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록(遊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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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록(遊山錄)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
우리나라에 세 개의 이름난 산이 있는데 영남지역의 지리산, 관서지역의 묘향산, 동해의 금강산이다. 이 세 산 중에서 금강산이 가장 좋다. 그래서 중국인이 원하건대 조선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네 라는 시구가 있기도 하다.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가 우리나라의 최고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한 번 차근차근 유람하면서 평생의 소원을 풀어보고 싶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숭정 1628년 무진,
형조참판으로서 외직에 보임되기를 강력히 요청하여 강릉부사가 되었다. 정월에 업무를 시작해 공무와 개인적 일로 분주하였는데 4월에 조금 일이 정리되었다. 그래서 내 나이 예순에 지금 풍악산을 유람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훗날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뛰어난 경관을 탐방하기로 결심하였다.
두 아들 현기와 선기, 그리고 박시창을 데리고 12일(계묘)에 출발하였다. 연곡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해질 무렵 동산에 도착하였다. 권칭과 정기평이 술을 가지고 만나로 왔다.
13일 갑진.
아침 일찍 동산을 출발하여 상운역의 유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날이 저물어 부지런히 낙산사에 도착하였다. 양양부사 조위한(자는 지세)은 나의 오랜 벗이다. 이화정에서 미리 기다리며 술과 음악을 준비하였으나 비가 내려 빈일료를 거둬들여 잔치를 즐기다가 날이 어두워 그만 두었다.
낙산사는 신라 때 신승 의상이 창건하였다. 뒤쪽 전각에는 관음보살의 소상이 있는데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선방 벽에는 안견의 산수도가 있었다. 사찰이 빼어나 경치는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금산사, 감로사 등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어느 곳이 더 절경인지 알 수 없다. 사찰의 동쪽에는 의상대가 있고 의상대 북쪽에는 관음굴이 있는데 익조가 후사를 얻기 위해 기도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14일 을사.
아침에 낙산사를 출발하여 청초호를 지나고 영랑호에서 잠시 쉬었는데 매우 맑고 빼어났다. 청간정에서 점심을 먹고 만경대에 올랐다. 이 또한 관동팔경의 하나로, 직접 보니 자못 듣던 것만 못하였다. 청간정에서 20여 리를 가자 뚝 끊어진 산 하나가 바닷가에 우뚝 서 있었다. 역 관리인에게 물으니 능파대라 하였다. 수레를 돌려 올라가 조망해 보니 동쪽은 큰 바다이고 해변의 경치는 대개 비슷한데 서쪽을 바라보니 좌우의 호숫물이 포구로 넘쳐 흘러들고 있었다. 논은 막 써레질을 하여 물이 평평하게 차 있고 작은 다리가 시내 위에 가로놓여 있었다. 어촌이 늘어선 곳에는 저녁연기가 막 피어 오르고 있었다. 겹겹의 산과 봉우리가 구름 사이를 뽀족뽀족 솟아있고 석양이 빛을 숨기며 사그라지니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내가 앞쪽의 광경이 뒤쪽보다 못하다고 하니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또 10리를 가니 선유담이 있었다. 못의 크기는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앞에 산이 빙 둘러 기다란 산등성이가 뻗어져 물속으로 들어가니 호수의 좌우가 띠를 두른 듯 비치었다. 큰 소나무 수백 그루가 앞뒤로 빽빽하게 서 있어 맑게 트인 시야는 비록 영랑호만 못하였지만 그윽하고 깊숙한 느낌은 좋아할 만하다. 평론을 잘하는 사람도 우열을 쉽게 가리지 못할 것이다.
해가 저물어 간성군에 이르렀다. 간성군수는 오랜 친구인 김상복[자는 중정이다]으로, 업무로 착출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진실로 한 번의 만남에도 운수가 있음을 알겠다. 아쉽게도 그 집 하인의 접대가 매우 박절하여 더욱 한스러웠다. 달빛을 받으며 영월루에 올랐다. 유량은 남루에서의 흥이 얕지 않았지만 나는 감상할 마음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15일 병오.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아침 일찍 간성을 출발하여 20여리를 가서 화진포에 닿았다. 그 지역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운근현이었는데 함몰되어 화진포가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면 물밑의 집들이 어렴풋이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황당하여 믿을 수 없었다. 대개 모래섬과 번갈아 나타나는 모습과 맑고도 그윽한 정취는 경포호와 비교하면 경포호가 아마도 격이 낮을 터인데 그 명성이 도리어 우위에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또 대의 좌우에는 좋은 논밭이 많았다. 왼쪽은 군사 이경순의 집이다. 이경순은 시문을 잘했으며 늙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그 집을 지키지 못해 서 온 가족이 이사했으나 그 터는 아직 남아 있었다. 오른쪽은 군사 이연지의 집인데 모두 사둘만했다. 그 곁에는 마전도 많아 빌려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머물러 살고 싶은 생각있었지만, 누가 나에게 산을 살 돈을 주겠는가.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정오가 다 되어 열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밥을 먹었다. 무송도를 지나면서 잠시 명파역에서 쉬었다. 송도를 거쳐 대강역에서 점심을 먹었다. 무송과 송도의 뛰어난 경관은 대략 만경대와 다르지 않았다. 어제 저녁 박시창이 간성사람들의 푸대접에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말하기를 “언제 고성군의 경계에 당도하겠습니까. 고성군에서는 반드시 성대하게 갖추어서 대강역에 나와 대접할 것이니 어찌 이처럼 적막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데 대강역에 이르니 역참에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승려의 잿밥을 미리 기대하다가 배불리 먹지 못한다더니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서로 배를 움켜 잡고 크게 웃었다. 한 참 있다가 음식을 차려먹고 나니 짙은 안개가 하늘을 덮고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대강역에 출발하여 감호로 가다가 전도사 정전의 정자에 올랐다. 네모난 호수와 바위의 봉우리가 맑고도 빼어나서 좋아할 만하다. 아 이런 강호의 절경을 가지고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여전히 벼슬을 구할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바닷길을 따라 십 여리를 가니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른바 현종암이다. 집처럼 둥그런 바위 구명은 눈비를 피할 만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오백 나한이 바다에서 나와 석실에 기거하다가 왼쪽 바다에 정박시켰다. 그래서 위에는 현종암이 있고 바닷가에는 복주암이 있고, 서쪽에는 계주암과 곡포암이 있는데 모두 신성의 옛 자취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황당하여 다 기록하지 않는다.
