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체검색 닫기
양양문화원
HOME 문화원소식
  • 자료실
  • 설악산 시문
  • 자료실

    정명 6백년 미래를 잇는 양양문화원

    설악산 시문

    한계산기(寒溪山記)

    페이지 정보

    조회 320회

    본문


    ▪ 한계산기(寒溪山記)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신미(1691) 5월 6일 신묘일 맑음.

    아침을 먹은 후 조카 창흡(昌翕)과 함께 곡운정사(谷雲精舍)에서 출발하여 30리를 갔다. 오리촌(梧里村)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북쪽으로 큰 내를 건넜다. 이 내는 곡운 하류이다. 가현(加峴)을 넘으니 길이 매우 준험하고 위험하였다. 원천역(原川驛)을 지나 낭천읍(狼川邑)아래 이르러 정대보(程大寶)의 집에 잤다. 이 날 60리를 갔다.


    초7일 임진일 새벽에 가는 비를 뿌리고 저녁에 갬.

    동쪽으로 15리를 가서 대리진(大利津)을 건너서 관불현(觀佛峴)을 넘어 강을 따라 내려갔다. 들이 평평하고 넓었다. 강북쪽 인가가 그림같이 서로 비추고 있다. 정오에 방천역(方川驛)에 이르러 역리 김영업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강을 따라 장소를 바꿔 동쪽으로 10여리를 가서 서사애에 이르렀다. 나무로 만든 길이 여기서 끝났다.

      여기서 두 강물이 만나는 곳이다. 왼쪽은 곧 황벽동의 하류이고 오른쪽 강물은 만폭에서 발원한다. 왼쪽을 포기하고 오른쪽을 따라 내려가다 장소를 바꿔 또 오른쪽을 포기하니 오른쪽에 내를 만났다. 이 내가 양구현 북쪽의 물이다. 냇가에 나무 그늘이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히 앉을 만하여 조금 쉬었다 갔다. 또 두 번 방향을 바꿔어 지나서 함춘역에 이르렀다. 역리 이기선의 집에서 묵었다. 이 날 80리를 갔다.


    초8일 계사(癸巳)맑음.

    이른 아침 이부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7, 8리를 갔다. 작은 고개를 넘고 또 몇 리를 가서 부령동 입구에 들어갔다. 돌길은 돌이 많고 구부러진 곳을 올라가니 모두 몇 구비인지 알 수 없다. 큰 나무와 깊은 숲의 좁은 길은 해를 가렸다. 고개 위에서 설악산을 멀리 바라보니 안갯속에 가려 자세히 볼 수 없다. 고개를 내려가 동쪽에 몇 리를 못가서 곧 하나의 산골짜기가 나왔다.

      나무 그늘 아래를 구불구불 가서 산골짜기 반 정도 지나자 마을이 물에 접해 있었다. 앉을 만 한 곳을 찾아서 말을 쉬게 하고 식사 후 낮잠을 자고 갔다. 산이 돌아가고 물이 굽어 하나의 구비가 다 지나가면 또 한 구비가 있다. 이런 길을 30리를 가서 교탄을 건넜다. 이곳은 서화의 하류로 맑고 넓어서 가히 기쁘다. 여울은 깊고 빨리 흘러서 적은 비에도 나그네들은 다닐 수 없다. 물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긴 다리가 냇물 위에 있다. 이 다리가 인제현으로 가는 길이다. 원통역에 이르러 역졸 박승률의 집에서 조금 쉬었다가 5리를 가서 큰 내를 3번 건넜다. 이곳이 남부역의 하류이다. 고원통을 지나 한계사에 들어갔다. 모랫길과 소나무 숲은 풍악의 장안동 입구와 비슷하였다. 여러 번 내를 건너자 북쪽에 골짜기가 나왔다. 길은 비스듬히 꺾여서 절에 이르렀다.

      절이 있는 곳은 빙 둘러 쌓인 곳이라 다른 볼 만한 것은 없다. 절 뛰쪽에 있는 봉우리는 그윽하고 높아서 멀리 바라볼 만 하였다. 좌우 승방이 새로 판옥으로 지었다. 법당은 모름지기 이제 막 시작이라 스님들 10여 인이 어지러이 허둥대며 일을 하며 겨를이 없었다. 또 함께 말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밤에 동쪽 승방에서 묵었다. 이 날 80리를 갔다.


