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설악록(遊雪嶽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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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설악록(遊雪嶽錄)
칠암(七巖) 김몽화3)(金夢華)
정미년(1787)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 인제군수 오원모.
설악산은 양양과 인제 경계에 있고 뛰어난 우리나라의 명산이다. 내가 양양의 태수로 온 다음해 봄 농촌과 산촌 사이를 순시 가서 한번 신흥사에 이르러 계조굴을 보았다. 굴 위로는 석봉이 펼쳐져 있고, 굴 아래에는 흔들바위가 있는데 모두 기이한 볼거리이다.
가을이 되어 설악산을 모두 유람하려고 하였으나 흥취를 도와 일으켜 줄만한 이를 만나지 못하였는데 마침 순상공이 설악산을 등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9월 3일 정묘일에 바로 신흥사로 향하였다. 이날은 가랑비도 개어 산빛이 그림 같아 단풍을 구경하기에는 최고였다. 토왕성 아래를 지나가다 폭포를 쳐다보니 수천 길이나 되는 물줄기가 매달려 흘렀다. 창당동에 들어가서 와선대, 비선대 등을 구경하고 신흥사의 해풍루에 돌아와서 잤다.
9월 4일 무진
만경령을 넘어 영시암에 이르러 골짜기 입구에서 사미대에 올라 잠깐 쉬었다. 순상공이 한계에서 폭포를 구경하고 해 질 녘에나 대승령을 넘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므로 먼저 암자에 들어가 기다렸다. 이곳은 삼연 김창흡이 세상을 피해 집을 짓고 살던 곳으로 오른쪽에 유허비각이 있었다.
밤중 이경에 이르러 순상공이 도착하여 내가 나아가 뵙고 따라갈 듯을 말씀드렸다. 상공이 말씀하시기를,
험한 길을 넘는 것은 노인에게는 좋은 계획이 아닐까 두렵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양양은 본래 설악산의 절반을 차지하니 설악산의 주인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인이 비록 늙었지만 귀한 손님의 뒤를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또 상공은 천풍을 타고 신선의 산에 올라 반드시 단약을 다리는 기술을 얻으니, ‘저는 유안의 개나 닭이 되기를 원합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5일 기사
순상공이 앞에서 이끌고 나는 인제군수와 함께 따랐다. 상공이 급히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따르라고 명하였다. 나는 산속에서 속세의 모습을 벗는 것도 또한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여 구멍 나고 더러운 옷을 입고 갔다. 양계의 계곡에 유홍굴이 있는데 옛날 유홍이 방백의 신분으로 여기서 비를 피하였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곳은 12폭의 하류이다. 순상공은 마음에 맞는 곳을 만나면 반드시 가마에서 내려앉았다.
돌아서 수렴동에 들어가니 돌길이 실과 같고 혹은 기울고 혹은 끊어져 있어 절벽을 타고 넝쿨을 부여잡고 천천히 내려왔다.
상공이 나를 돌아보고,
“노인이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저도 역시 상공이 걱정입니다.” 하였다.
골짜기가 점점 넓어지고 흰 돌이 널리 퍼져 있으며 층층으로 구덩이가 있고 단풍이 못에 가득하니, 진실로 하루 종일 있어도 돌아갈 것을 잊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이곳부터 돌은 더욱 기이해지고 길은 더욱 험해졌다. 쌍폭 동남쪽에 이르렀다. 두 물줄기가 처음 나뉘었다가 두 개의 끝이 다시 합쳐 하나가 되었는데 흰 돌과 맑은 못은 꼬불꼬불하여 아름다웠다. 이곳을 지나면 곧 물이 없는데 처음으로 물이 다한 곳까지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산허리를 타고 가다가 봉정동 입구에 이르렀다. 돌봉우리가 펼쳐져 있는데 순상이 먼저 도착하여 하인에게 철피리를 불라고 명하였다. 그 소리를 들으니 완전히 구산의 피리소리 같았다4).
. 봉정암에 들어가니 암자 좌측에 차가운 샘물이 있는데 큰 돌이 위를 덮고 있었다. 지금은 가을도 이미 저물어 얼어 있었다. 암자 북쪽에 돌산이 묶어놓은 듯 솟아 있는데 몇천 길인지 알 수 없다. 마치 봉황이 머리를 든 것 같았다. 서쪽에 탑대가 있고 동쪽에 청봉이 있으니 가장 높은 곳이다.
