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토건실 중장비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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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장승리 최덕실 67세)
사례 1 ◆ 전국구 주먹들의 일자리 와 주먹들의 의리
내가 65년도 5월 10일에 들어갔는데 그때 종업원이 2,000명 이상이 됐었다.
그런데 회사에 깡패들이 우글우글 한 거야. 그 깡패들이 내가 담당하는 토건실에 있었는데. 그 깡패들은 서울사람들과 전국구에서 사고 낸 사람들을 여기다가 내려 보낸 거야.
어지간한 사람은 한 5개월에서 1년 이렇게 있다가 갔지. 근데 나하고 토건실에 근무한 깡패 출신이 하나 왔다가 설악산 절에 총무로 가기도 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제주도서부터 빽 있는 사람, 주먹질 하던 사람들도 다 온 거야. 그때 대한철광이라면 직장이 공무원보다 훨씬 좋다 그랬잖아. 그래가지고 근무하다가 내가 한 7~8명 정도 데리고서 일시키고 했는데, 근데 일은 잘하더라. 주먹질하는 사람들이 의리는 있어요. 1년이 지나면 갑니다. 그러고 소주 한잔하고 가고 그랬지. 깡패들이 오면 총무과에서 대부분 경비로 많이 시켰다.
사례 2 ◆ 광산 사택과 장승리의 생활상
붕화료(노무자), 설악료(사원)라는 사택이 있었는데 독신자(홀애비)들이 사는 기숙사도 있었다. 임시부 부부는 사택 들어올 때 진짜 힘들다. 상시부(고입)만여기에 얻을 수 있어. 사택 한 칸 다락방에서 자고 애 둘 셋 있는 사람들은 진짜 고생 많았어요.
매달 15일 봉급이잖아 그때 당시 돈으로 양양에 약3억이 풀린 거야.(현 30억정도) 여기 장승리에 색시집이 5집이나 있었고 색시들은 7~8명씩 데려다 놓고 그랬지. 상평도 붕지/상내지 등 한 서넛 군데 색시집이 있었다.
광업소가 잘 될 때에는 양양에 술집으로 성이 안차서 속초 나가서도 먹고 들어왔다. 갑을병 3교대 할 적에 갑이 아침에 출근해서 오후5시에 퇴근하면. 집으로 안 들어가고 술 마시다가 자고 아침에 출근하는 경우도 많다.
바로 위에 육고점 밑에 막걸리 집 있었고. 육고점에서 회사에서 두 번, 한 달에 돼지고기 두 근씩 끊어 주는데 목구멍에 먼지하고 때를 베껴내라고 주는 그걸 술 좋아하는 사람은 돼지고기 바꿔주고 돈 받아서 그걸로 술을 먹는 거야.
이 상평 초등학교 앞에 슬레이트 뚝뚝 짤라 불판을 만들어서 가지고 고기를 구어 먹으면 진짜 기가 막히지 지금은 플라스틱 댓 병이지만 그때는 유리로 만든댓 병을 갖다놓고 먹고 그랬지. 그 돼지고기 표(한 달에 2개)는 임시직이고 고입이고 다 줬지.
광산에 극장이 있으니까 젊은 남자 여자 많이 모이고. 그 당시에 양양에 목욕 탕이 없었잖아. 근데 광업소에는 있었잖아. 그래서 종업원들한테 한 달에 몇 장씩 목욕표를 끊어 주는거야 그러면 양양에 사는 종업원들 가족들이 목욕을 하러 많이 오고 그랬지, 종업원 아니더라도 표만 주면 넣어주니까.
사례 3 ◆ 광부의 해고
80년대 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부터 종업원들을 한 번에 한 200명 잘랐잖아.
포항에서 광석이 비싸고 하니까 그것이 빌미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이 해고 조건이 안 되었다고. 그리고 당시에는 투전질을 많이 하게 되면 결근 하잖아. 그럼 그런 사람도 200명이 안되잖아. 그래서 쉽게 말하면 감독이나 주임들한테 밉게 보인자를 살짝살짝 얘기해 주는 거야. 그때 200명 추렸을 적에한 일주일 동안에 데모하고 살인사건 날까봐 사복 경찰들이 들어오고 그랬다.
근데 그 후부터는 차츰 차츰 줄어드니까 ‘다음에 내 차례구나’ 하고 자발적으로 나가는 사람들하고, 과장한테 잘 보여서 더 있고 그런 사람도 다 있었다.
사례 4 ◆ 광업소의 재개발 히토류가 ?
그때 당시 광업소(대한철광) 땅이 19만평이야. 그 도면을 내가 토건실에서 측량이랑 설계한 도면이 다 있었잖아. 폐광되고도 내가 좀 갖고 있었는데 근데 내가 요새 좀 아쉬운 것이 여기를 새로 개발하잖아. 그게 있으면 좀 유용하게 써먹을 텐데 다 버려서 없어지고 말았지 하긴 폐광이 된 마당에 그걸 놔두면 뭐하나.
기념으로 전화기하고 깐드레 하고 노미하고 갖다놨지. 기념으로 갖다놓고 MBC 방송국에서 나와서 촬영해가고 돌도 한 4~500m 지하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돌을 수십 개를 구해 놨는데, 지금 보면 새롭지 뭐.
그때 광업소에서 히토류가 나왔는데 발견을 못 한 거지. 근데 지금 광업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정부에 지원을 받아 히토류와 철광석을 슬슬 개발을 하긴 하고 있는데 그나마 그 광산이 잘 되어서 이 지역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요.
