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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양양의 역사

    4.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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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남북한 사이의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지만 둘 사이의 충돌은 38선이 그어진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분단 초기에 미군과 소련군이 장악했을 적에는 상호 간에 자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고 소련군과 미군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자 인민유격대의 열 차례에 걸친 남파와 호림부대의 북파와 같은 비정규군들의 활동이 빈번해졌다.

    비정규군의 유격전뿐만 아니라 정규군들이 국경을 넘어 접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한국군 제11연대의 2개 중대가 개성 북방 292고지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진 적이 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양양 기사문리에서 두 차례 정규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다.


    제1차 기사문리 전투 : 1949년 2월에 인민군 2개 중대가 38선을 넘어 잔교리까지 내려와서 주민을학살하고 돌아갔다. 이에 제10연대장 백남권 중령은 즉각 보복 공격을 명령했고, 105㎜ 곡사포 5발을 기사문리를 향해 발사했다. 기사문리에는 북한의 해군기지가 있었는데 대한민국 육군 제10연대와 날카롭게 대치하던 곳으로 당연히 충돌이 잦았다. 포격은 총격과는 달라 자칫 전면전으로 치달을 위험이 크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놀란 나머지 재발 방지를 이유로 제10연대의 대포 조준경을 회수해 가버렸다.

    이 충돌을 제1차 기사문리 전투라고 부른다. 


    제2차 기사문리 전투 : 1949년 7월 4일 막 자정을 넘긴 시각에 동부전선 및 해안 일대의 경비를 담당한 강릉 제8사단 제10연대 연대장 송요찬 중령은 호림부대의 활동을 돕기 위한 양동작전을 위하여기사문리 공격을 계획 실행하였다. 대대장 고백규 소령의 명령을 받은 중대장 원선경 중위는 즉시 중대원을 인솔하고 38선을 넘었다. 중대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38선이라고 해봐야 표지판 하나 썰렁하게 서 있을 뿐 철책선 같은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근 주민들이 눈치를 보며 가끔 오가기도 했다. 하정광리와 상정광리를 거쳐서 기사문리에 이를 때까지 북한군은 눈에 띄지 않았고, 일찍 잠이 깬 어부들만이 놀란 눈으로 국군을 쳐다보았다. 기사문리 해군기지는 보초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채 경비가 허술하였다. 중대 장병들은 기습을 단행했고 놀란 북한군들이 도망가면서 해군기지는 수월하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 북한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중대 병력으로 적지 한복판에서 오래 버틸 수 없어 철수하였다. 이를 제2차 기사문리 전투라고 한다.



    가. 남침 준비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고 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 박헌영을 부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후 민주기지론(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이 혁명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북한을 먼저 혁명하여 민주기지로 만든 후 이를 거점으로 남한을 해방시켜 통일하겠다는 전략)을 내걸고 김일성은 소련 및 중공과 군사비밀협정을 맺는 등 남침을 준비한다.

    소련으로부터 탱크와 비행기 등 최신무기를 도입하고, 중국으로부터는 중국국민혁명군 제8로군 소속이던 3만 명 가까운 조선의용군 병력을 지원받아 인민군에 편입시켰다.(조선의용군은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무장단체로 팔로군 사령관 우팅(武亭) 산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김두봉이 교장이었던 조선항일군정학교가 사령부의 구실을 하였다. 김두봉(金枓奉)이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자 조선의용군은 그의 당군(黨軍)이 되었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과 한빈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는데 이들이 북한 연안파라는 정치 그룹이다.) 1950년 전쟁이 날 무렵에는 인민군이 속속 남하하였다. 당시 동해북부선은 평상시에 1일 2회 정도 기차가 오고 갔었는데 6월에 접어들면서 하루에 수도 없이 기차가 들락거리면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실어 날랐다. 그렇게 도착한 병력은 양양읍내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38선 접경지로 이동한 것이다.

    양양에서 포착된 북한군의 남침 준비상황은 다음과 같다. 북한군 제5사단 병력 일부는 함경남도 나남에서 동해북부선 기차를 이용하여 원산을 거쳐 6월 20일 양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양양에 있었던 제1경비여단을 보강하기 위하여 투입되었는데 5사단은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중공군에서 편입된 사단으로서 전투경험이 많은 사단이었다. 사단 예하 1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자주포 포대가 제1경비여단과 함께 양양을 중심으로 동해안 지구를 담당하였다. 1950년 6월 20일경 양양군 월리에 남침을 위한 탱크가 20여 대가 들어왔다. 당시 월리에는 아카시아 숲이 무성하여 탱크를 숨기기에 적합하였으며, 기갑병은 나뭇가지와 풀잎 등으로 위장을 하였다. 탱크는 22일경에도 20여 대가 더 들어왔다.