    초 9일 갑오(甲午)맑음.         

    아침을 먹은 후 남쪽 마을 입구로 나갔다. 시내를 따라 동쪽 소개촌을 지나 소나무 숲이 울창한 그늘 가운데로 지나갔다. 북쪽 모든 봉우리를 바라보니 진귀하고 빼어나 눈여겨 보았다, 그 중 한 봉우리는 특히 곧고 빼어나 하얗고 선명하다. 드디어 백련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또 마치 붉은 표지를 세워 놓은 같이 하늘로 높이 솟아 붉은 민둥산을 가리켜 채하라 하였다. 

      동행하는 스님들을 돌아보면 말하기를, 너희들은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였다. 4-5리를 가니 북쪽에 작은 내가 구불구불 흘러와서 5-6길 폭포 위에 층으로 된 소가 있는데 모양이 절묘하다.

      벼랑을 따라 올라가서 소의 중심을 굽어보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색은 엉긴 눈썹이 먹 같았다. 소의 서쪽 바위 위에 옥류천(玉流泉)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지나서 가니 오른쪽에 바위가 4개 있다. 난새가 빙빙 돌며 나는 것 같다. 절벽은 만길 높이의 기세가 충만하고 수백보가 이어져 있다. 이곳이 어쩌면 중국사람이 기록한 남쪽 봉우리는 적벽이 되었다는 것이리라.

      빨리 한계사의 옛터를 지나자 북쪽 면에 모든 봉우리들이 우뚝 서고 빽빽하게 벌려 늠름하여 가히 두려워할 만하다. 남쪽으로 가리봉이 있는데 기발하게 높이 솟아 공중에 있다. 좌우를 돌아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놀라게 하고 넋을 흔들었다. 10리를 가서 진목전에 이르렀다. 형세를 둘러보니 모인 봉우리와 겹친 민둥산이 가로 뒤쪽 면의 특수한 모양과 기이한 형태로 이어졌다.

      높은 곳은 하얀 눈처럼 빛났다. 흙 언덕 세 가닥이 북쪽으로부터 구불구불 왔다. 거의 수백 보에서 천보 정도 되었다. 가운데 가작은 우뚝 웅크리고 솟았는데 좌우 두 흙언덕은 형세가 마치 양쪽으로 부축하여 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앞산은 그리 높지 않다. 푸른 산에 초목이 무성하고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해와 달이 밝게 비춘다. 그 가운데 집을 지을 만하다. 언덕 위아래의 토지는 기름져 농사지을 곳이 매우 많았다.

     살펴보기를 마치고 일어나 수 백보를 가서 시냇가에 이르렀다. 돌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지나가는 스님을 만나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오색령으로부터 양양에 이르는데 대개 바다까지 가는 거리는 80리라고 하였다. 돌아가는 길을 찾아서 대승암을 방문하고 싶었으나 피로가 심하여 일어 날 수 가 없었다.

      유숙할 계책을 생각하니 정금(丁金)의 집에 서까래만 했을 뿐 지붕이 없었다. 정금은 곧 조카 창흡의 농노(農奴)이다. 올봄에 소를 끌고 이곳에 와서 살고 있다. 드디어 철노(鐵奴)로 하여금 나무껍질을 벗겨서 대충 위를 덮게 하였다. 아래는 풀을 깔았다.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데 별빛과 달빛이 들어와 비추고 바람과 이슬이 몸에 가득하여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날 20여리를 갔다.


    초10일 을미(乙未)맑음.