마침내 산을 내려가서 남강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뱃사람이 배를 준비시켜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 북쪽 위에 불빛이 반짝거려 이를 따라 강을 건넜다. 고성군수 허계(자는 명로이다)는 나와 대대로 교분이 있는 사이로, 오래도록 언덕위에 서서 목을 빼고 기다렸고 매우 정성스럽게 여독을 위로 하였다. 언덕에 올라 마주하니 서로의 반가움이 알만 했다. 그 자리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해산정으로 들어가 서너 잔 더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같이 간 사람들은 모두 축축한 곳에 있게 되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정자의 빼어난 경관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16일 정미.
아침 일찍 일어나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바다와 산의 절경을 품평하고 싶지만 바다 안개가 자욱하더니 날이 저물어서야 개었다. 동쪽으로 바다 어구를 바라보니 바위 한가운데 우뚝 서 있어 마치 물살이 부딪히는 지주석과 같았다.
남쪽으로 바위로 된 세 붕우리가 눈앞에 늘어서 있고 서남쪽으로 금강산이 옥처럼 서 있어 푸른 빛이 눈에 가득했다. 동쪽과 서쪽에는 두 개의 거북바위가 있었다. 하얀 비단 같은 큰 강은 너른 들판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평가하는 사람들은 죽서루보다 경치가 뛰어난데 관동팔경에 들지 못함을 괴이해 했다. 황혼녘에 명로와 함께 고산대에 올랐다가 달을 기다리려고 강에 배를 띄웠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가려 이경이 되도록 달빛을 볼 수 없었다. 각각 술을 서너 잔 씩 마시고 실망하여 돌아왔다.
17일 무신.
밥을 먹을 후 명로와 함께 삼일포에 갔다. 고을 사람들이 미리 배를 준비해 기다리고 있어 이내 그 배를 타고 갔다. 명로가 왼쪽 산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양봉래가 시를 쓴 바위입니다.”라고 하였다. 븕은 글씨가 있는 곳에 배를 정박하여 이른바 ‘단서’를 보니 ‘술랑도만석행’이라는 여섯 글자였다. 처음에는 글자의 흔적이 매우 선명했었는데 어느 완고한 군수가 유람객이 구경하는 것을 싫어해 부셔 버렸다. 그래서 ‘술남석’ 세 글자가 선명하데 나머지는 지워졌다. 단서의 오른쪽에 허백당의 시가 있다. 바위를 움푹 파 내고 그곳에 시를 새긴 돌을 끼워 넣었다. 그 위에 매향비가 있다.
북쪽으로 가서 사선정에 올랐다. 정자주변에는 큰 소나무 7-8그루가 있고 소나무 속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자의 뛰어난 경관은 유람객들이 모두 칭송하지만 몽천의 경치만 못하였다. 눈앞에는 바위 봉우리가 겹겹으로 솟아 있었다. 삼일포의 절경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어 진실로 천하의 절경이다. 유람온 사람들이 사선정만 말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
사선정 뒤쪽 바위에 이름을 쓰고 따르는 사람에게 새기게 하였다. 다시 사선정에 올라 몇 잔을 마시고 저물에 해산정으로 돌아와 잤다.
18일 기유.
일찍이 밥을 먹고 해산정을 출발하였다. 나는 먼저 두 아들인 현기와 선기, 명로의 아들 두향, 박시창과 함께 발연에 이르렀다. 하인에게 물놀이를 시키고 수백 걸음을 더 올라갔다. 바위에 양사언이 쓴 봉래도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시 3수가 있다. 첫 번째는 남강의 시이고, 두 번째는 창해의 시이고, 세 번째는 자동의 시였다. 글씨가 바위 위에도 새겨져 있는데 필체는 양봉래의 것과 비슷하지만 누가 썼는지 알 수 가 없다. 이끼를 걷어내고 겨우 자획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지나서 명로가 찰방 이순과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고 왔다. 이때, 짙은 안개가 하늘에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명로가 말하기를 “이런 짙은 안개는 유람에 가장 방해가 된다.”라고 하여 내가 농으로 “어찌 정직하게 기도하면 하늘과 통하는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한퇴지가 여산에 올랐는데 마침 가을 그믐이었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뭉친 구름과 짙은 안개 산허리를 감추니 비록 정상이더라도 어찌 능히 다 볼 수 있겠는가. 마음을 가라 앉히고 말없이 기도하면 반응이 있을 것이니 신명이 어찌 정직하게 기도하면 감동하지 않겠는가.
서로 농담하며 웃었다. 마침내 상운 찰방과 작별하였다.
소령고개를 오르자 미풍이 언뜻 불어 안개를 사라졌다. 흰구름이 튼 골짜기를 가득 메우니 마치 흰눈이 막 대지를 뒤덮은 듯 은하수가 골짜기를 가득 채운 듯 하였다. 많은 봉우리 모습은 마치 땅에서 피어난 연꽃 같았다. 하늘에 구름 한점 없고 석양이 물들어 밝은 빛이 반사되니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내가 다시 농으로 명로에게 “이것이 하늘과 통한 방도가 아니겠는가.”하자 명로가 웃으면서 이번 유람에 제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경관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계수대와 환희재를 지났다. 이 고개는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 한 층을 오르면 다시 한 층이 더 있다. 바로 20여리를 올라가 비로소 백전암에 도착하였다. 승려 언기를 만났는데 승복을 입은 모습이 매우 위엄하였다. 그와 더불어 말을 해보니 자못 도리를 알고 속세의 얽매임에 벗어나 대개 승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었다.
19일 경술.
일찍 일어나 골짜기 입구를 내려다 보니 흰 구름이 푸른 산과 뒤섞여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언기대사가 그것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구름이 이처럼 일어나니 해질녘 반드시 안개가 자욱하게 있을 것이다. 만약, 구정봉에 오르시면 모름지기 일찍 가세요.”하였다.
마침내 재촉하여 밥을 먹고 출발하여 적멸암과 백운암을 지나 구정봉에 올았다. 산아래 흰 안개가 멀리 겹겹이 산 너머까지 가리고 있어 보이는 것은 곁에 있는 바위 봉우리 뿐이었다. 오후에 짙은 구름이 다 걷히자 안팎의 많은 산들을 셀 수 있었다. 나는 명로와 더불어 각각 재미삼아 절구시 1수씩 짓고 점십을 먹었다. 바위에 이름을 쓰고 따르는 사람에게 이를 새기게 하였다. 적멸암으로 돌와와 저녁에는 서쪽 대에 오랐다. 봉우리가 둘러 에워싸고 저 멀리 은신대, 만경대, 불정대 등이 보였다. 서쪽의 대는 호은대하고 하였다.
