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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철광산의 문화사 [증보판]

    2. 광산촌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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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60년대 70년대의 우리나라는 일자리가 없어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양양의 광산촌에 모여들었다. 농사일보다 힘들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월급이 많아 공무원보다 광산에서 일하기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광산촌도 어렵기는 비슷하여 광부들은 힘든 일에 종사해야 했고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일반미도 타 먹기 힘들었고, 납작 보리쌀, 알락미 일반미 해서 3개를 한 달에 한번 배급을 타서 먹기도 했다.



    1) 광산촌의 주거형태


    수복 후 양양광산이 활성화되자 전국에서 갑자기 모여든 광부들이 많아 제대로 된 가옥이 많지 않았고 골짜기마다 흩어져 있던 집들을 회사에서 사택을 지어 혼자 와있는 광부들이 살도록 하였는데 사택이 150세대가 넘었고 한 줄이 8 집이고 전체가 아마도 250세대는 넘었다. 사택은 8칸씩 따로 지어졌는데 집들이 비슷비슷하여 술을 마시면 자기 집을 잘못 찾아 들어가 남의 집에서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다.

    사택은 건물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게 없었는데 사람들은 특이한 게 많았다.

    전국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각자 사는 방식이 천태만상이었다.

    붕화료(노무자), 설악료(사원)라는 사택이 있었는데 독신자(홀애비)들이 사는 기숙사도 있었고 임시직 광부는 사택으로 입주하기가 힘들었다.

    상시부(雇入)만 여기를 얻을 수 있는데 사택이 좁은 방 2개에 작은 다락이 있긴 하였지만 애 둘 셋 있는 사람들은 고생 심했다.

    사택에는 한 줄에 8세대가 살았다.(4호 빼고 1호부터 9호까지) 사원들 사택이 고입들 사택보다 좋았는데 주임만 되면 관사가 따로 있었고 크기가 달랐고 주임, 과장들 사모님들이 노무자들을 무시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사택도 따로 있어 부딪힐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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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3> 사택전경(1956년경)

     

    방 한 칸은 3평정도 되었고 방음이 안되어서 애기들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동들은 4학년 이상은 상평초등학교에 1, 2, 3학년 까지는 장승분교로 걸어서 다녔으며, 학년 당 2개 반씩 6학급이 편성돼 있었다.

    광부로 일을 열심히 하고 돈을 많이 모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2대에 걸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광부의 아내들은 남편이 광산에 일하러 간 사이에 텃밭도 가꾸고 산에서 땔감을 해다 집에서 불을 때고 이웃집에 팔기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2) 광업소의 봉급날


    월급을 현금으로 주는데 빈 월급봉투를 하나 더 얻어서 월급내역을 수정하여 아내 몰래 술값을 챙기는 일도 있었다. 공급소에서 생활비를 미리 땡 겨 쓰다 보니 봉급날은 빈 봉투인 경우도 있었다. 봉급날 술집 마담들이 술값을 받으려고 공급소에서 죽치고 대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광산에서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유유상종으로 자주 만났다. 그래서 매달 가불 하고 딸린 식구에 대한 걱정으로 잔업도 하여 돈을 만들어야 했다.

    월급날 외상 술값을 갚으러 가면 주인마담이 그렇게 반가워할 수 없었다. 아가씨들은 양팔을 잡고 방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면 신발을 벗기며 맥주 딱 한잔만 하고 가라고 한다. 거절을 못하고 마지못해 술집 문턱을 넘어서면 미리 준비해둔 과일안주에 맥주 두병을 들고 나오며 “어떻게 외상값을 받고 그냥 보내”라며 주인마담이 앙탈을 부린다. 아가씨의 아양에 “한 병 더” 안주 하나 더 하다 일어설 때는 갚은 외상값만큼 달아놓고 술집을 나서게 된다. 매번 반복되는 생활이 술집 외상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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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4> 장승분교 가을운동회(1960년경)



    3) 광산촌의 휴일


    광산의 휴일은 따로 없고 월 2회 정도 쉰다. 쉬는 때는 같이 일하는 팀들과 냇가에 나가 뚜거리탕을 끓여 술을 마시며 보냈다.

