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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철광산의 문화사 [증보판]

    Ⅶ. 구룡광산

    페이지 정보

    조회 342회

    본문


    1. 개 요


    양양군 서면 갈천리 산 28번지에 있으며 광구의 범위는 약 90정보로 구룡령 일대이다. 자철광으로 철 함유량은 52%이다.

    구룡광산의 시작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0년대 초에 일제에 의해 채굴되어 오다가 해방과 더불어 중단되었다. 1963년 지질학 박사 김옥준씨의 확인으로 채광 활동을 하여 월간 300톤을 채굴하여 자동차 편으로 속초항에 운송하여 일본 으로 수출하였다. 생산규모가 영세하고 열악한 도로여건으로 철광석 운송이 어려 웠고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채산성이 악화되어 1970년 이후 생산이 중단 되었다.

    <출처:양양군지>




    2. 경과


    1) 일제 강점기의 운영


    일제가 광산을 시작할 당시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일본으로 끌려가던 시기로 보급을 면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인력을 충원하였다. 일제는 구룡령 입구에 대장 간을 차려놓고 철을 캐는 각종 도구를 만들었다.

    쇠를 이용한 각종 기구로 100m 정도의 굴을 뚫고 철을 생산하였는데 동발이를 바치면서 하였다. 철을 캐서 인발구라고 불리는 수레를 썰매 달린 소달구지 처럼 만들어 산 중턱까지 인력으로 끌어내어 선광장까지 케이블카로 옮겼다.

    철광석을 선별하면 목탄차에 옮겨 싣고 운반해 갔는데 40년대 초부터 해방 전까지 채굴이 진행되었다.

     

    120_1.jpg

    <사진 7-1> 구룡광산 답사(2011.11)

     


    2) 수복후의 운영


    해방 이후, 폐광이 되었다가 60년대 초 함태 광산에서 인수하여 운영 하였다.

    속초로 철광석을 실어 판매하다보니 운반비가 비싸서 결국은 도중에 문을 닫아 버렸다.

    철의 질은 양양광업소도 보다 우수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동자는 7~80명 정도 지역주민 뿐만아니라 외지인도 많았다.

    철을 캐내서 1차 수레로 옮겨서 산 중턱에 있는 조구통에 부린 후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구룡령 입구의 선광장으로 옮기면 인부들이 선광을 해서 차로 실어 운반을 했다. 아직도 케이블카 와이어 줄이 그대로 남아있고, 원형이 보존된 굴 이외에도 갱도입구가 함몰된 굴이 2곳이 더 있다. 예전에 사용했던 화약고 건물 2동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으며, 지금도 철을 채굴하여 선광을 해서 야적을해 놓던 곳도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정(丁)으로뚫으며 캤지만 한국전쟁아 끝나고 수복 이후에는 착암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