나는 늙어서 산을 오를 초기만 하더라고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길을 나서면서 발걸음이 그치지 않아 어느 곳을 밟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발걸음은 이미 높은 곳에 있었다. 만약 중간에 그만두었다면 산 정상에 많은 좋은 풍경이 있음을 어찌 다시 알았겠는가.
또 지금 산행에서 만약 순상공이 앞에서 인도하는 힘이 없었더라면 또한 곧 바라만 보고 올라갈 수 없었다. 정치나 학문의 공도 비록 자기 분수에 있다고 하더라도 힘쓰고 게으르지 않아 채찍을 잡고 격려하며 떨쳐 일어나게 할 자는 반드시 엄한 스승과 두려운 벗에게서 기대한다.
일찍이 퇴계선생의 시에서
“책 읽는 것을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산에 오르는 것이 책 읽는 것과 같다네.”라고 말하였다.
어찌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에 순상공이 탑대에 올랐지만 나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비록 그렇지만 고인이 정진하고 수련하던 힘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중간에 그치지 않았으니, 어찌 단지 위대하다고 탄식만 하고 촛불을 잡는 공을 끝내 없애리오.
한유의 시에 “어디에서 그런 빛나는 사람을 바라보며, 늙어 갈 수 있을까”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이 또 내가 마땅히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6일 정오
암자 북쪽 푹 패인 곳으로부터 내려왔다. 봉정암과 탑대가 교차하는 곳이다. 한 가닥 길이 마치 줄이 곧바로 아래로 드리워 있는 것 같아 몸을 돌릴 곳도 없었다. 부여잡고 내려온 것이 십리는 족히 된다. 대경봉을 지나는데 뾰족한 돌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돌은 모두 무늬가 있는데 만축에 찌를 꽂은 것 같다. 봉우리의 이름은 이것 때문에 명명되었다. 시내를 돌아 조금 동쪽으로 온갖 나무들이 우거져 그늘져 있었다. 양 절벽을 돌아 합쳐졌다. 몇 리를 가자 흰 돌과 맑은 개울을 만났는데 적막한 물가에서 이러한 곳을 만나게 된 것도 또한 기이한 일이다.
잠깐 쉬고 구불구불한 산허리를 따라 몇 고개를 넘어 오세암에 이르렀다. 암자 북쪽에 돌산이 있는데 서남쪽에 우뚝 서 있는 만경대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하나의 산에 정영이 여기에 모두 모여 엉겨 있으니 하늘이 만들고 땅이 펼쳐놓은 곳이라 일컬을 만 하였다. 암자에는 매월당의 화상 두 개가 있다.
오호라, 이 노인네는 오세신동으로 어려서 임금의 은총을 받았는데 경태 올해년 이후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산에 들어갔다.
추강 남효온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나란히 아름다움을 날렸으니 맑은 바람 높은 절개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 지금은 하나의 외로운 암자 속에 초상화로 남아 있으니 어찌 머리를 깎고 염주를 드리웠다고 하여 그를 하찮게 볼 수 있겠는가.
서로 공경을 표시하고 물러나 누대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니 어제 지났던 두 시냇물 굽이였다. 다시 영시암에 이르렀다. 오후에 순상공이 풍루를 향하였다. 나는 절하고 감사를 표시하니 상공이 훈계하여 대승암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다. 대개 내가 늙은 것은 근심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암자에 머무르겠다고 말했다.
7일 신미
대승암에 들어갔다. 어귀에서 가마를 메고 가던 중이 땅으로 엎어져 나는 시냇물로 떨어졌다. 상공의 말을 수용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로 창랑의 물을 스스로 취한 것이라고 말한다.
조담을 지나갔다. 속세에서 조라고 부르는 것은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생각하니 기린, 봉황, 거북, 용을 네 가지 영물이라고 하는데 무릇 인제 한 마을에 용두암도 있고 봉정도 있는데 유독 거북이로 명명한 곳은 없다. 지금 이 못의 바위를 보니 뒤에 무늬가 있고 꼬리가 짧고 뾰족하여 거북이와 비슷하였다. 이름을 귀미담으로 고칠 것을 청하여 네 가지 영물 가운데 하나를 갖추었다.