    상륙부대인 해군 제945육전대와 유격부대인 제766부대는 총참모부의 직접 통제로 운용되는 부대이다. 제945육전대는 원산에서 기차로 이동해 23일 양양에 도착하였으며, 24일에는 양양을 출발하여 강릉 정동진 일대에 상륙하기로 계획되었다. 제766부대는 6월 12일 회령을 출발하여 간성을 거쳐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제766부대는 주로 남로당원 및 강동정치학원 출신으로 편성된 유격부대로서 주 임무는 삼척 부근에 무장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국군의 퇴로 및 증원부대를 차단하는 일이었다. 

    제12연대도 함경북도 길주에서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기마병대는 양양중고등학교에 주둔하였다. 이밖에도 선무공작대가 활동하였고 편의대를 운영하여 첩보를 수집하였다. 

    요약하건대, 북한군 5사단은 양양-강릉의 해안도로 측선에 주력을 투입하여 북쪽에서 국군 제10연대를 정면 공격하고 제766유격부대와 제549육전대를 임원진과 정동진으로 상륙시켜 국군 제21연대를 차단함으로써 강릉을 남북으로 협공하려 하였다.

    동부전선에 배치된 북한군의 전투병력은 제1경비여단이 약 8,000명, 제5사단 병력이 약 3,000명,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가 약 3,000명 등 14,000명 정도였으며,  화력으로는 122㎜ 곡사포 4문, 76㎜ 견인포 24문, 76㎜ 자주포 4문, 45㎜ 대전차포 20문, 120㎜ 박격포 14문, 82㎜ 박격포 36문, 60㎜ 대전차로켓포 200여 문 등을 보유하였다.



    나. 동해안지역 남한군 현황


    제8사단은 1949년 6월 20일, 제6사단 예하 제10연대와 제5사단 예하 제21연대를 주축으로 강릉비행장에서 창설되었다. 제10연대의 38선 책임경계지역은 현북면 기사문리에서 진흑동(인제)까지 26㎞ 이었으며, 21연대는 예비대로 삼척에 배치되어 게릴라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제10연대 제1대대는 광원리에 대대본부를 두고 정족산(鼎足山, 869m)에서 서림리-쇠나드리(우탄리)-진흑동에 이르는 12㎞를 경계하였다. 연대의 우측 부대인 제2대대는 대대본부를 주문진에 두고 잔교리에서 대치리-명지리-장리-연화동-정족산을 연결하는 14㎞를 경비하였다. 

    사단 포병인 제18포병대대는 장병의 대부분이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교육수준이 높고 반공의식이 투철하였는데 무기는 105㎜ M-3포 15문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무렵에는 새로 도입된 GAT 사법(射法)교육을 위해 포대장 및 선임하사관급이 대부분 포병학교에 파견 중이었고 대대장도 육군본부에 출장 중이었다. 

    사단 공병대대는 창설 이래로 지역 내의 작전도로 및 교량의 설치 보수와 경비를 담당하였다. 게릴라침투예상로와 38선 경계진지 북쪽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주요 지역에 교통호와 진지를 구축하려 하였으나 자재와 예산 부족으로 3월경에 중단된 상태였다.

    제8사단의 병력은 6,866명이었으며, 장비는 105㎜ 야포 15문, 57㎜ 대전차포 12문, 81㎜ 박격포 24문, 60㎜ 박격포 38문, 2.36㎜ 로켓포 128문, 각종 차량 156대 등이었다.



    다. 남침 후 동부전선 전투상황


    양양에서 북한군은 전투대형을 2개 제대로 편성하였는데 제1제대는 경비여단 소속 7개 보병대대로, 제2제대는 제5사단 제10연대로 편성하여 두 갈래로 공격하였다. 경비여단은 귀둔리, 공수전리, 내현리, 기사문리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5사단 10연대는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전과를 확대하는 임무를 받고 양양 부근에 집결해 있다가 6월 25일 04:00 공격준비사격과 더불어 주력부대는 현북면 기사문리의 38°선을 돌파하여 주문진으로 진격하였으며, 조공격(助攻擊)부대는 양양 영덕리에서 서림리지역을 공격하고 원일전리를 거쳐 남대천을 거슬러 강릉 소금강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기습을 받은 국군의 동부지역 작전은 국군 제8사단이 북한의 경비여단과 제5사단 제10연대 그리고 제945육전대 및 제766부대에 맞서 6월 25일부터 4일간 강릉 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수세적인 전투를 벌였다.


    1) 주요 전투


    가) 잔교리~연화동 지역의 전투

    국군 제2대대가 담당한 이 지역은 24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경계진지 주변의 시계가 매우 불량하였다. 188고지(잔교리 서남쪽 2㎞)에 고요를 깨고 낙하한 일발의 포격을 신호로 동해안에서 연화동에 이르는 일대에는 포탄이 비 오듯 집중되었다. 기습적인 맹렬한 공격을 받아 전열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혼전의 회오리 속으로 말려들었다. 

