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삭도(솔개미차) 및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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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성내리 노돈씨와 내곡리 김기정씨)
사례 1 ◆ 삭도 [속칭 : 솔개미차]
솔개미차는 기차가 다니기 한참 전에 다녔으며, 광산에서 내곡리 모로골을 가로 질러 양양 정거장까지 운반(현재 송암리)하여 조구통 같은데다 쏟아 부어 놓으면 그 이후에는 기차가 싣고 갔다.
솔개미차의 간격은 대략 30~50m 당 1대씩 있었고, 철을 옮기던 중 철광석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해방 이후 인공 때 기차는 다니지 않고 솔개 미차가 몇 년 정도 다녔는데 움직이는 시간은 주로 낮에 많이 다녔다.
철은 양양에서 청진 제철소로 바로 갔다. 연창에서 서울 가는 기차는 1일 2 회 정도 원산을 거처 서울로 갔다.
청진으로 가는 기차에 화물량은 대략 5~6개 정도 화차를 연결하였다.
당시 미군 B29가 기차 및 선로를 공격할 요량으로 하늘에 떠 다녔는데 현재 내곡리 하이펠릭스 아파트 부근 모퉁이에 포탄을 떨 군 웅덩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어느때인지 내곡리 앞에 객차가 1량 넘어져 있었으며 기차가 넘어진 후 금방 복구하지는 못했다.
당초에는 철광석을 솔개미차로 광산에서 연창 역까지 날랐으나, 이후에는 기찻길을 닦은 후에 기차를 이용하여 함경북도 성진 고주파에 있는 제철회사로 갔으며, 청진에 일철(日鐵)제철소 그리고 진남포 제련소로 갔다.
북한정권 당시에는 철을 캐지 않다가 6.25전쟁 후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아 자동차 트럭을 이용해서 속초청초호 부두에 부리면 삽과 리어카를 이용해서 배에 옮겨 실었다.
<사진 30> 당시 송암리 역전에 남아있는 조구통(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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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송암리 함병철씨 89세)
사례 1 ◆ 광석 기차운반 증언
겨울이니까 추워도 기관차에 타며 조수가 석탄을 화차에 집어넣고 가는 증기 기관차라 굉장히 뜨거웠고, 기차가 후진방향으로 가다가 탈선하여 우측으로 밀리면서 넘어졌고, 그 때 5명이 승무원이 승차를 했는데 젊은 기관사가 많이 다치고 나머지 승무원들은 화상만 입었지 사망자는 없었다. 원산 큰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받은 젊은 기관사는 얼마 후 회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젊은 사람을 기관사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으며 기차가 넘어가는 사고가 발생 하였을 때 내곡리 사람들이 폭발한 주러 알고 놀랬다. 일본 순사가 당시 그물 등을 치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고는 지면에 눈이 온 후라 고르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기울 어진 것이며, 철길을 복구하는 시간은 대략 10일정도 걸렸다.
하루에 철광석을 싣고 옮기는 횟수는 1~2회 정도이며, 매일하는 하지는 않았다.
광업소에서 철을 삭도(화물 케이블카)로 기차 적재량에 미리 실어놓으면 기차에 달아서 끌고 오기만 하면 되었다. 사고 발생 일에도 광석을 싣고 오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였고, 사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다녔다.
광업소를 왕복하는 일을 했으며 우리기차가 직접 청진으로 간 적은 없고, 철은 다른 기차에 싣고 청진으로 갔으며 간혹 송암리 역에서 금강산으로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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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리 함병철, 서선리 이순형, 북평리 어기연 78세 증언]
사례 1 ◆ 일제 때 운행한 삭도와 기차 이야기
1. 삭도
① 운행시기 솔개미차는 현재 대한광물(주) 양양광업소에서 재개발한 양양갱 입구에서약 150여 미터 지점 앞에서부터 당시 양양 송암리 기차역까지 1940 년~1941년 경서부터 운행을 시작하여 1945년 해방 전까지 기차와 동일한 시기에 운행하였다.
