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해방에서 민정 이양(移讓)까지의 사회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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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구
양양군의 인구는 1944년에는 84,112명, 1946년에는 65,371명이고 전쟁 중인 1952년 6월 말에는 63,316명으로 지속적인 감소추세를 보인다. 1952년 6월의 인구는 원주민 37,415명과 철수민 25,901명으로 구성되었다.
강점기인 1944년에서 북한통치 하인 1946년 사이에 19,000명에 가까운 인구가 감소한 것은 38선 이남인 현남면 전체와 현북면 일부와 서면 일부가 해방 후 양양군에서 떨어져나간 영향도 있겠지만 이 기간 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것도 인구감소의 원인이 될 것이다. 1946년에서 1952년 사이에 총인구는 2,400명 정도 줄었지만 1952년의 원주민수(1946년의 인구 전체를 원주민이라고 볼 때)는 1946년에 비하여 27,956명 대폭 감소하였다.
나. 교육
양양의 교육기관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에 재건된 양양향교와 조선 인조 6년(1628년)에 세워진 사립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동명서원(東溟書院) 및 동리마다 설치되었던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은 개화정책에 따른 외교 통상관계상 필요에 의한 것으로 고종 20년(1883년)에 통역관 양성을 위해 동문관(同文館)을, 고종 23년(1886년)에 근대적인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園)을 설립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양양지역의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6년 7월에 개교한 현산학교를 들 수 있다.
현산학교는 양양군수로 부임한 남궁억이 일부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설립한 사립학교인데 무상으로 공책과 연필을 공급하였고 4명의 교사가 영어와 음악, 산수와 역사, 일어와 체조 및 국문과 한문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교과내용으로 볼 때 현산학교는 초등과 중등과정을 망라한 것으로 양양초등학교와 양양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된다고 하겠다. 1년이 채 안 되어 학교가 화재로 없어지는데 1910년에 부임한 군수 최종락은 소실된 현산학교를 새로 지었다.
일제의 한국식민지 교육정책은 그들의 식민통치를 실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한국인을 일본제국에 신민화 시키려는 비교육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11년 4월 1일 사립이던 현산학교를 4년제의 양양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였다. 그 후 일제의‘1면 1교’지침에 의거 대포보통학교(1919년), 인구보통학교(1922년), 현북보통학교(1931년), 상평보통학교(1934년), 강현보통학교(1933년), 손양보통학교(1934년), 현성보통학교(1934년), 강현부설 회룡간이학교(1937년), 화일공립국민학교(1940년), 임호간이학교(1941년), 적은공립국민학교(1942년), 현서공립국민학교(1942년), 조산공립국민학교(1944년)가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양양보통학교가 6년제로 개편되었다. 현재의 중등실업교육에 해당하는농업계의 양양공립농민학교가 1932년 1월에 양양군 강현면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수업연한이 1년이었다.
옛 현산학교 터 (군행리)
1) 공산치하의 교육
북한의 학제는 소련식을 모방하여 인민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기술전문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 대학교 4년의 5-3-3-4 학제였다.
가) 초등교육
1945년 국민학교를 인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일제식 교육제도를 고쳐 초등교육 연한을 6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였다. 이로 인해 옛날 제도하의 1~4학년까지의 학생들은 1947년 9월 1일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신교육제도에 의하여 한 학년씩 진급하게 하였고, 인민학교에 등록된 5학년과 6학년생은 새 학기부터는 중학교 1학년 및 2학년으로 진급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양양인민학교의 교육상황은 다음과 같다. 양양인민학교는 광복 전까지는 학년 당 3개 학급이었는데 광복 후에 간이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많이 들어와 4학급씩 총 20개 반으로 학급당 학생 정원은 60명이었다. 입학연령은 7세이며 소련군이 들어와 양양인민학교를 그들의 병사로 사용했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 2부제 수업을 하였다. 북조선인민공화국 교육국에서 교과서를 편찬하여 배부하였으며 교과는 공민, 국어, 문학, 산수, 리과, 지리, 역사, 체육, 음악, 공작 등이었다. 1시간 수업은 45분이었고, 김일성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많이 가르쳤다. 학급별로 방과 후에 자아비판회의를 하였고 매주 토요일에도 전체 자아비판회의를 하였다. 과외활동으로 소년단이 있었다. 노동절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원이 참여하여 시가행진을 하는 등 대대적인 행사를 하였다. 학년은 9월 1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8월말에 종료되었다.
나) 중등교육
1946년 9월에 양양에 중학교 과정이 개설되어 1학년과 2학년을 동시에 모집하였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인민학교의 학제가 6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면서 생긴 일시적 현상이다. 1947년 9월 다시 학제가 변경되어 중학과정이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로 분리되었는데 1946년 중학교 3학년으로 들어간 이들이 1947년 9월 고급중학교 1회가 되는 등 어수선하였다.