    제2대대 본부에는 04:35에 북분리의 제7중대장 강응설 중위로부터“적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대는 물론 중대에서조차 이러한 적의 행동이 지금까지 자주 있었던 게릴라 침투를 위한 공격 정도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제5, 제6중대장으로부터 급박한 전황이 잇달아 보고되자 제2대대장은 적의 공격이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제2대대 대대장 조원영 소령은 제10중대에게 286고지(북분리 남쪽2.5㎞)를 확보하여 명지리-장리-연화동 일대를 경계하던 제5, 제6중대의 철수를 엄호하며 반격거점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연대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지자 후퇴하였다. 제10중대는 제7중대의 엄호하에 동해가도를 따라 철수하면서 인구리 주민의 피난을 돕고 매호 동쪽의 교량을 파괴한 다음 임호리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제7중대는 제8중대의 기관총소대와 81㎜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 적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향호리 북쪽에 진지를 확보하였다. 제5중대와 제6중대는 어성전리 부근에서 병력을 수습한 뒤 제5중대는 통신이 두절된 채 철갑령을 넘어 후퇴하였으며, 제6중대는 대대의 주저항선에 진입하였다.


    나) 정족산~진흑동의 전투

    이 지역은 국군 10연대 제1대대가 경계하던 곳인데 북한군 경비여단 제2보병대대가 서림을 돌파해 산간계곡을 따라 구룡령으로 급진하였다. 당시 제9중대는 중대본부를 하서림에 두고 3개 소대로 정족산을 경계하던 중 적의 공격을 받아 교전 중 중대장이 중상을 입었고, 적의 직사포 공격이 집중되면서 포위당하자 분산된 채 철수하였다. 


    2) 38°선 일대 국군 일선 지휘관들의 증언


    가) 제8사단 제10연대 제3대대 제10중대 최창주 소위 증언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대본부는 주문진에 있었고 우리 중대는 인구리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대가 38선 경비를 했다. 동해안 바닷가에서부터 대치리까지 38선 경비를 했다. 그곳에서 2개 소대씩 38선 경비를 교대로 나가곤 했는데 (중략) 25일 아침에 인구리 초소에 가만히 있는데 나팔소리가 들려와서 이상하게 생각되어 OP(작전상감시초소)에 올라갔는데 안개가 끼어서 20m 전방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분초에다 전화로 알아보니까 순간적으로 38선 앞까지 적이 접근했다는 것이다. 나팔소리가 들리자마자 들어온 것이다. 당시 진지 구축상태는 아주 미약했고, 철조망은 바로 진지 앞에 조금 있었고, 지뢰도 약간 매설되어 있었는데 비상용 소총탄도 하루 교전을 할 수 있는 양도 안 되었다.

    (중략) 중대본부도 저녁때까지는 지탱했다. 그때 적의 전차는 양양 쪽에서 내려오고 보병은 오대산을 타고 내려왔다. 우리는 고지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다가 보니까 적은 오대산 능선을 타고 먼저 내려갔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밤에 주문진 방면을 다시 공격했는데 적이 대병력으로 밀고 와서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사천 남방으로 철수했다. (중략)


    나) 제8사단 제10연대 제5중대 소대장 이홍진 중위의 증언

    우리 소대는 명지리 북쪽 고지 일대를 담당하였는데 적의 주요 접근 예상로인 탓인지 비교적 진지공사가 잘되어 있었다. 6월 25일 04:00경에 나는 명지리 마을의 소초본부(소대본부)에서 자고 있는데 포격에 놀라 깨었더니 282고지에 있는 제2화력거점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포탄이 전후좌우로 비 오듯 쏟아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투태세로 즉각 돌입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이번에는 133고지의 제1화력거점으로부터 적이 새까맣게 공격해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증강된 1개 소대를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20명의 예비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즉각 비상을 걸어 133고지로 출동하면서 어성전에 위치한 중대장 김동증 대위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중략) 05:00경으로 기억한다. 이때 적은 133고지의 화력거점을 탈취하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는데 출동하는 우리를 발견하자 2정의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병사들로 하여금 적을 저격토록 하여 이들을 사살하게 하고 즉시 교통호로 진입하였는데 이때 비가 약간 오고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적은 모두 술에 취해있는 듯하였다. 살금살금 접근하다가 안개가 바람에 날려 시계가 트이는 순간에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30분간을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렸는데 실탄이 거의 바닥나자 어찌할 길이 없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다) 제8사단 제10연대 제3대대 제11중대 제3소대장 정진화 소위 증언

    제10연대 제3대대는 연대 예비로서 주문진에 주둔하고 있다가 1950년 6월 22일경에 진흑동으로 이동하여 제1대대의 진지를 인수하려 했는데 진지교대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군의 남침을받았다. (중략) 