20일 신해.
적멸암에서 일찍 출발하여 대장암에 이르렀다. 돌길이 매우 험준하였다. 구추령을 넘어 상원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일찍이 무학대 절경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 가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가마 매는 승려들이 싫어하여 이를 숨겼다. 안문재를 지나 십 여리를 가서 비로소 이를 알고 깜짝 놀라 모두 탄식하였다. 내가 먼저 출발하였는데 따라오는 사람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시낵사 작은 바위에 올라가 기다렸다. 바위 앞에 작은 폭포가 있는데 맑고 뛰어나서 볼만 했다. 명로와 두 아들이 뒤쫓아 도착하여 함께 구경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만약 이 대가 경기지방에 있었다면 반드시 사람마다 칭송했을 것이다. 다만 이 산에 있어 시냇가에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물줄기 하나도 절경으로 사람이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는냐에 달린 것인가. 그러나 나는 명로와 함께 다행히 이 대에서 반나절을 완상했으니 이름을 지어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李許臺라고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밥을 물에 말아 먹고 원적암에 도착하였다. 땅의 지세는 사방에 바위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고 사찰은 황폐해 진지 오래라 돌부처만 감실에 있다. 드디어 청소를 하고 앉아 비로소 비로봉에 오를 것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구룡연은 함께 볼 수 없었다. 마침 절벽에 써 놓은 권제중, 정0숙, 조휴 등의 이름을 보았는데 모두가 구룡연에서 비로봉으로 올랐다고 언급하였다. 승려 종원에게 물으니 과연 좁은 길이 있어 옛날 원적암에서 구룡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서로 기뻐하며 박수를 치고 다시 구룡연을 완상을 논의하였다.
21일 임자.
원적암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고 남쪽으로 시내를 따라 5리 쯤 가자 돌길이 매우 험준하였다. 비로봉에 이르니 산이 무너져 돌무더기가 쌓여있는데 이제 무너진 것은 하얗고 예전에 무너진 것은 검었다. 험하게 쌓인 돌들이 거의 천 길이었는데 우리는 모두 그 돌을 잡고 엉금엉금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길이 끝나고 바위의 틈이 벌어져 그곳으로 들어갔다. 여기부터 비로봉 정상까지 동쪽은 성과 같은 바위고, 서쪽은 평평한 토양이었다. 잡목을 잡고 측백, 진달래, 해송만 있는데 모두 작고 땅에 붙어 누워 자라고 있었다. 진달래가 막 피어 날씨는 3월 초순과 같았다. 날씨는 맑았다. 정오에 동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니 하늘과 맞닿아 아득히 출렁이고 있었다. 안변의 국도, 통천의 신도와 안조, 고성의 영진곶이 작은 주먹만 한 돌로 보였다. 사방이 멀고 가까운 산세가 두손을 공손히 호위하듯 둘러 쌓고 오래되어 얼마나 많은 바위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은 뽀족하고 봉우리가 되고 낮은 것은 고개가 되기도 하였다.
세상에서 1만 2천 봉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눈앞에서 가리킬 수 있는 영흥의 검산, 안변의 황룡산, 양양의 설악산, 강릉의 오대산, 삼척의 두타산, 원주의 치악산, 양구의 저산, 춘천의 청평산, 지평의 용문산, 영평의 백운산, 양주의 천보산, 송도의 성거산, 철원의 보개산, 해주의 수양산, 장연의 구월산, 등이 있는데 모두 너무 작아 다 셀 수 없다.
가까이 있는 작은 산들이 수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의 기이한 모습을 이름 지어 표현하기 진실로 어려웠다. 바위봉우리들이 높이를 다투고 뛰어남을 경쟁하는데 사람이나 귀신 모습 같기도 하고 새나 짐승의 모습 같기도 하였다. 앉아 있는 듯, 서 있는 듯, 우러러 보는 듯, 굽어보는 듯 하였다. 달려가는 모습은 적에게 달려드는 군사 같기도 하고,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은 조정에서 알현하는 선비와 같았다. 다양한 색깔이 드러날수록 기이하고, 모든 것이 내 지팡이와 발아래 있어 진실로 천하의 장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구정봉, 일출봉, 월출봉, 미륵봉, 혈망봉, 원적봉, 설응봉, 안문봉, 영랑재 등이 뭇 붕우리 위에 가장 높게 솟아 있었다. 나머지 작은 봉우리들은 함께 온 스님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를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녁에 동쪽과 서쪽에 한 줄기 검은 기운이 일어나 한 필의 비단 같이 널려있었다. 한참 후 비가 되어 산과 바다를 덮었고, 비로봉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가끔 보슬비가 물결처럼 밀려와 조금씩 뿌려주는 시야가 오히려 선명하였다. 내가 명로에게 “이미 맑은 날의 경치를 보았고, 또 비 오는 경치도 보았으니 하늘이 우리에게 베푼 것이 많네.”라고 하였다. 서로 기뻐하여 축하해 주었다. 밥과 술을 하고 잠시 후 바위 이름을 새겼다.
저녁이 되어도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였다. 날씨가 개자 하늘이 맑아 저녁놀이 산을 비추자 산사의 기운이 더욱 아름다웠다. 두보의 ‘비가 개도 산은 그대로 이고, 푸름이 끝나니 골짜기가 새로운 듯’이라는 시구가 경치와 아주 흡사하니 진실로 뛰어난 작품이다. 원적암에서 잤다.
22일 계축.
아침에 허두향은 다시 조정으로 향했다. 우리는 원적임을 출발하여 비로암에서 잤다. 암자는 비로봉을 등지고 일출봉과 월출봉을 마주하고 있고 사찰은 폐허가 되어 승려가 없었다.
23일 갑인.
일찍 비로암을 출발하여 구룡연으로 가는 길을 향하였다. 길 가의 잣나무에 검은 터럭이 매달린 것을 보았다. 승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것은 비휴가 가려운 곳을 나무에 대고 긁을 때 빠진 털이 매달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큰 고개를 넘어 20여 리 쯤 가서 구룡령으로 들어갔다. 시냇가 바위는 깨끗하고 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다. 짙은 안개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바위봉우리고 길이 나 있어 곧바로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 아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가 있었다. 발을 딛기가 너무 어려웠고, 손으로 잡고 오르기에 위태하였다.