② 삭도재원 솔개미차의 탑은 검은 기름을 칠한 한 아름정도의 나무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높고 낮은 지역에 따라 약 10~20m정도이고, 나무 탑과의 거리는 지형에 따라 약 50~80여m의 간격으로 탑이 세워졌으며, 로프에 매달려서가는 솔개미차와 의 거리는 약 50여m 이상의 간격으로 운행되었고 소음이 심하 였다.
③ 운반중량 솔개미차는 호박돌(지름20~30㎝)정도 크기의 미만인 철광석을 약 1톤 정도를 운반하였다.
④ 운행방식 솔개미차는 나무 탑 좌우 복선으로 시계방향 반대쪽으로 돌아가면서 운행 되었고 삭도 탑에 설치된 부수기재 등의 수리를 위하여 수리공들이 솔개미 차를 탑승하기도 했는데 청곡리에 사는 000 수리공이 20여m삭도 높이에서 서선리 대나무 밭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⑤ 운행시간 운행 시간은 24시간 운행을 했으며 노선의 고장 등의 사유가 발생되면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⑥ 안전관리 솔개미차의 노선 밑으로 사람들이 활동을 하는 공간이나 건물 등의 시설 물이 있는 지역은 안전을 도모하고자 철망을 설치 위험요소를 방비하였다.
⑦ 시설공사 솔개미차 설치공사에는 당시 서면 북평리에 살았던 어명순씨가 관여했다고 성내리 노돈씨와 북평리 어기연씨가 증언하였다.
2. 기차
① 개통시기 기차는 동해북부선이 1929년 9월 11일 북한 지역의 안변에서 흡곡 사이가 개통되고 1937년 12월 1일 양양까지 개통 되며 송암리 역에서 기차가 다니기 시작 했으며, 송암리에서 광업소까지의 기차노선은 1942~1943년경서 부터 철광석을 운반하다가 일제가 패전을 한 후 해방과동시에 중단되었다.
② 광석운반 운반은 통상 1일 1~2회 정도 철광석을 기차의 적재차량(積載車輛)에 5~8 대씩 달고 다녔고 기차가 1회 운반을 한 철광석 량(量)은 솔개미차가 24 시간 동안 운반을 한 량(量)의 약 2배정도의 철광석을 운반했다고 한다.
이 솔개미차와 기차의 내용에 관한 기술은 당시 기차를 직접 운행한 승무원과 기차와 솔개미차가 동시에 운행한 내용을 목격한 분들에게 자문을 받은 내용을 토대로 작성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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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뉴질랜드 거주 정만철 82세)
사례 1 ◆ 임천리 철다리를 끈으려고 폭약을 구해달라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정만철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 다녀와서 나의 고향인 양양소식을 들었습니다. 일제때 개광했던 서면의 양양 철광을 다시 개광할 예정이란 소식을 듣고 과거 내 나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이루어진 사건이 불현듯 떠올라 이를 소상히 밝혀 애국의 고장인 양양군 역사에 길이 보존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이 편지를 드립니다.
내가 1944년 양양읍 내곡리에 살면서 양양공립국민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나의 집은 내곡리 철길 앞마으 첫 번째 집인데, 우리 집에 한 젊은 청년 내외가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삿짐도 없이 우리집 빈방을 얻어 아무 하는 일 없이몇 달을 살다 갔습니다. 나는 가끔 이 청년이 나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한 후 남양군도까지 승승장구처 내려가고 있으니 만약 일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리 조선이 독립 하기가 무척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지 못하게 하려면 양양철광에서 나오는 철광 석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막아 무기를 생산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곡리에서 임천리 쪽으로 가는 철다리를 끊어버려야 한다며 나의 아버지께 양양철광에 혹시 친한 사람이 있거든 폭약을 구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한글도 간간히 가르쳐주었고, 콤파스를 이용하여 태극마크와 태극기 그리는 방법도 가르쳐 주며 우리 조선이 독립을 해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젊은 청년 내외는 어디론가 떠나갔 는데 아버지 말씀이 그 사람은 우리 조선의 애국 청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이 청년 내외는 우리 지역에 전혀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사례 2 ◆ 철길 레일의 볼트 너트를 풀어놓아 기차를 넘겨 뜨렸다.