    때로는 농촌에서 돼지를 사다가 잡아서 슬레트 조각에 올려놓고 구워먹으며 친목을 도모하였고 남은 고기는 나누어 가지고 가서 가정에서 먹었다.

    광업소에서 1년에 두 번 가족과 함께 관광을 가는데 비용은 매달 일정금액을 적립하였다가 경주 불국사 등 전국 유명지로 갔다. 당일치기로는 설악산, 하조대 그리고 오색령을 넘어 장수대로 일일 관광을 갔다.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남대천 강가의 용천 범부, 내현 등지로 가서 천렵을 하였다.

    송년회도 회비를 내서 넓은 가정집을 빌려 가마솥을 걸어놓고 돼지를 잡아서 함께 잔치를 하였다.

    광산 업무가 끝난 후에는 같이 일하던 사람들끼리 당일 여행도 갔다. 소장 이하 간부급들은 광산에 있는 술집에 가면 소문이 나기 때문에 속초 또는 설악산, 낙산 그리고 기사문리로 자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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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5> 선광과 직원 용천 야유회



    4) 멋쟁이 여자광부


    선광장에서 100여명이 3교대로 30여명 정도씩 일했다. 선광장에서 일하는 동안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소음이 매우 심해서 바깥으로 새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선후배 차이는 없었지만 임시와 고입의 차이가 있었고. 대부분의 선광장 여자 노무자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할 때 선광장을 그만둔다.

    그 당시 광산 다닐 때 눈이 맞아 사내 결혼하는 커플도 있었다.

    선광장에서 일하는 여자 노동자는 멋을 부려 작업복을 다려 입고 화장을 예쁘게 하여 멋쟁이 아가씨들이 많았다. 선광장 자체에서 근로의욕을 불어 넣기 위하여 당일 관광으로 하조대, 설악산 등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광업소에서는 미인대회도 있었다. 미인대회에 입상한 처녀는 여러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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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6> 사무실 여성 근로자(1979년경)



    5) 광부들의 신용


    광업소내 복지시설로는 광부사택, 영화관, 목욕탕, 병원, 이발소, 약방(개인 약방), 당구장이 있었으며, 공급소는 노무자들의 직번이 있었는데, 1번 2번 직 번은 공급소에서 돈이 없어도 물건을 외상으로 살 수 있었다. 쌀도 직 번만 있으면 계속 받을 수 있고 임금에서 일정부분 쌀을 신청하면 그 금액을 제외하고 월급과 쌀을 함께 받았지만, 임시부들에게는 그러한 혜택이 없었다.

    양양읍내에도 없는 목욕탕이 70년대 후반에 발전실 옆에 있었는데 그 발전실 에서 나오는 온수를 이용하여 목욕탕을 운영했다. 종업원들한테 한 달에 몇 장씩 목욕표를 끊어 주었다. 종업원 아니더라도 표만 내면 목욕을 할 수 있어 종업원 가족들도 양양에서 많이 왔다.



    6) 광산촌의 삶이였던 목욕탕


    1950년대 말에 양양시내에도 없었던 목욕탕이 광업소에만 있었다. 그만큼 양양광업소가 한때, 번성했던 시절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광업소에 공급하는 전기를 자체 발전기로 발전했다. 그래서 발전소 옆에 덧붙인 목조건물이 목욕탕 이었다. 발전기 터빈에서 나오는 온수를 목욕탕내로 공급하는 것이다. 그때 광부들에게 목욕은 밥 먹은 것 만큼이나 필요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광부들에게 무료 목욕 이용권을 내 주었다. 그러니 양양에 사는 광부 가족들도 광산까지 가서 이용했다. 그 뿐만 아니라 양양에 소재해 있는 학교에서도 목욕하는 날을 정하여 걸어서 광산으로 정기적으로 목욕을 다니기도 했다.