    해가 동쪽 봉우리에서 올라온다. 봉우리 빛깔이 또 밝음을 깨달았다. 작은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1리 정도 올라가니 작은 언덕 하나가 있다. 지세가 조금 높고 물이 모이는 곳이 그윽하고 또 암자를 지어놓을 만하다. 아침을 먹고 한계사의 옛터로 내려갔다. 절이 지난해 화재로 돌부처 3구는 깨진 기와와 잿더미 속에는 타서 망가졌다. 오직 돌탑이 뜰에 서 있고 작약 몇 떨기가 어지러운 풀 사이에서 활짝 피어있을 뿐이다. 마침 마을 사람들을 만나 대승암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곧 북쪽 가 두 봉우리의 돌 틈을 가리키며, 이리로 올라가고 올라가서 5리를 올라가면 갈 수 있다. 지극히 험난하여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배회하며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구름 서린 암벽이 공중에 꽂혀서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저지하였다. 돌아서 동쪽가의 작은 시내에 이르렀다. 이 시내는 폭포의 하류이다. 오래 가물어서 거의 물이 끊어지게 되었다. 폭포에는 볼 만한 경치가 없을 것을 알 수 있다. 드디어 아래고 소개촌에 이르러 시냇가에서 팔을 베고 잠깐 잤다. 솥을 걸고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원통의 박가 집에 내려와서 묵었다. 이날 40리를 갔다. 


    11일 병신(丙申)비.

    역리 김세민이 와서 만났다. 그 사람은 자상하고 분명하여 한계산의 모든 승경을 심히 자세히 말 할 수 있다. 옥류천, 아차막동, 백운암동은 모두 그가 산삼을 캘 때 직접 다닌 곳이다. 옥류천은 물이 다한 곳에 맑아 곳에 옛성터 기초가 남아 있다. 내를 따라 난 길은 끊어져서 바로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연이은 큰 내와 넓은 바위를 따라서 북쪽으로 5리 정도 가면 절벽 3면을 들러있고 터진 곳은 내를 따라 성의 지어졌는데 높이가 4-5길이 된다. 또 돌문이 있는데 완연히 그대로 존재한다. 성안의 토지는 평탄하여 거처할 만하다.

      그 북쪽 언덕을 넘으면 곧 지리곡이다. 수 십리 아래로 내려가면 삼룡추가 있다. 기이한 장관은 감상할 만하다. 아차막동은 진목전 동쪽 5리 남짓 있다.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거면 5-6길 높이의 폭포가 여러개 걸려 있다. 내를 따라 올라가면 상설악의 백운암에 올라갈 수 있다. 진목전으로부터 아차막동 입구까지 겨우 10리이다.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냇물과 돌이 맑고 그윽하며 아름다운 나무들이 즐비하다.

     5리를 가면 암자터가 나오는데 절벽을 등지고 동남쪽으로 얼굴을 향하였다. 모든 봉우리들이 빙 들러 있는데 마치 은을 무더기로 쌓거나 옥을 깎아 놓은 것 같다. 남쪽에 상필여봉이 있고 서쪽에는 입모봉이 있으며 북쪽에는 상설악이 10여리 안에 있다. 그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면 동해를 볼 수 있다.


    12일 정유(丁酉) 맑음.

    말이 지쳐서 그대로 머물렀다.


    13일 무술(戊戌)맑음

    아침을 먹고 여정을 돌렸다. 들으니 교탄이 물이 불어서 건너기 어렵다고 해서 하류를 연이어 내려가서 다리를 건넜다. 서쪽으로 돌아서 북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 부령 아래 촌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고개 위에 이르러 설악산을 돌아보니 산의 모양과 봉우리의 빛깔을 역력히 잡을 만 하다.

     웅장하게 서린 남북의 형세는 한 번 봐서 다 감상할 수 없다. 혹 말을 타고 혹은 걸으며 잠깐 사이에 고개를 내려왔다. 올라가고 올라가며, 내려가며 내려가니 그 형세가 기이하였다. 함춘 이기선의 집에 도착하여 말을 쉬었다. 저녁에 방천에 도착하여 김영업의 집에서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14일 기해(己亥)맑음.

    땅거미 질 때 비 뿌림.

      일찍 출발하여 낭천의 정씨 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원천을 지나 서쪽으로 돌아서 시내를 따라 30리를 가서 계상사에 이르렀다. 절에 고탑과 부도가 있다. 늙은 스님 서너 분이 암료를 짓는데 아직 형체를 이루지 못하였다.

