 해발 1385m의 국사봉 삼각고지에 재집결하여 북한군 추격대와 용감히 싸웠으나, 대대장 백의곤이 7월 16일에 그곳에서 전사했다.
3) 호림부대 해체
252명의 대원 가운데 38선을 넘어 무사히 귀환한 대원은 5대대 23명, 6대대 12명 등 35명뿐이었다. 북한은 호림부대원 106명을 사살하고 44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했다. 포로가 된 호림부대원들은 1949년 8월 28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판을 받았고 모두 사형이 선고됐고 9월 11일 형이 집행되었다.
귀환한 호림부대원들 중 현역 편입을 원치 않는 대원들은 제대하고 나머지는 현역에 편입됐다. 이후 부대명칭이 육군본부 영등포학원으로 개칭되고, 부대장은 홍성준 소령이 부임했다. 1949년 9월 15일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으로 출동, 제3사단에 배속되어 보현산, 팔공산 등의 전투에 참여했다.
1950년 8월 18일 영등포학원이 해체되자 대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수도사단으로 전속되고 대대본부 요원들은 제3사단 수색중대로 배치됐으며 부대원들은 제23연대 제 1, 5, 9, 11중대에 배속되었다.
호림부대에서 곧바로 제대하였거나 작전 중 다친 대원들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정식 군인이 아닌데다 부대가 한국전쟁 이전에 창설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국가로부터 정당한 처우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나라로부터 외면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사망한 분들에 대한 공식적인 전사통지서가 북파 20여 년 만에 국방부로부터 발급되었으나 그들을위무하고 기념하는 전적비를 세우는 일조차 순탄치 못했다. 북침의 증거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당국에서 만류하였다. 생존한 호림부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꾸준히 노력한 결과 37년 만인 1986년 9월에 그들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호림부대 전적비가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건립되었다.
호림부대전적비 (통일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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