구룡연의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곳을 넘은 후에 들어갈 수 있다. 명로와 두 아들, 그리고 박시창은 모두 잡고 발 끌면서 올랐다. 나는 산 아래에서 그들처럼 잡고 오르려 하였으나 왕양이 수레를 돌린 일을 생각하며 마침내 억지로 오르지 않았다. 밥을 물에 말아 먹고 있으니 한참 후 두 아들과 박시창 등이 세 번째 못까지 보고 돌아와 말하기를 “수석이 뛰어남이 이 금강산에서 제일이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명로가 관북지방으로 난 길을 따라-관북지방의 길은 구룡연을 따라 곧장 고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고성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얼마 후 길을 잃어 어쩔 수 없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서로 끌어주면서 묘길상에 들어갔다, 미륵대를 거쳐 저녁에 마하연에 이르렀다. 뒤쪽에는 중향성이 있고 앞쪽에는 혈망봉, 왼쪽에는 반야대, 오른쪽에는 향로봉이 있었다. 혈망봉 서쪽에 승려가 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의 바위가 있는데 담무갈이라 하였다. 나옹이 이 절에 와서 머물 때, 항상 뜰 오른쪽에서 예불을 올려서 지금도 승려들은 감히 그 곳을 밟지 않는다. 그 곳에 갈대가 났는데 많은 승려들이 명당초라 하였다. 이런 것으로 어리석은 속세인을 미혹시키니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절 오른쪽에 있는 작은 산기슭이 천축대인데 담갈봉과 바로 마주 하고 있다. 이 날 저녁 비가 내렸다.
24일 을묘.
아침에 마하연에서 길을 나섰다. 암자 앞의 시내와 수석이 맑고 깨끗하여 볼만하였다. 2리 쯤 가면, 사자암이 있다. 여기부터 수석이 더욱 기이하다. 화룡담, 선담, 진주담, 벽하담을 지나 보덕굴에 올랐다. 보덕굴은 보살을 봉안한 집이다. 구리기둥과 쇠사슬로 엮어 묶은 것이 매우 기교하고 정교하였다. 벽에는 돌아가신 형과 심사경의 이름이 쓰여 있어 옛 감회를 이길 수 없었다. 뒤쪽의 법당도 맑고 깨끗했다. 절구 몇 수가 있다.
비오는 가운데 꼳 흑룡담으로 내려가 명로와 앉아 이야기 하였다. 잠시 후 다시 세건천을 지나니 절구처럼 오목하게 패인 바위가 있었다. 보살이 머리를감았다는 곳인데 그 말이 황당하여 믿을 수 없었다. 돌 길이 경사지고 미끄러워 발을 내딛기 어려웠다. 바위를 파서 구멍을 만들고 포도 넝쿨로 끝을 묶어 놓으니 오가는 사람들이 잡고 다녔다.
만폭동에 이르니 바위에 ‘蓬萊風樂 元化洞天’이라는 초서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봉래 양사언이 쓴 것이다. 그 위에 금강대가 있었다. 옛날에는 학의 둥지가 있었다. 학이 날아 오지 않은 지가 벌써 4, 5년 되었다.
또 2-3 리를 가서 표훈사에 도착했다. 오현봉에 둘러쌓여 혹자는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라고 하였다. 중당에 반야전이 있는데 멋있는 구름속에 부처가 있었다. 왼쪽으로는 3-4척 높이의 구리탑이 있다. 뒤에는 나한전이 있다. 왼쪽에는 옥으로 만든 불상 16구가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로 만든 불상 16구가 있다. 모두 기이하다. 중간에 커다란 금불상이 합장의 모습을 하고 서 있다. 동쪽 윗방에는 요월헌, 석쪽 윗방에는 세심헌이 있었다. 선당은 적조라고 이름하고 승당은 정려라고 하였다. 앞에는 작은 누각이 있어 자녁에 올라가니 우레가 치고 우박이 많이 내렸다. 기기암, 삼장암, 신림암, 청련암 등이 모두 가까이 있었다.
처음에는 두루 보려고 했으나 비가 내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녁 무렵 날씨가 조금 좋아져 가까스로 정양사에 이르러 헐성루에서 잤다. 날이 어두워져 많이 볼 시간이 없었다. 중국 승려 태준이 찾아왔다.
25일 병진.
아침 불전으로 올라가 나옹의 의발과 사리를 보았다. 사리는 푸른 구슬 한 알인데 좁쌉 크기 였다. 유리통에 보관되어 있었다. 통의 크기는 개암나무 열매만 하였다. 금으로 된 통을 곽에 넣어 솜으로 채우고 오색문양의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로 많이 싸서 검은 함에 넣어 두었다. 불전 앞에는 육각형 전각이 있다. 그 안에는 돌로 만든 약사여래상을 봉인했다. 사장 벽에는 천왕과 신승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당나라 승려 오도자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승려가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이 돌부처가 갑자기 땀을 흘립니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시 모두 그랬다.”라고 한다. 불전 뒤에 나옹의 영당이 있고 영당 뒤에는 부도가 있으며 오른쪽에 나한전이 있다. 사찰 밖이 바로 진헐대이다. 지금은 채소밭이 되어 버렸다.
밥을 먹은 후 천일대에 올랐다. 정송강이 “여산의 진면목이 모두 이곳에 있다.”고 한 곳이다. 산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 대송라암과 소송라암에 도착했는데 두 암자는 서로 나란히 가까이 있었다. 소송라암에는 승려 신감이 곡식을 먹지 않고 혼자 살았다. 형색은 매우 파리했지만 얼굴에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방으로 들어가니 불상의 오른쪽에 지공의 영정이 있고 무학과 나옹이 좌우에서 모시고 있었다. 나옹의 모습은 정양사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지공은 관을 쓰고 두 조사는 모두 삭발하고 무학의 오른쪽 눈에 하얀 점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망고대로 향하였다. 고개 하나를 올라 쇠사슬을 잡고 도착해 보니 또 쇠사슬 아래 드리운 것이 두 곳 이였다. 선기와 박시창이 먼저 올라가고 명로가 뒤따라 올랐다. 현기도 잡고 올라가다가 쇠사슬 하나도 미처 다 오르지 못하고 다시 내려와 말하기를 “이 길은 비로봉보다 더 위험한데 보이는 것은 정양사의 천일대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올라가지 말라고 하였다. 얼마 후 선기가 뒤에 와서 역시 말렸다.
비가 오려고 하여 남쪽의 상운암으로 내려왔고, 명로와 박시창도 뒤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비를 피하고 남쪽 대에 올랐다. 동쪽, 서쪽, 남쪽에 봉우리가 다투어 솟아 있고 골짜기는 밝고 깊었다. 그 경관은 은선대, 천일대와 서로 경쟁할만 했고 불정대보다 좋았다.