사례 5 ◆ 논화항에서 불을 때면 탑동에서 연기가 난다...
논화항은 덕대가 하다가 폐광을 했고, 탑동은 도목항 쪽에서 들어가서 캐냈지.
거기에는 압기실이 있어서 작업을 했는데, 실제로 명칭은 없고 탑동이라고 했다.
지금도 보면 도목항에서 거기에 맞춰 놔가지고 쉽게 말해서 여기서 불을 떼면 연기가 그쪽 항의 구멍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논화항과 탑동하고는 갱도가 연결은 안 되었지만 서로 구멍이 나 있어 논화항에서 뭘 하면 탑동에서 공기나 연기 같은 것이 풀풀 난다는 것이다.
사례 6 ◆ 불도저,그레이더, 페이로다, 포크레인, 지계차 면허취득
1965년도에 들어와서 아직까지 사는데, 이게 박정희 대통령 때 시멘트 통 벽돌로 지어준 집이잖아. 광업소 초창기 새 농촌 건설사업 할 때 면에서 부락 동네에 마을 회관을 지은거지. 솔직히 군청에서 지어준거나 다름없지.
토건실은 장비 운전을 해야 되니 춘천 소양강 다리에 가서 불도저 면허를 땄어. 그런데 선광에 있는 도저하고 똑같더라고 근데 거기는 50m를 왕복해야 합격인데, 시험관이 도청에서 하나, 인천군부대서 장교 하나, 원주 국토 관리청에서 하나 해서 3명이 나왔는데 시험이라는 것이 도저를 몰고 가다가 내려오라고 하면 끝이거든.
기사가 옆에 타. 나라샤 하면서 50m 돌아서 올 때 파도청을 하라고 그러더라고, 처음에 타면 질문을 해. ‘당신 어디서 좀 하다가 왔냐?’ ‘광업소에서 한 1년하다가 왔습니다.’했어. 1년뿐이 안한 사람이 뭐 이렇게 잘하냐고 그러더라고.
합격한건 맞는 것 같은데 시험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한명 뿐이니까 하루정도 여기서 조교로 더 일 해줄 수 있냐고 그러더라고. 그때는 시험을 3일 동안 보는데 회사에 시험을 본다고 하루밖에 못한다고 그러니까 어디에 얘기해야 하냐고 그래서 총무과에 얘기해야 한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총무과에 얘기해주고, 다음날 한나절 하고 나니까 3,000원 주더라고.
가다가 차비하고 무엇을 사 먹으라고. 그 때 당시에 면허증을 찾으러 와야 하는데, 당신은 찾으러 오지 말고, 보내 줄 테니까 하더니 20일 정도 있다가 붙여 왔다.
면허 시험을 보고 왔지만 난 조수니까 봉급이 얼마 안 되잖아. 그런데 70년도에 그 기사가 다른 데로 가면서 윗사람에게 내가 일 잘하고 그러니까. 내 봉급을 주듯이 얘에게 주라고 해서 말만 들어도 고마웠지.
그 후 원주로 가서 페이로다도 많이 배우고 면허도 또 금방 따게 되었고. 76 년도에는 포크레인, 지게차 그 면허증도 다 따 버렸다.
광업소는 도저, 페이로다, 그레이다 세 개만 써 먹었지. 그때 당시는 그레이다와 도저 면허를 내면 같이 통합이 되다가 얼마 안 있다가 분리가 되었다.
근로자들은 휴일이(공휴) 한 달에 두 번, 교대 자체로 쉬었다고 보고, 일반 사원들은 일요일과 공휴일에 쉬고 그랬다.
광업소에서 그때는 체육대회를 많이 했지. 축구, 배구는 도 대회 가서도 우승 많이 했고. 삼미광업소 때에는 야구도 했다.
<사진 19> 대한광물 중장비를 운전중인 최덕실씨(2012.9)
사례 7 ◆ 광업소의 대민지원 사업
광업소에서 불도저 할 때 그때는 포크레인도 없었다. 그래서 기름 값이랑 잘챙겨주면 가서 일을 해 주었는데 거의 무상으로 해 주었다.
한번은 현북면을 나갔는데 그때 비가 많이 와서 나무다리가 없어졌거든. 그때 가서 작업을 해주는데 12ton 차에 옝메리를 통째로 싣고 올라가는 길에 천천히 와서 하는데, 처음서부터 기어를 2단 1단으로 가서 하는데, 건너가다가 기어 변속을 한다는 것이 차가 울컥하면서 그 문짝이 헐레레 하고 열어지는 바람에 옝미리가 한 반 이상 흘려 내렸다. 그때 사람들이 개울을 보더니 개울이 하얗타반 이서 그때 현북 사람들이 옝메리를 잘 주워 먹었고. 나도 좀 갖고 오긴 했지.
그때는 그레이다가 가지고 많이 지원 나가면 대부분 비포장이어서 수산 가는 데서 일을 했는데, 서문리 김창호씨가 군청 지역계획계장 할 때 그 분이 술을 진짜 좋아 했지요. 그리고 손양면 동호리와 상운버덩에서 새마을사업 일을 제일 많이 했는데 일이 끝나면 닭 잡아 주고 촌에서 누룩으로 만들 막걸리 대접도잘 받아먹었으며, 6개 면에서 광업소 도움을 안 받은 곳이 없었고. 동우대학교 운동장 거기도 내가 그레이다로 닦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