    보급 상황은 정상이었으나, 비상식량은 중대 본부에 비축하고 일선 소대는 개인당 건빵 3~4개 봉지씩 지급되어 있었다.(진지교대 며칠 전에 북한군 하사관 1명 귀순했는데, 그자는“북쪽에서는 건빵 1주일분을 각자에게 지급하고,  철원에는 전차가 집결하고 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탄약은 1기수 당 160발이 있었다. 진지를 인수한 날부터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새벽 사이에 적의 습격도 받고 우리가적 초소를 기습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 자고 밤에 근무했다. (중략) 6월 25일 이른 새벽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이날 새벽 우리 소대 정면에 박격포탄이 집중되고 소총 사격도 가해졌다. 그 당시까지 한 번도 이러한 적의 사격을 받아 보지 못한 까닭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중략) 적의 일부가 우리 소대를 견제하고 주력은 우측으로 포위하였는데 나는 38선 진지에서 1~2시간 방어하다가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쇠나드리로 철수했다. 통신이 두절되어 우리 중대는 적정도 아군 상황도 모르는 속에서 쇠나드리에 집결하여 있다가 이날 어두워질 무렵 철수를 개시하여 갈천리-구봉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재편성한 후 2~3일간 남하하여 영월에 도착하였다. (중략)


    3) 남한에서의 북한 동원령


    전쟁이 진행 중인 1950년 7월 1일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점령지역을 포함한 전지역에 걸쳐 1914년~1932년 사이에 출생한 (18~36세) 사이의 전체 공민을 동원한다는 내용의 전시동원령을 공포하

    였다. 북한의 인력 동원은 보충병 및 신설사단에 필요한 의용군, 보급품 수송을 위한 노무단, 그리고 점령

    지역의 치안을 담당할 치안여단에 필요한 인력, 이외에도 파괴된 시설, 도로, 철로, 교량 등의 복구를 위한

    노무 동원을 실시하였으며, 북한군을 위한 식량, 옷감, 연료 등의 물자동원을 실시하였다.

    남한점령지역 내에서의 의용군 동원은 3단계로 나누어져서 실시되었다. 7월 1일~6일 사이에 실시된

    제1단계에서는 감옥에서 풀려난 좌익계 정치범과 자칭 공산주의자 그리고 북한에 동조하는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북한이 설정한 목표만큼 의용군의 지원 숫자가 미치지 못했다. 이에 7월 10일경 북

    한은 각 인민위원회, 기업체, 학교 등에 징집대상 숫자를 할당하는 강제성을 띤 방법으로 제2단계 징집을 실시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전투가 치열해지고 북한군의 보충병이 절실해지자 8월 초부터 북한

    당국은 불법적이고 무자비한 제3단계 징집방법을 실시하였다. 이 단계에서 좌익계 단체(민청, 노동동

    맹 등) 회원들을 동원하여 거리의 요소에 배치시킨 후 통행인들을 검문하고 가택수색도 실시하여 장애

    자가 아닌 17세~45세의 모든 남녀들을 현장에서 징집하였다.


    4) 유엔군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이 있자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UN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 북한군 격퇴를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연합군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하루만인 1950년 6월 26일 04

    시(한국시간) 유엔은“북한군은 즉각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는 결의문을 채택

    하였으며 한강철교 폭파 직후인 28일 04시(한국시간)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였다. 유엔의 신속한 참전

    결정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우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제24사단을 7월 1일 이동하여 7월 5일부

    터 한국전에 투입하였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결의안을 7월 7일 채택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통합사령부의 발족이 이루어진 것이다. 유엔은 미국에게 유엔군사령부

    설치와 사령관 임명권한을 부여하고 유엔기 사용을 승인하였다.  

    한국정부도 유엔의 7.7결의에 따라 국군의 작전권 이양문제를 검토하였는데 7월 13일부터 한국 육

    군본부가 미 제8군사령부와 합동회의를 가짐으로써 합동작전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은 1950년 7월 15일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는데 이를

    근거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7월18일부터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겨졌다.  7월 24일 정식으로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일본에주둔하고 있던 미군 3개 사단 중 제24사단에 이어서 제25사단, 1기병사단이 부산과 포항으로 7월 22

    일까지 이동하여 참전하게 되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으며 9월 28일 북한에게

    빼앗긴 수도 서울이 탈환되었다. 


    5) 제1차 38°선 돌파와 국군의 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동부전선에도 반격이 시작되어 1950년 9월 30일 국군 제3사단은 울진 삼척 강릉을 거쳐 38선에 인 접한 인구리(인구리는 해방 전에는 양양군에 속했는데 후에 강릉군으로 편입된 양양의 남쪽 마을임)에 도착하였는데 38선 돌파여부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토통일이어야만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어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을 피력하면서 38선 돌파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는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다음 날 모든 부대에 진격을 멈추도록 명령했다. 이에국군도 38선에 정지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38선을 돌파해 북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일권 총장은 유엔군과의 지휘체계의 마찰을 피하려고 워커 장군에게 국군의 특수한 전술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동해안 38선의 바로 북쪽 고지(하조대 부근)를 점령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해 동의를 얻었다. 38선 진격이 결의되자 제1군단장은 1950년 9월 30일을 기하여“제3사단은 현재까지의 추격을 계속하여 양양을 점령 확보하는 동시에, 수도사단의 38선 이북 진출을 용이하게 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린다. 제3사단 제26연대는 삼척에서 LST로 출항하여 주문진에 집결 중이었다. 38선 돌파를 앞둔 이날 제3사단이 북진 준비를 완료하였을 때, 수도사단 제18연대는 38선 남쪽 2㎞ 지점 서림리로 진출하여 서림~양양가도를 따라 양양의 서측방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10월 1일 05:00경 제3사단은 제23연대를 선봉으로 역사적인 38선 이북에 대한 진격을 개시하였다.