남자중학교는 1946년에 현재의 양양중학교 자리인 양양읍 서문리에 설립되었고, 여자중학교는 현 도서관 앞(양양읍 군행리.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만 다니던 양양서소학교 자리)에 설립된 뒤 1년 뒤인 1947년에 양양군 서문리로 이전하였다. 3년제로 학급당 인원은 60명 내외였으며 남·녀 학교 각각 3 학급으로 교과목은 지리, 역사, 세계사, 수학, 기하, 국어, 영어(1년 후부터는 러시아어), 물상, 화학, 음악, 체육, 미술 등을 가르쳤는데 지리나 역사 시간에는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통합하여 수업하였다.
이 학교들은 1950년 6월 25일 이후 폐교되었다. 현북초급중학교는 1948년도 하광정리 205번지 부근에 설립되어 38선 이북 인근지역인 기사문리, 상광정리, 중광정리, 하광정리, 손양면(여운포리, 상운리, 동호리)를 학구로 15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1950년 추석날, 학교 뒷산(하광정리 산66번지)에 대공화기를 설치한 북한 군인들이 미군전투기에 총격을 가하자 전투기 4대가 편대를 이루어 폭격을 가하던 중 중학교 건물도 폭격당하였다.
강현초급중학교는 일제강점기 농민학교 건물(강현면 장산리)을 사용하였다.
남자고급중학교는 군행리(현 도서관 자리)에 있던 2층 건물 중 1층 사용하였고, 여자고급중학교는 군행리(현 도서관 자리)에 있던 2층 건물 중 2층을 사용하다가 약 1년 후에 서문리 현 양양여자고등학교 자리로 이사하였다. 남녀 학교 각각 1학급씩이고 학급당 인원은 50여 명이었으며 교과목은 국어, 지리, 역사, 세계사, 수학, 영어(1년 후 러시아어), 음악, 미술, 체육, 물상, 화학 등이 있었다. 당의 사상교육은 훈육주임이 맡아서 하였다. 고급중학교는 남녀 각각 양양군에 하나뿐이었으므로 당시 양양군이었던 지금의 고성군 죽왕면 학생까지 양양으로 등교하였다. 기숙사에 입사하거나 동해북부선 기차를 이용하여 등하교하였다.
인공시절의 양양초급중학교와 양양고급중학교 학력은 현재 인정되지 않는다.
2) 수복후의 교육
한국전쟁 초기에는 수업이 계속되었으나 전쟁 이 점차 치열해지고 교사들이 군에 입대하면서 1950년 8월경부터는 등교할 수 없게 되었다.
1950년 10월에 수복되고 각급 학교가 개교하였으나 1951년 1·4후퇴 때 많은 학교가 소실되었다. 1951년에 다시 수복 개교하여 1군단 민사처의 지도하에 교육이 재개되었다. 1951년부터 1954년 군정기간 중에 송포(1951년), 한남(1952년), 상운(1953년), 남천(1953년)의 4개 국민학교가 새로 설립되었고 1951년에 양양중학교가, 1952년 6월에 속초고등학교가, 1953년에 양양고등학교가 각각 개교하였다. 양 양고등학교는 개교할 때 1학년과 2학년 과정을 동시에 개설하여 속초고등학교에 다니던 2학년 학생들이 전학 올 수 있게 하였다.
양양명륜중학원은 양양향교에서 재단법인(財團法人)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사립중등교육기관으로 및 1954년 3월에 학생 56명을 모집하여 개교하였으며, 1955년 2월 정식 중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이 학교는 학교 운영난으로 1973년 2월, 18회를 끝으로 총 졸업생 841명을 배출하고 폐교되었고 그 후 양양명륜중학기술학교로 전환하였는데 1979년 8월 폐교되었다.
양양초등학교 행사에 참여한 1군단 민사처 간부와 사친회 임원
양양명륜중학원인 명륜당
3) 교육자치제의 도입 및 운영
양양군은 1951년 수복과 동시에 양양군 자치위원회에 학무과를 두었는데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군정체제에서 민정으로 이관되면서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었다. 교육감은 양양군수가 겸임하고 학무국을 군수 산하에 두었다.
1957년 7월 1일 양양군교육청사가 준공되어 별 도의 청사에서 교육행정 업무를 보게 되었다.
1962년 1월 6일부터 시·군단위 교육자치제가 폐지(법률 제955호)되어 양양군청에 교육과를 두고 교육행정을 관장하였다. 1964년 1월 1일을기하여 도단위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자 양양교육청에서 속초교육청이 분리되었다.
당시 양양군교육청사
다. 양양군 행정구역의 재편
일제강점기인 1919년 간성군이 폐지됨에 따라 토성면과 죽왕면이 양양군에 편입되었다. 8·15광복 후 38선으로 인하여 현남면과 서면의 일부가 강릉군에 속하였으며, 군정기간인 1951년 속초면이 속초읍으로 승격되었다.
라. 도량형기(度量衡器) 개량
구식도량형기 두승(斗升, 되와 말)은 마멸되어 규격이 일정하지 않자 남한에서 사용하고 있는 국제적으로 통일된 리터 도량형기를 도입할 목적으로 수요자로부터 소요수를 신청받아 매입 배부하였다.
마. 교통
일제강점기 개설한 7번국도와 42번국도를 확포장하고 양양군은 산간 벽촌까지 군도를 개설하여 교통 운송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양양에서 원산까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동해북부선 기차가 운행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철로와 기관차가 모두 파괴되어 운행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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