      풀이 어지럽게 뜰을 덮고 있어 앉을 만한 곳이 없다. 노승 언흘은 일찍이 신수사에 보았다. 그는 일찍이 한계산의 대숭암을 유람하고 봉종과 곡연을 방문하였다. 그 경치가 능히 말 할 수 있고 또 사람의 뜻을 알았다. 초막이 매우 누추하며 향을 피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 80리를 갔다.


    15일 경자(更子)맑음.

    식전에 절을 나왔다. 서남쪽으로부터 명지현을 넘었다 지세가 높게 솟고, 길이 매우 가파르고 급해서 어렵게 내려가서 정사(精舍)에 도착했다. 해는 아직 중천에 뜨지 않았다.

      이날 20리를 갔다. 오후에 화음동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조카 창흡은 동음으로 돌아갔다.    


    『谷雲集』   



           

    「寒溪山記」 


    辛未五月初六日辛卯. 晴. 食後與家姪昌翕. 自谷雲精舍發行三十里. 至梧里村中火. 北涉大川. 此是谷雲下流. 越加峴. 路甚峻急. 過原川驛. 至狼川邑底. 宿程大寶家. 是日行六十里. 


    初七日壬辰. 曉灑微雨. 晩晴. 

    東行十五里. 涉大利津. 踰觀佛峴. 沿江而上. 田野平曠. 水北人家. 映帶如畫. 午至方川驛. 中火驛吏金英業家. 沿江歷一遷. 東行十許里. 至西四涯. 木道窮此. 此爲兩水之會. 左卽黃蘗洞下流. 而右是發源於萬瀑者也. 遂捨左而沿右. 過一遷又捨之而右得一川. 此則楊口縣以北水也. 川邊有樹陰. 婆娑可坐. 少憩而行. 又歷二遷. 至咸春驛. 宿驛吏李起善家. 是日行八十里. 


    初八日癸巳. 晴. 

    蓐食行七八里. 踰小峴. 又行數里. 入富嶺洞口. 石路犖硧盤折而上. 不知其幾曲. 巨木穹林. 夾路蔽日. 抵嶺上遙望雪嶽. 掩映氛靄中. 不能洞觀. 下嶺而東. 不數里. 卽一澗谷. 屈曲行樹陰中. 過半程. 村臨水. 得可坐處. 歇馬攤飯而行. 山回水曲. 過盡一重. 又有一重. 如是者三十里. 涉交灘. 此是瑞和下流. 淸曠可喜. 湍瀨深駛. 小雨行旅不通. 遵渚而東. 南望長橋. 跨於川上. 此是走麟蹄縣道也. 至圓通驛. 少憩驛卒朴承律家. 行五里. 三涉大川. 此是藍橋驛下流. 過古圓通. 入寒溪寺. 沙路松林. 彷彿楓嶽之長安洞口. 屢度涉溪. 北得一谷. 迤折而到寺. 處地回抢. 無他可觀. 而後面峯嶺幽夐. 可供遐矚. 左右僧寮. 新創板屋. 法堂方次第經始. 僧徒十餘人. 紛遑未暇. 亦無可與語者. 夜宿東寮. 是日行八十里. 


    初九日甲午. 晴. 

    朝食後. 南出洞門. 循溪而東. 歷小開村. 行松林密陰中. 北望諸峯. 觸目瑰奇. 而其中一峯. 特貞秀皓鮮. 遂創名之以白蓮. 又指其丹㠉聳霄. 如建赤標者曰彩霞. 顧謂寺僧同行者曰. 汝輩毋忘而識之. 行四五里. 北有小川蜿蜒而來. 作瀑五六丈. 上有層潭. 形態妙絶. 緣崖而上. 俯視潭心. 形如釜鬲. 色若凝黛. 潭西巖上. 刻玉流泉三字. 過此而行. 右有四巖. 似鸞翔鳳翥. 而絶壁萬仞. 氣勢磅礴. 延亘數百步. 此豈中原人所記南峯作絶壁者耶. 亡何歷寒溪寺舊基. 北面諸峯矗立森羅. 凜然可畏. 南有加里峯. 奇拔突兀撑空. 左右顧瞻. 令人驚心動魄. 十里至眞木田. 周覽形勢. 攢峯疊㠉. 橫亘後面. 殊狀異態. 高處爛若玉雪. 而土岡三支. 自北蜿蜒而來. 幾數百千步. 中支嶐然蹲峙. 左右兩岡. 勢若扶挾. 而前山不甚岌嶪. 積翠蔥蘢. 背北面南. 日月明朗. 可以置屋於其中. 岡壟上下土地膏潤. 可耕處甚多. 考按旣訖. 起行數百步. 至溪邊石上午飯. 逢過去僧. 問其何向. 則曰由五色嶺至襄陽. 蓋此距海路八十里云. 欲尋歸路. 轉訪大乘菴. 而疲甚不能作. 爲留宿計. 丁金茇舍. 丁金卽翕姪農奴. 今春. 牽牛來棲于此.  只加椽而無蓋. 遂使鐵奴. 剝樹皮略覆於上. 下藉以草. 經夜於此. 星月透照. 風露滿身. 淸冷不能成寐. 是日行二十餘里. 


