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갈천 구룡광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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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갈천 엄익환 77세)
사례 1 ◆ 해방 전까지 인발구로 철을 끌어냈다
1940년대 초에 갈천 구룡광업소가 있다는 내용이 양주지에 실려 있다.
그 당시 일본사람들이 들어와서 광산을 시작을 할 때 사람들이 보급대로 일본 갈 사람은 일본으로 갔지만 여기에서 대장제(일본말 가제아)를 구룡령 입구 에다가 차려놓고 인부를 데려다가 굴을 노미(쇠꼬쟁이)로 100m정도를 뚫었고 노꼬가(일본말)로 나무를 잘라 동발을 해 들어갔다.
캐낸 철을 인발구로 끌어[나무로다가 소달구지처럼 만들어가지고 소 멍에 지듯이, 사람이 지고 썰매처럼 끌고 나감] 낸 후 산 중턱으로 쏟아 부은 다음에 케이블카로 아래 선광장으로 옮긴 후 선광을 해서 목탄차가 싣고 나갔는데 40 년대 이전부터 해방 전까지 철을 캐냈다고 한다.
본인이 4살이 되던 이전부터 시작했고 8살 때 해방이 되었는데 구룡령 도로를 확장하는데 양양에서 보급대가 와서 일을 했다고 한다.
승량간(대장간)에 고성청 이라는 할아버지가 기구를 만들었음.
일제 강점기에는 노미로 뚫고 철을 캤지만 6.25이후에는 착암기로 했음.
일제강점기에 구룡광산에서 철을 캐낸 일은 그 당시 일을 했던 저의 부친이나 동내 어른들에게 들이 이야기 해 주었다.
사례 2 ◆ 함태 광업소에서 타산이 안 맞아 중단
해방 이후, 광산이 비어 있다가 6.25이후 60년대 초 양양 광산 함태 광업소 에서 인수 김세영 씨라는 분(광주 출신)이 운영을 하면서 속초 항구에다가 실어내다가 수송 문제에 운반비가 비싸다 보니 중간에 중단하였다.
현재에도 철을 캐서 당시 선광을 해서 야적을 해 놓은 것이 있다.
지역 주민 뿐 아니라 외지인도 많았고 당시 노동자는 7~80명 정도 되었다.
조구통을 놓고 내려가지고 중간에서 1차 구르마로 옮기고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구룡령 입구로 옮기면 인부들이 와서 선광을 해서 차로 실어 운반을 했으며 아직도 케이블카 와이어 줄이 그대로 남아있다.
철의 질은 양양광업소도 보다 좋으나, 운반비용이 과다 소요 되어. 수지가 맞지 않아 문을 닫았음.
사례 3 ◆ 그 당시 사용한 화약 저장고가 아직도 남아있다
구룡령이 명산이기 때문에 굴속에서 발파하는 경우 함몰로 인한 사망사고가 많았는데. 일본사람들은 그것을(산) 믿지 않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음.
원형이 보존된 굴 이외에 갱도입구가 함몰된 굴 2곳이 더 있으며, 예전에 사용 했던 화약고 건물 2동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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