    양양에 있던 북한 인민군 제5사단의 저항을 제압하고, 그날 10시경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였는데 분단 후 처음 공식적으로 38선을 돌파한 것이었다. (그런데 속초시의회 의원 역임한 최창영 님의 진술에 의하면 9월 28일에 이미 국군이 속초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조우언라이(周恩來)가 9월 30일에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보를 보내어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방관할 수 없는 사태’라고 항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38선을 넘는 순간 주민들은 구겨진 태극기를 펴들고 북진하는 국군에 환호했다. 정부는 이날을 기념하여 1956년 9월에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였다.

     

    201_1.jpg

    10월 1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 38선 돌파


    6) 북진


    미국 정부는 9월 11일에 소련과 중공이 개입할 위험이 없으면 38선 이북에서도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하는 합동참모본부의 지령을 맥아더에게 보냈으나 유엔에서는 유엔군의 북진에 대한 찬반양론이 펼쳐지고 있었고 한국군은 미군의 동의하에 10월 1일에 38선을 넘어 북상하였다.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는 한반도의 통일과 부흥에 관한 결의에서‘유엔은 한반도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유엔군의 행동은 한반도의 어느 부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명시하였다. 이로써,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락되었고, 이 날짜로 유엔군의 북진도 본격화하였다. 그동안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한국 제1군단은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미 제10군단이 상륙하여 한국군을 지원하였다.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미 제8군단은 10월 20일에 평양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전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로 북상하였다. 


    7) 중공군 개입


    중공은 일찍이 유엔군의 38선 진격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1950년 10월 9일 북경방송에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허용한 10월 7일의 유엔결의는 위법이며, 미군의 북한 진입은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위협이고 중공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15일 트루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웨이크에서 회담하였는데 맥아더 장군은낙관적이었다. 중공은 본토를 통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타이완(臺灣)문제를 안고 있는 중공이 한국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았으며, 중공은 공군력을 보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입할 경우 최대의 손실을 볼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맥아더의 낙관론에 만족한 트루만은 유엔군이 조만간 전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리라 확신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웨이크회담 직후 중국은 이른바‘의용군’이라는 이름의 병력 3개 사단 이상을 한국전쟁에 투입하였다. 10월 24일 국군 제6사단이 청천강 상류 운산에서 중공군으로 보이는 적군에 의하여 포위되었고, 미 제1기병사단도 그달 26일에 포위당해 고전하였다. 미군은 청천강 남쪽까지의 후퇴를 명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11월 21일에는 압록강 연안인 혜산에 이르렀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개입을 우려하였지만 압도적으로 우세한 공군력으로써 중공군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압록강 유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미 공군사령관인 스트라이트 마이어(Strate Meyer, G. E.) 장군에게 압록강다리를 폭파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일시 주춤하였던 연합군은 11월 24일에는 다시 압록강을 향해 본격적으로 진격을 재개하였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압록강 연안의 진격은 한국군에게만 맡기고 나머지 유엔군은 국경까지는 이르지 말고 북동부지역은 청진에서 진격을 멈추도록 제안하였으나 맥아더는 이에 불복하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8) 1·4 후퇴


    유엔군의 진격이 다시 시작된 직후인 11월 25일과 26일에 중국군이 18개 사단, 20만 명이 넘는 막대한 병력으로 서부전선을 공격해 오자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12월에는 평양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원산·흥남선에서,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후퇴하여 30도선 근처에서 머물렀다. 압록강 진격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안전하게 후퇴하느냐가 문제였고, 맥아더에 대한 비난은 높아졌다. 혹한과 고전 속에서 흥남철수가 12월 24일에 완료되었다.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12월 26일에는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퇴각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중공이 동조한다면 38선에 따라 휴전하는 것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공에 대한 전면적 대응을 주장하였다.  1951년 1월 초 중공군은 주요 공격방향을 서울에 두고 철원·연천 방향에서 압박하였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방어가 어렵게 되자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Ridgway,M.B.)중장은 중공군의 포격사정권에 들기 전에 주력부대를 철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서울에서는 60㎞ 남쪽의 오산으로, 동해안에서는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하였다. 한국정부는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 

    흥남에서 선박으로 철수한 국군 제1군단은 12월 18일 묵호(수도사단)와 울진(제1군단)에 상륙한 후 12월 23일에 강릉으로 이동하여 지휘소를 설치하였고 수도사단을 주문진에 배치시켜 적의 남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일부는 인제군 현리와 오대산지구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밀려 영월로 철수하였는데 동해안지역 38선 상에 설치된‘C방어선상’에서 인접한 제3군단과 호응하여 황우선(黃牛線, 삼척~영월선)으로 반격할 계획이었다. 