사람들이 망고대의 명성만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가 보았다. 하지만 끝내 기이한 경관은 없었다. 이 남쪽 대의 뛰어난 경치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서로 탄식하면 의아해 했는데 그 이름이 오선암이라고 했다. 내려와 백탑동 길을 따라 넝쿨을 잡고 오르는데 박을 딛지 못하였다. 줄을 내려 매달은 곳이 10여 곳이고 그 아래 천길 낭떨어지였다.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뼈가 부셔저 죽게 될 것이다. 비로봉, 구룡령의 위험은 이에 비하면 마무 것도 아니다. 훗날 이 산을 유람하는 우리 자손들은 삼가 이 길을 지나가지 말아야 한다. 아주 긴 폭포가 있는데 가장 절경이었다. 나머지 아름다운 곳도 완상할 만 하다. 이어 영원동으로 들어갔다. 시내와 바위의 경치와 붕우리의 기이함이 풍악산에서 최고였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갈 길도 바빠 스치듯 지나서 영원암에 도착하였다. 뜻 앞에 한련, 작약, 목향, 등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암자는 그윽하고 깨끗했다. 또한 도승 보주가 5년째 곡식을 먹지 않고 겨우 숨만 이어가고 있었다. 선기가 위로하며 “도를 깨우치는 일의 성패는 곡기를 끊었는데 있지 않고 오직 부지런히 공부하는데 있습니다. 어찌 곡기를 끊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승려가 합장하고 사례하였다.
26일 정사.
일찍 일어나 둘러보니 시왕본가 사자봉이 늘어서서 뛰어남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막 개어 산 빛이 매우 깨끗하였다. 밥을 먹은 후 1-2리 쯤 가니 시내와 바위가 매우 아름답고 운치가 있었다. 영원동에서 나와 5리쯤 가니 현붕람에 도착하여 이름을 쓰고 서쪽 대에 올라가니 산세가 띠어나 골짜기가 깊었다. 바위에 파선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관찰사 숙우공[오숙]의 호이다. 명로가 관청의 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그와 작별하였다. 골짜기를 벗어나 다시 5리 쯤 가니 대궐터가 있었다. 을사년(1605)의 수해로 그 위에 돌이 어지럽게 쌓여서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또 지옥문이 있는데 소위 지옥문은 성문처럼 생겼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태자가 간언하였는데 왕이 듣지 않아 달아나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었다. 고려 사람들이 태자를 위해 성문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성문이 지금까지 훼손되지 않아 불가에서 억지로 이름 한 것이다.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큰 화살촉을 세워 놓은 것처럼 구름 끝에 뽀족하게 솟아 있는 것이 명경암이다. 그 아래 맑은 못은 황천강이다. 시냇가의 큰 바위는 업경대이다. 업경대 앞에 지장봉이 있다. 이 모두가 상식을 벗어난 말로 이름하여 무지한 백성을 현옥시킨다. 어찌 크게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곳은 이른바 시왕백천동이다.
또 5리를 가서 시내를 건너니 그 시내를 따라 내려가니 바위 빛이 푸른 옥과 같았다. 위에 작은 폭포가 있다. 그 아래 맑은 못을 이루었다. 물과 바위가 매우 아름다웠다. 길 옆 외진곳이라 사람들이 이런 경관이 있는 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우연히 발견하고 마침내 그 못을 벽옥담이라 이름 지었다. 장안사 입구까지 1리쯤 되었다.
장안사에 들어가니 이층전각이 있다. 그 위에 편액이 있다. ‘대웅지전’이라고 하였다.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전각 안에는 감실 3칸이 있고 위에는 금빛 용이 그려져 있는데 솜씨가 정말 뛰어나다. 중간에는 일곱 불상을 진열했고 그 사이에 작은 불상이 놓여 있었다. 불상 앞을 꾸며 놓은 장식 또한 모두 화려했다. 화로와 바리는 구리 재질에 은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양식이 고상했다. 무진등이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공교로웠다. 모두 일찍이 보지 못한 것들로 세상에 없는 기이한 볼 것이다.
대웅지전의 왼쪽에 사성전이 있는데 이층으로 아라한을 봉안한 곳이다. 좌우에 각각 불상 8구를 봉안했고 그 모습은 모두 달랐다. 기이하고 괴상하여 아름답고 추한 형상은 오묘함을 모두 표현하였다. 이것은 승려 신여가 만든 것이다. 사찰의 문에는 또 천왕 4구가 있었다. 사찰의 경치는 금강산 여러 사찰 중에 가장 미흡하지만 만들어 놓은 불상은 여러 사찰 중에 정교해서 감상하기에 최고이다. 그러나 요사채가 무너져 승려가 적은 것이 아쉬웠다. 점심을 먹고 나니 소나기가 내려 곧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잠시 뒤 비가 개어 동쪽으로 2-3리 쯤 가서 명연을 지나 안양암에 들어갔다. 이 사찰은 벼랑에 바위를 깎아 불상 세 구를 새기고 벼랑에 의지해 불전을 지었다. 그 아래 요사채인데 폐사되어 승려가 없었다. 적벽에 돌아가신 형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슬픈 감정을 이길 수 없어 오른쪽에 내 이름을 썼다.
다시 삼일암에 올랐다. 옛날에 한 승려가 사흘 머물고 있다가 문득 스스로 도를 깨우쳐 암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고개 하나를 넘어 운지암에 들렸다. 암자가 고요하고 깨끗하고 경치가 그윽하여 삼일암과 비슷하였다. 3, 4리를 가서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앞쪽에는 훤히 보였는데 바위 봉우리가 빽빽이 늘어서서 그 자태들을 자랑하였다. 풍악산의 정수와 빼어난 경관은 이 중에 모두 있었다. 내 생각에 금강산의 경치가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런데 칭송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림암을 지나 표훈사로 돌아 왔다. 천덕암까지 시간은 충분하였다. 가마를 메는 승려들이 힘을 다해 어쩔 수 없이 묵었다.
27일 무오.