    목욕탕에 대한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들이 전해지는데 한 번은 짓굳은 어느 직원이 천정갓쇼(당시 목조건물은 남, 여탕을 판자로 칸막이만하고 천장마감은 하지 않았음) 너머로 여탕을 넘겨보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목욕하고 있는 여탕 바닥에 그냥 떨어지자 마침 간부 사모님들이 다수 있었는데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여탕과 남탕 사이를 막은 판자 구멍으로 여탕을 들여다보다 여탕에서 미리알고 들여다 보는 눈을 쩔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한전에서 정식으로 변전소를 세우고 전력을 공급하던 ‘70년도 말경에 양양의 시공업자인 주춘명씨가 하청을 맡아 사택부근인 장승 유아원 옆으로 2층 브럭 건물을 신축하였다. 1층은 목욕탕으로 사용했고 2층에는 이발소와 당구장이 개설됨으로써 광부들에 처우개선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후 폐광된 후 계속 흉물로 남아 있다가 2011년 대한광물이 다시 개광을 하면서 2012년 8월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양양광업소의 한편의 추억의 터로만 남아있다.



    7) 광산촌의 문화시설인 극장


    1963년경 속초 제일목재소에서 캔 제목으로 1, 2층에 관람석이 100석 규모의 극장을 완성하였는데 영동지역의 최고의 시설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라 광산 근로자들에게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유일한 휴식처였 으며, 또한 처녀총각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광산극장은 노무자들 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문화공간이었고 영화의 스토리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연일 성황리에 운영하던 중 1969년 12월경 화재로 전소되었다.

    최고의 영사기로 필름을 돌리므로 화면이 깨끗하였을 뿐만아니라 중간에 필름이 끊기는 일이 없었다. 양양읍내는 물론 광산과 인접했던 거마리, 파일리 사람들은 횃불을 만들어 깜깜한 거마리 굴을 통과한 후 불을 끄고 부근에 보관하 였다가 극장이 끝나면 다시 불을 붙여 굴을 빠져 다녔다. 인근 속초지역에서도 많은 관람객이 모여들어 광업소의 명물이 되었다. 당시에 “돌아오지 않는 해병

    (황해 주연)”, “푸른하늘 은하수(김지미 주연)”, “팔도강산(김희갑, 황정순 주연)”

    그리고 벤허 등이 최고의 인기리에 상영되었다. 이 무렵 서울가는 금강운수가 광업소에서 출발하여 양양정류장을 들렸고 양양군 선거 제1투표소가 광업소였던 만큼 유권자(약 3천명)가 제일 많았고 자철광 품질과 생산량에서 최고를 자랑하며 국내 전체 수출액의 10/1을 차지할 만큼 전성시대였다.



    8) 직장 경조사


    자녀 결혼이나 부모상 또는 동료의 사고에 대하여는 부서별로 부조도 하고 직원들이 와서 도와주었으며, 동료 중 장사집이 생기면 부서에서 몇 사람을 보내서 2~3일 정도 도와주었다. 직장에 출근한 사람들은 빈자리를 채우느라 합심 하여 조금씩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하였다. 여의치 않으면 기계 한 대를 세워놓더 라도 경조사는 챙겼다.

    같은 반원끼리는 장사(葬事)를 돕다가 출근을 하면 또 다른 반원이 퇴근하여 서로 도와주었다. 회사는 부모상이 생기면 3일간 휴가를 주었고 자녀의 결혼식 에도 휴가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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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7> 직원 결혼식(1968년경)



    9) 월급봉투와 공급소


    임금에서 쌀을 신청하면 쌀값을 제외하고 받았다. 광업소에 쌀을 타는 곳은 따로 있었으며 식품상이라는 공급소도 있었다. 고입자 들은 직 번을 대고 사인만 하면 술도 주고 과자도 주고 음료수도 주었다. 임시부들은 표가 없어서 고입된 사람이 표를 대신 사용한 후 봉급을 고입에게 갚아야 했다.

    월급봉투를 한 개 가져다, 거짓으로 위조하여 부인에게 갖다 주고 차액은 용돈으로 쓰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집은 신랑이 돈을 다 술집에 갖다 주고 빈 봉투만 가져오니 그 다음부 터는 월급을 아내들이 가서 타오는 경우도 있었다.



    10) 이웃사촌


    부인들은 남편이 밤에 일하고 아침에 들어오면, 남편이 낮에 잠을 자라고 바깥에 나가서 있다가 오기도 하였고, 술 마시고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가서 자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인정이 있어서 그런지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고 그렇게 넘어갔다.

