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현 오세선원기(麟蹄縣五歲禪院記) 강한유로(江漢遺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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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현 오세선원기(麟蹄縣五歲禪院記) 강한유로(江漢遺老)
황경원(黃景源)
설악산은 인제현(麟蹄縣)의 동쪽 백 리에 있다. 그 위에 선원이 있으니 봉정암(鳳頂庵)이다. 봉정암으로부터 아래로 30리를 내려오면 선원이 있는데 오세암(五歲庵)이다.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을 피한 곳이다.
선생은 5세에 『대학』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도 불리었다. 왕이 이를 듣고 궁중으로 불러 시를 시험하시고는 비단을 하사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하여 오세라고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처음에 상왕(上王, 단종)이 영월군(寧越郡)에 있을 때,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여섯 신하가 상왕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같은 날 사형으로 논죄되었다. 이때 선생은 미친 척하고 측간에 빠졌다가 도망 나와 설악산으로 들어가 드디어 머리를 깎고 중으로 숨어 살았다. 그가 죽게 되자 산중 사람들이 이내 오세라는 별명을 가지고 그 절의 이름으로 삼았다.
세상에서는 혹 선생이 세상을 피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여섯 명의 신하와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사육신은 모두 조정에서 대부로 벼슬을 하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신임을 받았으니 왕가에 일이 있으면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 의리상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한낱 포의의 신분으로 상왕을 위해 미친 척하면서 세상을 피해 살다가 끝내 깊은 산 속에서 죽었다. 그 뜻은 참으로 고고하고 그 절의는 참으로 훌륭하였으니 사육신들과 비교하여도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성화(成化) 연간 선생이 대궐에서 성묘(成廟 성종)를 알현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또 이를 들어서 선생을 의심한다. 그러나 선왕께서는 승려로 선생을 불렀던 것이고 선생 또한 승려도 선왕을 뵌 것이니 일찍이 군신의 예로 만난 것이 아니다. 어찌 의심을 할 만한 일인가.
처음 선생이 설악산에서 돌아와서 문득 머리를 기르고 안씨의 딸을 맞이하여 처로 삼았다가 안씨가 죽자 다시 머리를 잘랐다. 그러나 선생의 머리는 처를 두었다고 하여 기른 것도 아니고 처가 죽었다고 자른 것도 아니다. 선생의 뜻은 대개 승려로 숨어 사는 것이었을 터이니 안씨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선생은 결국 반드시 머리를 잘랐다.
왜 그런가. 선생은 추워도 옷을 껴입지 않았고 주려도 먹지 않았으며 사람과 더불어 살지 않고 사슴이나 돼지들과 무리를 지어 살았다. 부모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친척의 사랑을 끊고 돌아보지 않았다. 씨성을 버리고 부도를 따랐으니 그 뜻은 아마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서있을 방법이 없다고 해서였을 것이다. 그러한즉 선생이 어찌 처첩의 부양을 돌볼 수 있었겠는가. 머리를 깎든 깎지 않는 이 역시 미친 척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공자께서는 우중(虞仲)을 일러서 몸가짐이 청렴결백 하였고 세상을 저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았다고 하셨는데 선생으로 말하자면 부도를 따라 세상을 마쳤으니 우중이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어찌 공자께서 이른바 몸가짐이 청렴결백하고, 세상을 저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은 자가 아니겠는가.
금상 25년에 승려 설정(雪淨)이 설악산에 올라 선생의 오세선원(五歲禪院)에 대해 물으니 없어진지 백 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그 옛터에 다시 세워 그 뒤 3년 10월에 절이 이루어지니 선생의 화상을 구해서 간직해 두고는 나에게 이를 기록해 달라 청하였다. 내가 이미 선생의 풍도를 사모하고 있던 터라 사양하지 않고 기문을 써 주면서, 또 세속에서 선생을 의심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선생을 위해 이와 같이 변론한다.
『江漢集』
「麟蹄縣五歲禪院記」
雪嶽山. 在麟蹄縣東一百里. 其上有院曰鳳頂. 由鳳頂而下三十里. 有院曰五歲. 東峰先生金時習避世之所也. 先生五歲通大學. 號爲神童. 王聞之. 召入禁中. 試以詩. 賜帛還家. 聲振一國. 稱五歲而不名云. 初上王在寧越郡也. 成三問,朴彭年等六臣. 謀復上王. 事發覺. 同日論死. 先生陽狂陷廁中而逃之. 入雪嶽山. 遂斷髮. 隱於浮屠. 及其卒也. 山中人. 因以五歲名其院. 世或謂先生避世. 猶不若六臣之死. 然六臣皆仕於朝爲大夫. 最見親信. 王家有事則死之. 其義當然也. 而先生以一布衣. 爲上王陽狂a224_185d逃世. 卒死於巖穴之中. 其志誠苦. 其節誠奇. 比諸六臣爲尤難也. 成化中. 先生嘗見成廟於宮中. 世又以是疑先生. 然而先王旣以浮屠招先生. 而先生亦以浮屠見先王. 則未嘗用君臣之禮也. 烏可疑乎. 始先生自雪嶽山. 輒長髮. 娶安氏女爲妻. 安氏死. 乃復斷髮. 然先生之髮. 非爲有妻而長之也. 亦非爲無妻而斷之也. 先生之志. 盖將匿於浮屠. 則安氏雖不死焉. 先生之髮. 終必斷也. 何者. 先生寒不衣. 饑不食. 不與人處. 而與鹿豕爲之羣. 棄父母之恩. 絶親戚之愛而不顧. 去其氏以從浮屠. 其意盖曰不如是. a224_186a無以立於天地之間也. 然則先生豈能顧妻妾之養哉. 其髮或斷或不斷. 是亦陽狂而已矣. 孔子謂虞仲. 身中淸. 廢中權. 若先生者. 從浮屠以終其世. 與虞仲斷髮文身. 未之有殊也. 豈孔子所謂身中淸. 廢中權者邪. 今上二十有五年. 僧雪淨登雪嶽山. 問先生五歲禪院. 廢可百年. 乃卽其遺墟. 而復建之. 後三年十月. 院成. 求先生畵像而藏焉. 請余志之. 余旣慕先生之風. 遂不辭而爲之記. 又憫世俗之疑先生者. 爲先生辨如此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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