표훈사에서 기기암을 거쳐 삼장암에 도착했다. 승려 처명이 홀로 거주하는데 또한 곡식을 끊었다. 북쪽으로 5리쯤 올라가서 개심대에 올랐다. 아침 안개가 사방에서 운집하더니 눈앞의 바위 봉우리들을 모두 가렸다. 길을 안내하는 승려 종원이 안개가 점점 내려앉아 전망을 방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인들에게 시야를 가리는 잡목을 베개하고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뒤 안개 기운이 흰 구름으로 변하여 점점 하늘로 올라갔다. 비로봉, 영랑봉, 혈망봉, 망고봉, 백마봉, 일출봉, 월츨봉 등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었다. 날씨가 맑아 조금도 가리지 않고 산과 산골짜기의 형세가 모두 내 발 아래 펼쳐지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서로 축하하였다.
남추강이 ‘개심대의 경치는 망고대와 더불어 우열을 다툰다.’고 했다. 과연 거짓이 아니다. 이어 동쪽 천덕암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내원통암을 들러 능인암을 도착하였는데, 모두 속세와 떨어진 산중의 암자들이었다. 능인암의 동쪽에 있는 대에 오르니 산수의 깨끗하고 깊음이 현불암과 대적할 만했다.
시내를 따라가다가 만폭동에 못 미친 곳의 골짜기 물과 바위가 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기이했다. 바위 웅덩이 하나를 만났는데, 맑고 투명해서 바닥이 보였다. 그 못을 인월담이라 이름 하였다.
또 수십 걸음을 내려오니 폭포가 몇 길을 나는 듯 흘러내려 그 아래에 맑은 못을 이루고 있었다. 그 폭포를 비류라 하고, 그 못을 청학이라 이름 하였다. 폭포 이름은 내가 짓고, 못 이름은 숙우가 지었다. 그리고 바위에 이름을 썼다. 다시 만폭동에서 곧장 만회암에 도착하니 승려 원오가 가사를 입고 맞이하여 절을 하였다. 그는 산중의 도승으로 곡식을 먹지 않고 홀로 살았는데, 승려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다.
고개 하나를 넘어 백운암으로 들어가니 늙은 승려가 살고 있었다. 죽림암, 만회암, 백운암은 모두 내금강에서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백운암의 경치는 청련암에 버금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불상의 왼쪽에 한 폭의 관음변상도가 걸려 있었다. 검은 비단에 은으로 그렸는데, 금빛 얼굴에 푸른 머리를 한 부인이 오른손에 대로 만든 광주리를 끼고 있었고, 그 광주리 안에는 물고기가 있었다.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 아래의 그늘에 서 있는데, 그림의 품격이 매우 뛰어났다.
일찍이 상백운암은 그윽하고 깊고 바위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가는 길이 험하다고 들었는데, 시험 삼아 하인 특에게 가서 보게 하였다. 그가 넝쿨을 잡고 올라가 다시 봉우리 꼭대기를 넘어 작은 암자로 내려가서 보고, 승려 세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반야봉을 지나 마하연에 돌아와 머물고 있으니, 명로가 술을 보내왔다. 유점사 주지 영희가 맞이하러 왔다.
28일 기미.
마하면을 출발하여 수재에 도착하니, 외산의 승려가 마중을 왔다. 내산의 승려와 작별하고 은선암에 도착해 승려 수감을 만났다. 점심을 먹은 후 은선대에 올랐다. 앞에는 선문동의 십이폭포가 마주하고 있었다. 골짜기가 넓게 탁 트여, 벼랑이 기이하고 빼어났다. 상령대암을 지나 만경대에 올라갔는데 박시창은 높고 멀다고 싫어하여 따라오지 못하였다. 만경대의 왼쪽으로 바위봉우리를 마주하고 있으며-내․외산이 아울러 보였다- 오른쪽에는 흙산이 있고, 앞에는 큰 바다가 있으며, 골짜기는 넓게 트여 시야가 막힌 곳이 없었다. 구정봉과는 우위를 겨룰 만하지만, 개심대나 망고대와 견줄 수 없었다. 산 중의 사찰 가운데 손으로 가리킬 만한 것으로는 동북쪽의 율사와 은선암, 서남쪽의 향로암, 북쪽의 양진굴, 남쪽의 유점사와 종련암이 있고, 자월암과 세 영대암은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올 때 양근의 선대 묘소와 재실을 지키는 승려 원오와 승려 신명이 만나러 왔다. 또 내려가 자월암에 도착하니, 승려 법종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중령대암으로 가니 승려 도화가 암자를 지키고 있었으며, 하령대암은 허물어져 승려가 없었다. 운수암에 도착해 승려 응상을 만났다. 그는 사명대사 유정의 법통을 이은 승려로, 3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나와 동갑이라고 했다.
오는 길에 있는 선담은 위와 아래의 수석이 맑고 깨끗하여 좋아할 만했다. 조계암에 들르니, 길가에 부도 3구가 있었다. 첫 번째는 휴정의 것이고, 두 번째는 자휴의 것이고, 세 번째는 보운의 것이라고 했다.
저녁 무렵 유점사에 도착해 산영루에 올랐다. 노승 법견을 맞이해 첨례했는데, 도행이 매우 높았다. 능인전에 들어갔다.-곧 법당이다- 능인전 안에는 목가산과 산골짜기를 만들어 놓았고, 그 골짜기에는 53구의 불상을 봉안했다.
유점사의 사적을 살펴보니, 바로 고려의 재상 민지가 기록한 것이었다. 53불과 동종이 서역에서 바다를 건너와 고성에 닿았는데, 종은 느릅나무에 걸리고 불상은 느릅나무 뿌리에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유점사 터였다. 고성군수 노춘이 그 특이한 내력을 기이하게 여겨 사찰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상도에 맞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번 화재를 당해, 종은 녹고 불상은 남아있다.
사찰의 크기와 화려함은 금강산에서 으뜸이었다. 왼쪽에는 응진전이 있어 나한을 봉안했고, 오른쪽에는 해장전이 있어 여러 불상을 봉안했다. 숭당은 안묵당이며 선당은 적조당이었다. 응진전 왼쪽에 향적당이 있으며, 응진전 아래에 명부전이 있는데 중앙에 시왕을 봉안했다. 그 아래에 대권당이 있고, 그 안에는 노춘의 상을 안치했다. 해장전 아래에는 골승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달마상을 봉안했다. 그 아래가 금당인데, 그 안에 담무갈상을 봉안했다. 그 아래 좌우에는 여러 요사채가 있었다. 능인전 아래에는 검은 돌로 만든 12층탑이 있었다. 진여문을 나오면 그 다음이 범종루이고, 그 다음에는 회전문이 있는데 좌우에 각각 천왕 두 구씩을 봉안했다. 그 다음은 해탈문이고 또 그 다음이 산영루이다. 능인전은 승려 영운이 창건했다고 한다.
29일 경신.