    비가 오는 날 광부의 아낙들은 처마 밑에 죽 늘어앉자 빗물에 연탄재를 으깨서 그릇을 닦는 진풍경을 연출 하였다. 특히 비가 와서 강가에 물이 불어나면 광부들이 남대천에 나가서 뚜거리를 잡아 오곤 하였다. 아내들이 뚜거리 국을 끓여서 주변에 나눠주며 이웃 간에 친목을 도모하였다. 가난한 광부들의 삶이지만 인정이 매마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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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8> 당시 유행한 월남치마(1970년경



    11) 임시부와 상시부


    임시부들은 밥 먹을 장소조차 없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는데, 밥도 상시부 먹는 시간이 따로 있고, 임시부는 다른 곳에서 대기하다 들어와서 먹던가, 아니면 구석에서 안전모를 깔고 앉아서 먹었다. 상시부들이 다 먹고 가면 그 빈자리에 가서 먹었으며 물도 임시부들의 먹는 물통에 물을 따로 받아다 놓고 마셔야 했다.

    당시에는 차별이 심해서 상시부는 트럭이나 버스타고 출근을 했지만, 임시부 들은 걸어 다녔다. 또한 임시부들에게는 쌀도 주지 않아 나중에 임시부들이 하도 항의하니까 그때부터 옷도 주었다. 상시부들은 작업복을 한 벌씩 주었는데, 임시부는 바지 하나만 줄 때 있고 윗도리 하나만 줄 때도 있었다.

    광업소에는 영업하는 식당은 꽤 많았으며, 정육점에서 채광부만 한 달에 고기두 근씩을 나누어주었다. 임시부들은 고기 전표도 안 나왔다.



    12) 체육행사


    체육행사는 1년에 한번 있고, 개광기념일(매년 7월 1일)에 장승분교 운동장에서 거행했다. 광부들을 위한 특별한 위로 행사는 없었고, 체육 행사 때 경기 상품만 주었으며 사은품은 없었다. 막걸리는 회사에서 많은 지원을 했다.

    체육행사는 축구, 씨름, 배구, 육상, 마라톤 등을 했고, 채광, 선광, 총무가 팀을 이루며 공휴일로 정하여 즐겼다. 노동조합에 문화부가 있어서 연극을 초가을에 공연 했는데 광부들의 사기를 돋워 주었다.

    배구는 67년도에 축구는 61년 이전서부터 1~2년간 했고 야구는 63~4년도에 사무직원들이 친선경기를 했다.

    광산근처 거주 가족은 모두 참가하고, 과 별로 특별 음식을 준비하여, 장승분 교에 모였다. 마라톤은 양양시내의 로터리를 왕복하는 코스를 돌아왔다.

    4H 재건 촉진회 주관의 서울 직장대항이 배구시합이 있었는데, 대한철광 팀, 인천 중공업 팀 등 6~7개 회사가 모여 체육대회를 하였다. 양양광업소 2명을 포함해 대한철광 본사 직원들이 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되었다.

    울산 광업소에서도 울산 시내 직장 대항 배구 시합이 있었는데 경찰 등 7개회사 간 체육대회에서 양양광업소 2명을 포함한 울산광업소가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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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9> 운송부 대 선광 출하부 축구시합(1972. 6)



    13) 광부들의 여가 시간


    근로자들은 휴일이(공휴) 한달에 두 번으로, 교대로 쉬었다. 일반 사원들은 일요일과 공휴일에 쉬었다.

    광업소가 잘 될 때는 양양의 술집으로는 성이 안차서 속초로 나가서도 먹었다. 갑, 을, 병 3교대로 일을 했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집으로 안 들어가고 술 마시다가 자고 아침에 출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업소에서는 광부들에게 영양보충[당시 광부들은 속칭 : 목구멍에 먼지와 때를 벗긴다는 말로 표현했다]을 위하여 돼지고기 2근을 한 달에 두 번씩 주는데, 술을 좋아하는 광부들은 육고점 아래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돈으로 바꾸어 술값으로 충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야외에서 소주 1됫병을 갖다 놓고 슬레이트 불판위에 고기를 구워 먹으면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그 당시는 경월소주는 1됫병들이가 하늘색 유리병에 들어 있었는데 도수가 25%였다.