얼마 후 여름 방학이 되었는데 우리 집 앞 철도에는 낮에만 기차가 다닐 뿐저녁에는 다니질 않아 마을 사람들이 철길 위에 올라가 놀곤 하였습니다. 철길 위에는 모기도 없고 항상 바람이 불어 마을에 살던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와서 휴식을 취하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철길 위에는 모기도 없고 항상 바람이 불어 마을에 살던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와서 휴식을 취하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나 역시 철길 위헤서 친구들과 놀다 이 전에 우리 집에 와 있던 애국청년이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철길 레일 위에 돌을 얹어놓으면 기차가 넘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레일 위에 돌을 여러 개 올려놓고 왔는데 다음 날 가보면 기차가 지나가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레일과 레일을 여결하는 곳에 기차역 방향으로 경사 길을 올라가면 볼트에 끼워져 있는 너트를 돌려보았더니 이상하게도 빠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너트 3개를 뽑아 누가 볼까 두려워 철길 옆에 손으로 흙을 판 다음 볼트에 너트를 끼워서 묻어 놓고 레일 위에는 이전에 아무리 돌을 얹어 놓아도 되지 않기에 이번에는 레일 안쪽에 긁은 돌을 나란해 부쳐놓았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오후 수업을 하는데 친구들이 나보고 너의 집 앞에서 기차가 넘어졌는데 빨리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한편으로는 성공을 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두려움이 너무 커 집에 늦게 들어갔습니다. 이사고로 기관사 일본사람은 더운물에 빠져 죽었고 조수였던 조선 사람은 살아났 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후 경찰서에서 많은 사람이 나와 조사를 하는데 마을에 사는 젊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모두 경찰서에 잡혀가 매를 많이 맞고 나왔습니다. 나는 어린 몸이라 의심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양양철광에서 생산된 철광석은 기차로 수송되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하는 수 없이 우차를 동원해서 운반하였는데 제대로 운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 크레인이 우리나라에 두 대가 있는데 한 대는 부산에 있고 다른 한 대는 청진에 있는데 크레인이 이곳까지 오려면 여러 달이 경과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해 즉, 1945년 7월에야 겨우 크레인이 와서 기차를 끌어 올리고 8월 초에 복구가 되었으니 1944년 9월에 사고가 난 다음 1945 년 해방될 때까지 철광석을 제대로 운반해 가지 못했습니다. 양양에서의 이 사건은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양양 철도 사건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람으로는 나와 같이 같은 마을에 살던 김동필(속초시청 앞에서 인장포 경영 중)이란 사람이 있고, 양양국민(초등)학교 동창들이 아직도 양양에 생존하고 있는데 그때의 상황을 아련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철길이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면 굴통로에서 당시 양양역 방향으로 30미터 정도의 선로 지점을 금속탐지기로 확인해 보면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철볼트와 너트가 끼워져 있는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 다시 그 때를 회상해보면 비록 12살의 어린 소년의 기지로 양양철광석을 지킨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양양군미의 강인한 애국정신의 본보기가 아닌가 생각되기에 양양군 역사에 영원히 남도록 기록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현주소 : 2/66 Bentley Ave Glenfield Auckland Newzealand T 001-64-9-444-8009 정 만 철
이 글은 정만철씨가 일제 때 내곡리에 살면서 어린 나이에 훌륭한 일을 하였던 당시 상황을 적어 보낸 내용으로 양양군 역사에 영원히 보존하여 주시기 바라면서 양양군수 앞으로 보낸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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