    양양에 제1연대(한신 대령)를 진출시켜 수여리, 장승리, 금풍리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게 하였으나 북한군은 해안선을 피하여 아군의 방어력이 취약한 산악지역을 택하여 유격부대를 침투시켰다. 극소수의 병력으로 잔무를 정리 중이던 국군이 서림지역에서 기습 공격당하면서 적에게 38선을 다시 내주었다.


    9) 38°선 재탈환


    한국전쟁의 휴전을 위한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1951년 1월 13일의 정치위원회가 정한 한국휴전5원칙이 중공에 의하여 거부당하자 1월 25일부터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며 전진을 계속하였는데 2월 10일에는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유엔총회는 2월 1일에 미국의 제의로 중공을‘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유엔군의 작전이 주효하면서 다시 38선을 돌파하고 제공권을 장악하자 유엔군이 유리한 조건으로 교섭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 트루만 행정부는 전세를 관망하였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1951년 2월 21일 나진에 대한 폭격금지를 명하고, 3월 1일에는 다시 압록강 연안의 중국의 발전시설에 대한 폭격도 금함으로써 맥아더에게 제한적인 전쟁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맥아더가 추구하는 승전 군사전략은 트루만이 원하는 협상 외교전략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맥아더는 4월 11일 해임되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릿지웨이(Ridgway, M. B.) 제8군사령관을 임명하였다.    1·4후퇴는 전쟁 발발 당시 대책 없이 밀리던 것과는 달리 미리 준비되어 있던 유엔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3월 중순 서울을 다시 수복하였다.  1951년 3월 이후 국군의 반격작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은 경강국도(서울-강릉 간)에서 양양-현리를 연결하는‘카이로선’으로 진출하였다. 이 무렵 험준한 태백산맥을 따라 북상하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두 군단의 후방지역으로 접근하자 먼저 이들을 소탕하였다.  3월 18일 제1군단장은 양양을 탈환하기 위하여 수도사단에게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때 인민군 제69여단도 양양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악으로 연결된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에 거점을 확보하고 국군 수도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국군은 동해안에 배치된 미 함정의 화력 엄호 아래 적의 진지를 격파하고 양양 남쪽의 어성전리-명지리 선으로 진출하였다. 인민군은 극력 저항하였으나 미군의 집중적인 포격으로 역부족이었다. 

    육군본부는“제1군단 및 제3군단은 3월 25~26일 공격하여 책임 지역 내 카이로선을 확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제1군단 수도사단은 양양을 점령하였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3월 26일, 우암리-노고봉선에 구축한 적군의 최후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적은 방어선이 돌파되자 남대천을 넘어 양양 북쪽의 고성군과 한계리-인제로 통하는 설악산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제3군단 제3사단은 3월 25일 현리-서림 도로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은 인제 현리와 동해안의 전술적 요충인 양양을 잇는 전선을 확보하였다.


    10) 공산군 춘계공세(春季攻勢)와 중공군 퇴각


    1951년 4월에 접어들면서 공산군은 7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방이 되풀이되면서 전투는 격렬해졌으나 미국 정부가 제한적인 전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가) 설악산(雪岳山)지구 전투

    1951년 3월 국군이 양양지역을 재탈환한 후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5월에 들어서면서 설악산지구에서 격돌한다. 당시 북한군 제6사단과 예하의 제1연대, 제5연대와 제15연대 그리고 제12사단의 제2연대가 설악산 일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작전을 폈는데 120㎜, 82㎜ 박격포, 중기경기, 무반동총 등 화력을 보유하였으며 보급도 원활하게 이루어져 전투력이 막강하였다. 이들은 국군의 후방이나 보급 차량 등을 기습 공격하여 북진을 방해하고 국군의 전투력에 타격을 입혔다.  1951년 5월 1일, 국군 제1군단은 예하 수도사단과 보병 제11사단을 중심으로 이들을 궤멸시키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 5월 7일부터 13일까지 실시된 작전 기간 중 날씨는 비교적 청명하였으나, 야간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거나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어 관측에 어려움이 있었다. 잔설이 남아 있는 지역도 있어 작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 설악산 남부 전투

    국군 제1군단은 5월 1일부터 6일까지 치밀한 공격준비를 마치고 5월 7일부터 13일에 걸쳐 가리봉을 포함한 설악산 남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승전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교전 끝에 적을 체포 섬멸하여 가리봉을 점령하였고, 자양전 서남방에서 적을 섬멸하여 대승령 서남방 능선 일대를 확보하였다.


    ▷ 설악산 동북부 전투

    국군 제1군단 제11사단은 간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5월 1일 지휘본부를 양양 하왕도리에 두고 준비하였다. 주력이던 제9연대 제1대대는 화채봉 일대에서 출발하여 신흥사, 설악산 비선대에서 교전하던 중 실탄이 떨어져 퇴각하였고, 제2대대도 봉포리와 학사평 일대에서 적과 약 31시간 교전하였으나 탄약과식량의 보급이 끊긴데다가 적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여운포리로 퇴각하였다. 