    14) 고단한 광부들의 아내들


    그 시절에는 시계도 없어서 밤에 도시락을 싸기 위해 밖에 나가 샛별을 보고 밥을 지었다. 애기가 울면 남편이 잠을 설칠까 봐 저녁에 바깥에서 애기를 달래서 재웠다. 시계가 있는 집에다 시간을 물어보고 통근 버스시간(밤 12시)에 맞춰 남편을 깨워 출근을 시킨 후에야 부인들이 잠을 잘 수 있었다.

    봉급날은 술값을 제하고 납작하게 쪼그라든 봉투를 가져다주니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봉급날은 술집 마담들이 경비실 앞에 죽치고 기다리다 봉급을 가로채는 일도 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인감증명원을 제출하게 인감도장을 찍고 월급을 내주었다.

    가정 살림을 돕기 위해 남편이 광산에 일하러 간 사이에 남의 일을 해 주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파는 부인들도 있었으며, 적은 월급이지만 알뜰하게 살림을 산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2대에 걸쳐 광부로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15) 광산 1세대들의 모임활동


    당시 장승리에 사는 광산 1세대들이 친목과 화합을 위해서 삼우회 라는 모임을 가졌는데 광업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모임으로 확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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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10> 삼우회 광산분회 결성식(1970.2.26.)



    16) 토속신앙


    (1) 산신당(山神堂)

    우리 조상들은 예전부터 산신을 귀히 여겼는데 이는 산에서 모든 양식을 얻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매년 가을이면 광업소의 안전과 각 갱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냈는데 도목갱 입구에서 통돼지를 잡아 성대하게 지냈다.

    당시에는 도목갱 입구 좌측에 평산신씨의 열여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 화약고로 들어가는 길옆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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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11> 산신제 직전 모습


    (2) 서낭당[城隍堂]

    장승1리 1,2반에는 약 60여 가구가 살았는데 마을입구에는 수백 년 묵은 서낭목인 노송 3그루가 있었다. 그중 두 그루는 1960년경에 고사하였고 한 그루 마저 급격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에 어렵게 버티다가 2004년 겨울 강풍에 고사 하고 말았다. 현재는 서낭터와 서낭 목 잔재 서낭단만 썰렁하게 남아있다.

    시멘트로 축조된 서낭당 안에는 마을 서낭계원 약 30여명의 명단만 목판위에 새겨져 보관되어 있다.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삼일 자정에 부정(不淨)이 없는 집을 도가(都家)로 선정 하여 돌아가며 제주가 되어 제물을 차렸다.

    정해진 도가는 마을 뒷산의 맑은 우물물을 제수로 쓰고 통돼지를 잡아 제물을 준비하여 제단에 진설하여 놓고 마을 남자들 약15~20여명이 참석하여 서낭 제를 성대히 올렸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경제적 부담으로 나중에는 돼지머리만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제가 끝나면 제사에 썼던 돼지고기와 떡과 과일을 골고루 마을 주민들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서낭제는 2004년 서낭목이 고사하자 중단되었다.

    이 서낭당은 마을 아이들이 학교(당시 상평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귀신 나오는 공포의 장소였다. 겁없고 짓궂은 아이들은 용돈도 얻고 서낭에 매달아 놓은 실로 연줄로도 요긴하게 쓰여졌다고 한다. 이곳을 지날 때에는 겁도 나고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돌을 세 번 던지고 침을 세 번 뱉고왼 발꿈치로 땅을 세변 쿵쿵” 구루면서 도망치듯 지나가기도 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서낭이 1900년대에 들어와서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자 무속인들이 몰려들어 서낭 목에 칼을 꽂고 술을 붓는 등 살풀이 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무속 인들은 서낭 목에 금줄을 띄우고 울긋불긋한 천을 걷기도 하고 때로는 돈도 바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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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12> 당시 서낭목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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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13> 현재 서낭단 모습


    (3) 열녀각[烈女閣]

    이 비각은 정용관의 처 평산 신씨의 정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신씨는 본래부터 행실이 착실하였다. 어느 날 남편이 서당에서 귀하던 중 범에 물려 갔으나 가족이나 이웃사람들은 무서워서 시신을 찾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아내인 신씨는 단신으로 깊은 심산까지 끝까지 추적하여 시신을 찾았다. 그 후 남편의 시신을 잘 안치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받쳐서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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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6-14> 열녀각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