밥을 먹은 뒤 유점사에서 북쪽으로 10미리 남짓 가서 불정대에 올랐다. 그 경관이 비록 은선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또 하나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박달곶으로 내려오니 험하기가 소인곶과 비슷한데, 거리는 1, 2리가 채 못 되었다. 시내 하나를 건너 송림굴에 이르렀다. 두 개의 굴이 있는데 한 곳에는 샘이 있고, 다른 한 곳에는 크고 작은 돌부처 100여 구를 봉안했으며, 승려 경진과 신변이 살고 있었다. 그 암자 앞에는 용연이 있고, 용연 아래에는 석담이 있어 구경할 만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1, 2리를 가서 외원통사에 도착했다. 절에는 승려 10여 명이 있었고, 대웅이 수좌승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외원통사에서 송어담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수석은 모두 기이하고 빼어나서 홍취가 무르익었지만, 일일이 찾아보지는 못했다. 선담의 위아래, 경면상담과 경면하담, 징심상담과 징심하담의 경치가 최고였다. 비록 구룡연이 절경이기는 하나 이보다 크게 빼어나지는 않았다. 그 다음이 백천담과 송어담인데, 모두 유람하며 감상할 만했다. 뒷날 호사가로 하여금 찾아와 구경하게 하고자 이를 갖추어 기록할 뿐이다.
개방사에서 말을 쉬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고성군수가 사람을 보내 고산정으로 초대했다. 강가에서 회포를 풀고 각자 술 세 잔을 마셨다. 저녁 무렵 돌아와 해산정에서 잤다.
5월 1일 신유.
해산정에 그대로 머물렀다.
2일 임술.
아침 일찍 출발했다. 명로가 왔는데, 감호에 있는 최영의 집에서 작별했다. 최영의 동생 최헌과 양시익이 함께 나와 영접했는데, 양시익은 양만고의 아들이다. 열산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건봉사에서 잤다.
3일 계해.
일찌감치 출발하여 간성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중경이 관찰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간정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양양에 도착하니 지세가 태평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함께 잤다.
4일 갑자.
지세가 만류해서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출발하여, 겨우 상운역 유객당에 도착했다. 찰방 이순은 전사관이 되어 강릉에 갔다고 했다. 박시창이 고성군수에게 작별을 고하러 갔다가 고성군수가 만류하며 주는 술에 취해서 도착하지도 못하였다.
5일 을축.
일찍 출발해 동산역에서 아침을 먹고, 연곡에서 점심을 먹었다. 박시창이 왔으며, 저물녘에 관아에 도착했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홀로 지내기를 좋아하여 세속의 일을 즐겨 하지 않는다. 게다가 산수 사이에서 회포를 풀어내기를 좋아해 벼슬길에는 뜻을 끊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스스로 먹고 살 수가 없어, 부득이 과거공부를 하여 아주 적은 녹봉을 구하였다. 이미 뜻을 이룬 후에도 행적이 도성을 떠나지 않았으니, 초심을 깊이 생각하며 처연히 스스로 슬퍼했다.
지난해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면서 벗들과 함께 풍악산을 유람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란으로 인해 갑자기 성은으로 서용되어, 조정의 명령으로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가게 되었는데, 동쪽을 바라보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올해 우연히 그 오랜 염원을 이루게 되었다.
아, 사마천은 장대한 유람으로 문장을 이루었고, 소동파는 먼 곳으로 유배되었기에 영외의 문장을 지었으니, 모두 기이한 경관으로 그들의 가슴을 장대하게 했다. 나의 이번 유람은 보잘 것 없어서 지난날의 나와 똑같다.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다만 이 유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인에게 찾아가 보도록 할 뿐이다.
『潛窩集』
「遊山錄」
吾東方. 有三名山. 嶺南之智異. 關西之妙香. 東海之金剛. 三山之中. 金剛爲最勝. 故中國人有願生朝鮮國. 一見金剛山之句. 是則山之勝致. 非但爲吾東之最. 在中國亦不多得. 可知也. 願一遊歷. 以償平生之願而未果焉. 崇禎戊辰. 以刑部左侍郞. 力求補外. 爲江陵府使. 正月視事. 公私之務棼如. 至四月. 稍自釐正. 因念吾身秊迫六旬. 不以此時往遊楓嶽. 則恐有後時之悔. 遂决意探勝. 率二子 顯基, 善基 及朴時昌.
十二日癸卯.
起馬至連谷午餉. 夕抵洞山. 權稱, 鄭基平持酒來見.
甲辰
早發洞山. 午餉祥雲留客堂. 日晡直抵洛山寺. 襄陽府使趙緯, 韓持世. 卽故舊也. 預待于梨花亭. 陳酒樂. 因雨捲入賓日竂歡宴. 日昏乃罷. 寺卽新羅神僧義相所刱. 後殿設觀音塑像. 制作極精妙. 禪堂壁上. 有安堅山水圖. 寺之勝致. 則關東八景之一也. 人擬中朝金山甘露等寺. 而未知優劣如何. 寺東有義相臺. 臺北有觀音窟. 諺傳 翼祖祈嗣之處云.
乙巳
朝發洛山. 歷靑草湖. 過永郞湖少憇. 殊爲淸絶. 午餉淸澗亭. 登萬景臺. 亦八景之一也. 而所見頗不如所聞. 自淸澗行二十餘里. 有一斷山傍海陡立. 問於郵吏. 則乃凌波臺也. 回車登眺. 則東向面大洋. 海邊之景. 大略相似. 而西望則左右湖水漲入浦口. 水田新耕. 白水平鋪. 小橋橫架川上. 漁村撲地. 夕烟初起. 重山疊嶺. 矗立雲際. 斜光掩暎明滅. 眞快景也. 吾謂前面之景. 不若後面. 從者皆以爲然. 又行十里. 得仙遊潭. 潭之廣不甚濶遠. 前山環擁. 長麓走入波心. 湖水左右暎帶. 長松數百株森立前後. 淸曠雖不如永郞. 幽邃可愛. 善論者亦未易甲乙. 向夕抵扞城郡. 主倅卽舊知金尙宓仲靜. 以差員上京. 不得與之穩討. 信知一會之有數也. 悵然之餘. 其下人待之甚薄. 尤可恨也. 乘月登詠月樓. 庾亮南樓之興不淺. 而其無賞心何.