    나) 중공군 5월 공세 실패와 후퇴

    유엔군의 함포와 항공 포격에 두려움을 느낀 중공군도 증원부대의 투입을 망설이게 되었다.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5월 21일 공격 중지를 결정하고 후퇴를 지시하였는데, 화천저수지를 동서로 연결하는 선이 그들의 철수한계선이었다.


    다) 양양~간성 진격전

    국군 제1군단의 일부 병력은 5월 27일 양양을 무혈 점령하였다. 이 무렵 인민군 제2군단 제13사단은 한계령~원통 선에 배치되었고,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마등령~미시령 선에 투입되어 철수하는 중공군과 인민군을 엄호하였다.

    국군 제11사단은 설악산 일대를, 수도사단은 간성을, 제13사단 제18연대는 남설악 가라피~마산리 일대를 공격하여 29일 동틀 무렵에 시작한 작전이 4시간도 안되어 끝났고 이로써 간성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라. 전쟁 중 양양주민들의 고충


    1) 주민 간 갈등


    가) 지방 빨갱이

    38선 이남 현남면 사람들은 북한이 남침할 때 거의 피난을 갈 수가 없었다. 인민군의 진격이 빨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잠시 피난갔던 사람들도“우리는 인민을 해방시키러 왔기 때문에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인민군의 말을 듣고는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말대로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큰 해를 끼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내무서원과 이들의 지령을 받는 세칭 지방빨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흰패(북한공산당 편을 드는 사람을 빨강패라 불렀는데 그와 대칭되는 말로 남한정부 편을 드는 사람을 흰패라 불렀다)들에게 온갖 악독한 짓을 하였다. 


    나) 작은 모스크바

    강현면 하복리에서는 좌익계 청년들이 날뛰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모스크바 축소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좌익들은 마을을 공산화하기 위하여 갖은 수법을 다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김창수와 이선영은 반공활동에 열을 더하였다. 1950년 10월에 국군의 진격하여 오자 두 사람이 주민들을 모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며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그 후 국군을 등에 업고 공산분자들에게 받은 만큼 상대방에게 보복하였다. 

    그러나 전선이 다시 바뀌어 1·4후퇴 시 김창수와 이선영은 월남하고자 하였으나 38선이 막혀 피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도피하였던 공산분자들이 돌아와 김창수가 한 사실을 듣고 격분하여 김창수와 이선영을 마을회관에 가두어 철사로 손발을 묶어 놓고 죽도록 매질하여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다. 이후 국군이 반격하여 북진하자 움직이지도 못하는 두 사람을 방공호 속에 처넣고 총살하였다.


    다) 강선리 이근우(李瑾雨)의 죽음

    1950년 10월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자 후퇴하던 김무정의 북괴군이 강선리 인민위원회에 와서 모든 주민에게 간성읍까지 피난할 것을 명령하자 주민들 거의가 북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반공청년들은 산중에 피신하였다가 국군이 남대천을 건너 북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3일 17:00에 하산하여 귀가하였다. 이날 이근우, 김장연, 김흥기, 이상호, 손동인, 신귀남 외 3명은 마을회관에 집합하여 국군입성을 환영할 태극기를 만들고 마을 자치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는데 이때 북한 패잔병 4병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태극기 제작 사실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처하였다. 

    이상호가 북한 패잔병이 출현한 사실을 국군 백골부대에 신고하여 1개 분대가 출동하여 반공청년들과 패잔병이 모인 마을회관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반공청년 이근우는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신기남은 부상당하였으며 신원미상의 30세가량 되는 청년도 사살되었다. 야간전투로 피아(彼我)의 구분이 안 되는 통에 주로 반공청년들이 희생되었다. 다음날 이근우는 강선리에서 장례를 치렀다.


    라) 갈등을 피한 원포리

    주민 사이에 극렬한 분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용민이라는 사람이 원포리의 인민위원장을 했다. 사람들을 매일 저녁 모아서 자아비판도 하고 연극 등을 하면서 사상교육을 시켰다. 이용민의 밑에서 일을 도와주던 최돈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농사꾼으로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6·25 이전에 순경한테 맞은 일이 있었는데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억눌렸던 앙갚음을 하려고 함부로 행동하자 “지금은 이북 정치이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니 행동을 조심하라.”고 이용민이 나서서 타일렀다. 이용민의 충고를 받아들인 최돈배는 행동을 고쳤고 나중에 국군 수색대가 들어왔을 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남한에서 이장이나 반장을 하던 이들이 자아비판 후 처벌받게 되었을 때 이용민이 나서서 이장 반장을 한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을을 위해 한 일이니 그게 무슨 큰 죄냐고 하여 가벼운 처벌로 무마시킨 적도 있었다. 그래서 원포리는 좌우의 갈등이 거의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이용민 자신도 국군 수색대가 들어왔을 때 이런 일들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2) 군대의 횡포