    初十日乙未. 晴. 

    日上東峯. 峯色尤覺瑩晃. 緣小溪北上一里許. 有一小阜. 地勢稍高. 而襟抱幽奧. 亦可置菴. 早食. 下寒溪舊基. 佛宇災於上年. 石佛三軀. 燒毀於破瓦灰燼中. 惟有石塔立庭際. 芍藥數叢. 正開於亂草間而已. 適遇村人. 問大乘菴路. 則指北邊兩峯石罅曰. 由此登登而上五里可達. 而極其艱險. 願毋往也. 徘徊仰瞻. 雲壁揷空. 令人意沮. 轉至東邊小溪. 此是瀑布下流. 而久旱幾至斷流. 瀑布之無可觀可知. 遂下至小開村. 溪邊曲肱假寐. 撑鍋作午食. 夕下宿圓通朴家. 是日行四十里. 


    十一日丙申. 雨. 

    驛吏金世民來見. 其人詳明. 能言寒溪諸勝境甚悉. 玉流泉阿次莫洞白雲菴洞. 皆渠採蔘時所歷踐. 玉流泉水窮處. 有故城基址. 而川路懸絶. 不可直上. 迤從大川盤石. 以北入五里許造焉. 絶壁周遭三面. 其缺處. 跨川築城. 高可四五丈. 又有石門. 宛然尙存. 城內土地平衍. 可以棲止. 越其北岡. 卽支離谷. 下數十里. 有三龍湫. 奇壯可賞. 阿次莫洞. 在眞木田東五里許. 沿溪北入. 有五六丈懸瀑者凡數處. 循川而上. 可達上雪嶽白雲菴. 自眞木田至洞口纔十里. 沿溪北上. 水石淸幽. 佳木櫛比. 行五里爲菴基. 背員絶壁. 面勢向東南. 而諸峯環列. 若堆銀削玉. 南有上筆如峯. 西有笠帽峯. 北則上雪嶽在十許里內. 登之可望東海云. 


    十二日丁酉. 晴. 

    馬瘏仍留. 


    十三日戊戌. 晴. 

    早食回程. 聞交灘水漲難涉. 迤從下流橋上而行. 西轉而北踰一小峴. 至富嶺底村家. 中火. 至嶺上回望雪嶽. 山形峯色. 歷歷可挹. 其雄蟠南北之勢. 未可以一覽而盡. 或騎或步. 須臾下嶺. 上上下下. 其勢異也. 到咸春李起善家歇馬. 昏到方川. 宿金英業家. 是日行百里. 


    十四日己亥. 晴. 

    夕陰灑雨. 早發至狼川程家. 中火. 歷原川西轉. 沿溪行三十里. 至繼祥寺. 有古塔浮屠. 而殘僧三四人. 草創菴寮. 未能成形. 亂草蔽庭. 無地可坐. 有老宿彥屹. 曾見於神秀寺. 渠嘗遊歷寒溪大乘菴. 轉訪鳳頂曲淵. 能言其勝致. 亦差可人意. 草幕陋甚. 焚香就枕. 是日行八十五里. 


    十五日庚子. 晴. 

    食前出寺. 由西南踰明知峴. 地勢高聳. 路甚峻急. 艱難步下抵精舍. 日未三竿矣. 是日. 行二十里. 午後. 還華陰洞. 翌日. 翕姪歸洞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