丙午
曉. 行望 闕禮. 早發杆城. 行二十餘里. 到花津浦. 土人言其初古雲根縣. 陷爲花津浦. 乘舟入湖中. 隱隱見水底屋宇. 其言不經. 不可信. 大槩洲渚互出. 淸曠幽邃比於鏡浦. 鏡浦殆在下風. 而鏡浦之名. 反在其上何耶. 且其臺之左右. 多良田美畓. 左則軍士李敬淳家. 淳能文善詩. 老死. 其子不能守. 拔宅移居. 其基尙存. 右則軍士李連之家. 皆可貨而居. 其傍又多馬田. 亦可賃耕. 思欲解官留居. 誰能與我買山錢耶. 不覺咄咄. 近午抵列山. 歇馬啖飯. 行過茂松島. 暫憇明波驛. 歷松島. 午餉大江驛. 茂松, 松島之勝. 大略與萬景臺無異. 昨昏朴時昌憤杆城人之不待. 乃奮臂曰. 何時當到高城之境也. 高城必盛辦. 出待於大江. 豈若是寥寥然哉. 及到大江. 則無一人到站上. 余戱之曰. 預期僧齋不腹飽. 非此類也耶. 相與捧腹大噱. 久之設食. 食後大霧橫天. 細雨濛濛. 因自大江發行. 趍鑑湖之路. 登前都事鄭佃之亭. 方湖石峰. 淸絶可愛. 問其主人之何在. 則方入朝求仕. 噫. 有此江湖之勝. 而當此世亂之日. 尙有求仕之心耶. 循海路行十餘里. 有石峯. 卽所謂懸鐘巖也. 石竇穹窿如屋宇. 可以避雨雪. 世傳五百羅漢自海中出. 寄寓石室. 泊舟于左海. 故上有懸鐘巖. 海邊有覆舟巖. 西有繫舟巖, 穀包巖. 皆神聖古迹. 其言不經. 皆不足記. 遂下山行到南江.
日已曛黑.
舟人艤船而待. 江北岸上. 火光明滅. 因渡江. 太守許啓明老. 卽吾世友也. 長立于岸上. 引領而望. 勞慰甚勤. 登岸而對. 相喜可知也. 立飮一盃. 相携入海山亭. 因飮數盃. 食罷就寢. 而諸從者霑濕露處. 誠可矜悶. 亭之勝槩則未暇賞也.
丁未
早起周覽. 欲評海山之勝. 而海霧蒙瞀. 日晩始霽. 東望海門. 有石巍然立海中. 如砥柱頹波. 南有石山三峰. 排列於面前. 西南金剛玉立. 蒼翠滿目. 東西有兩龜巖. 大江如白練橫拖大野之中. 評者以爲勝於竹西. 而以不入於八景爲怪云. 黃昏與明老登高山臺. 欲待月. 放舟江中. 玄雲掩翳. 迨至二更. 未見月光. 各飮數盃. 悵然而還.
戊申食後.
與明老往三日浦. 邑人已艤船而待. 遂登舟而行. 明老指左邊山石曰. 此乃楊蓬萊題詩石也. 泊舟于丹書處. 見所謂丹書. 則述郞徒南石行六字. 而其初字迹甚明. 有一頑太守惡遊客翫賞鑿破. 述南石三字分明. 其餘摸糊. 丹書之右. 有虛白堂詩. 鑿陷本巖. 納其詩石. 其上有埋香碑. 因北登四仙亭. 亭上有六七大松. 松裏安亭. 亭之勝. 遊人之所共讚. 然不若夢泉之勝. 面前石峰數重玉立. 三日之勝. 皆萃於此. 眞天下之奇絶. 而遊人之但稱四仙者何也. 題名于四仙亭之北巖. 令從者刓刻. 又還登四仙亭. 飮數盃. 薄暮還宿海山亭.
己酉
早食後發海山亭. 余先與二子及明老兒子斗向朴時昌到鉢淵. 令下人水戲. 稍上數百步. 石上有楊士彥書蓬萊島三字. 鐫刻甚精. 稍下有詩三首. 而其一南崗. 其二滄海. 其三紫洞. 書之石上. 亦爲鐫刻. 筆蹟似楊蓬萊. 未知何人所作. 洗滌苔文. 僅辨字畫. 俄而明老與察訪李錞並轡而來. 是時濃霧漫天. 咫尺不辨. 明老曰. 霧暗如此. 最妨遊賞. 余戱之曰. 豈無正直感通之道耶. 韓退之登廬山. 正逢秋晦. 作詩曰屯雲洩霧藏半腹. 雖有絶頂焉能窮. 潛心默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相與戲笑. 遂與祥雲相別. 登少人嶺. 微風乍動. 掃除霧氣. 白雲平塡大壑. 皓若白雪初霽. 漫布大地. 又如銀河澒洞. 衆峯羅列. 如拔地芙蓉. 天無點翳. 夕陽照耀. 白光相射. 盖未曾見之奇觀. 余復戱明老曰. 此非感通之道耶. 明老笑曰. 此行無吾. 何以致此乎. 過桂樹臺, 歡喜站. 其爲嶺峻極于天. 上一層. 更有一層. 凡直上二十餘里. 始到柏巓菴. 見僧彥機雲衲甚偉. 與之言. 頗識道理解外膠. 盖緇流之翹楚也.
庚戌
早起.下見洞口. 白雲與靑山相間. 氛氳而起. 機師指雲而言曰. 雲起如此. 差晩必霧氣橫肆. 若欲登九井峯. 須早往. 遂促食而發. 歷寂滅庵白雲菴. 登九井峯. 則山下白霧遠遮於重山之外. 所見只是山傍石峯. 午後重雲盡撤. 內外諸山. 歷歷可數. 余與明老各戲占一絶. 因啖飯. 題名于石. 令從者刻之. 還寂滅. 夕登西臺. 峰巒環拱. 望見隱身, 萬景, 佛頂等臺. 名其臺曰壺隱.
辛亥自寂滅早發.
至大藏巖. 石路極峻嶮. 度九雛嶺. 午餉上院. 曾聞無學臺之勝. 欲往見之. 輿僧厭而諱之. 過鴈門站. 行十餘里. 始覺焉. 莫不駭歎. 余先發而後輩未及到. 因上溪邊小臺以待之. 臺前有小瀑. 淸絶可觀. 明老及二子追到共賞. 因歎曰. 若置此臺於畿輔. 必人人稱賞. 而在此山. 故因爲溪邊之棄地. 一水之勝. 亦有遇不遇耶. 然余與明老幸得此臺. 爲半日之翫. 不可不名. 因名曰李許臺. 書而刻之石. 啖水飯. 到圓寂菴. 地勢周遭. 石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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