    가) 적은리 김남형 김학래 부자의 죽음

    김남형은 양양 강릉 지역에서 뛰어난 문인으로 성격이 온후한 인물이었는데 인공치하에서 공산 통치를 반대하다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진격하자 김남형의 장남 김학래는 적은리 이장과 강현면 한청단장을 맡아 반공활동을 하였다. 그 후 두 사람 다 1·4후퇴 때 미처 피난가지 못하였다.  김 씨 부자는 1·4후퇴로 인민군이 다시 들어오자 인근 마을의 공산당원이 적은리에 주둔하는 인민군에게 밀고하여 잡혔다. 인민군은 김 씨 부자를 끌어다가 마을 창고에서 인민군 중령이 주재하는 인민재판을 하였는데 주민이 보는 앞에서 극렬세력들이 달려들어 곤봉 등으로 난타하여 김남형은 1951년 음력 2월 7일 즉석에서 사망하였고 아들 김학래는 속초까지 끌려가서 동명동 방공호에 감금당해 열흘이상을 매일같이 고문당하였다. 논산에 있는 외가에서 이 소식을 듣고 찾아가 면회를 청하니 집으로 데려가라 하여 거적으로 만든 들것에 실어 집에 돌아왔는데 이틀만에 사망하였다.


    나) 주민 기만

    1·4후퇴 때 강현면 전진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북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인민군들이 있었다. 좌익사상을 가진 몇몇 이들이 그들을 환영하였다. 인민군은 마을에서 그들을 진실로 환영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다면서 마을회관에 좌익사상을 가진 이들을 모두 모이라고 했다. 예전에 공산당 통치를 겪어본 이들은 좌익이 아니더라도 나가서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그렇게 하여 다 모이자 인민군들은 총을 발사하였다.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몰살당했다. 국군이 인민군으로 위장한 것이었다. 후퇴하는 길에 좌익들이 인민군을 환영하니 이 기회에 좌익분자를 하나라도 더 없애고 갈 요량으로 일을 꾸몄던 것이다.



    마. 전쟁 중 양양주민들의 반공활동


    1) 면옥치리 공비 토벌


    군정이 실시되던 1952년 3월 19일 15:00경에 공비 10여 명이 면옥치리 산간에 출현하였다는 정보를 어성전 지서에서 입수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지서장 한용겸은 순경 김정운과 전호길에게 한청원(韓靑員)을 대동하고 즉각 출동할 것을 명하였고 두 순경은 20명을 소집하여 공비 토벌작전에 출동하였다. 한청원들은 방한장비와 식량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입은 옷 그대로 총을 메고 순경의 뒤를 따라 면옥치리 현장에 도착하였다. 

    공비를 찾아 매봉산 일대를 헤매는 사이에 해는 지고 갑자기 날씨가 흐렸으며 지척을 분별치 못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리면서 눈보라까지 쳐 오지도 가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지원은 고사하고 후방과의 연락이 끊어져 21명 모두 2척(尺)이 넘는 눈 속에 쪼그려 앉아 쓰러져 ‘물레방아 골’에서 순사하였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자는 19세의 조준기뿐이었다.

    그다음 날 지역주민들이 출동하여 눈 속에서 시체를 찾아 동사 앞에서 장례를 치렀다. 순직경찰관 김정운과 전호길은 경찰장(警察葬)으로 하였는데 김정운의 묘소는 어성전 산기슭에, 전호길의 묘소는 현남면 동산리 선영 옆에 있다. 단원 서장열 외 18명은 순경으로 추서(追敍)되었다. 생존자 조준기는 충격과 정신적 후유증으로 얼마 후 사망하였다.


    2) 영덕리 공비 토벌


    1953년 11월 15일 강원지구 연락총책 공비 2명이 서림지서에 자수하였다. 이들은 인민군 연락조원이 영덕리 딴 빈집에 잠입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서림지서장 권영열 경사는 순경 한병열과 김호규 두 사람에게 토벌작전에 임하도록 하였다. 두 순경은 한청원 소속의 김연수, 김성기, 정연식, 이경수, 윤봉래, 이대영과 자수한 공비 1명을 인솔하여 현장에 도착하여 집을 포위하고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하얗게 눈이 깔린 우물길에 발자국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접근해갔다. 

    마침 방안에서는 공비 2명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중 1명이 밖으로 나왔는데 이대영 대원이 생포하려고 공포를 쏘면서 “손들어”하고 소리쳤더니 공비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소지하였던 M1소총과 M2칼빈총으로 응사하였다. “포위되었으니 자수하라”하고 권고하였으나 끝내 반항하므로 그중 1명을 사살하였으나 다른 1명은 부엌쪽으로 도주하면서 발악하였는데 추적에 나선 대원들은 논둑 밑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암호연락문이 나와 공비토벌 작전에 크게 활용하였다. 이 작전에서 김연수 대원은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