대승령에 올랐다. 어제 지나온 곳을 돌아보니 오세암의 만경대, 영시암의 남대, 만경령의 좌우 봉우리가 모두 무릎 아래에 있었다. 봉정암은 앞산에 막혀 볼 수 없었다.
내려와 산허리를 십리 가니 한계였다. 관폭대에 오르니 `구천은하`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정말로 천지가 왕성한 기교를 발휘한 곳이요, 조화의 뜻에 맞게 만든 곳이었다. 어제 본 십이폭과 비교하자면 마치 세류의 참된 장군과 극문, 패상의 아이들 장난치는 진영처럼 반드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누대 아래 길이 끊겼고 험하고 아래로 땅은 없고 사이에 돌이 많았다. 이가 부딪혀 덜덜거리는 것이 마치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반고(班固)가 지은 유통부(「幽通賦」)의 유인의 꿈도 혹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계령을 향하여 가다가 수석이 아름다운 곳을 만나 수레에서 내려 짐을 놓고 쉬었다. 시냇물을 떠서 밥을 말아서 먹었다. 시냇가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좌우로 단풍이 아름답게 비추니 그 바위의 이름을 정거암이라 명명할 것을 청하였다.
고개를 넘으니 오색이었다. 돌산봉우리가 가파르게 펼쳐져 있으니 또한 설악산의 한 가지이다. 오색촌에서 여장을 풀고 잤다.
8일 임신
일찍 일어나 약수 다섯 사발을 마시자 며칠간의 괴로웠던 일이 모두 모공으로 나가 흩어진 것을 깨달았다.
양현을 넘으니 관리가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세상에서 산수를 말하는 자는 반드시 풍악산과 설악산을 나란히 평하고,
읍지에서 또 백두산 이남에 설악산이 가장 높다고 하였다. 이 산은 불뚝 솟아 우뚝하고 깊고도 넓어 수 백리에 걸쳐 있으며, 그 사찰의 아름다움과 누대와 동굴의 기이함, 폭포의 웅장함은 풍악산과 으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산을 유람하는 자들은 모두 설악산을 버려두고 풍악산으로 가, 금강산 정양사 밖은 항상 유람 온 사람들의 무리로 가득 차는데 수렴동 안의 길은 오래도록 푸른 이끼에 덮여 있음이 유독 개탄스럽다.
이런 이유로 유산록에서 풍악산에 대한 것이 많이 나오지만 설악산에 관한 볼 것이 극히 드물다. 고매한 사람이 머무는 곳이고, 세상을 떠난 선비들의 은거 장소가 되어 매몰되고 세상에 칭해지지 않으니 어찌 산수의 우불우는 또한 그 사이에 운수가 있는 걸까.
지금 내가 유람하며 지나온 곳이 겨우 2/3인데 모두 돌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있어 바라 볼 수는 있지만 오를 수는 없었다. 또 들으니 식당동 남쪽 유마의 등 위에는 반야대가 있는데 안쪽으로 온갖 볼거리가 앞에 펼쳐져 있어 기이한 명승지이다. 또 식당동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내외 석문이 있고 또 돌아 올라가면 사면이 모두 돌병풍인데 중간에 높은 누대가 있어 설악산의 최고 명승지라고 한다.
사람들의 발자취는 거의 드물어 세상에 그곳을 아는 자가 있지 않다. 비록 그렇지만 빼어난 곳은 몸소 찾아 두루 돌아다니는데 있지 않고 발과 눈 밖에 있으니 발과 눈이 이르는데 국한되어 몸과 마음에서 체험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산수를 잘 볼 줄 아는 자가 아니다. 산에서 반드시 산의 중후한 몸을 알아야 하고, 물에 있어서는 반드시 두루 흐르는 용도를 본받아야 한다.
그런 후에 그것을 학문에 바탕으로 삼아야 인정지동의 오묘함이 있게 되며, 정치에 적용하면 사물을 누르고 대중을 받아들이는 효용이 있게 된다.
만약 이처럼 한다면 진실로 산수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만 간간히 놀러다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아울러 이것을 기록하여 후에 산에 들어오는 자들의 권면으로 삼는다. 중양일에 설악 주인이 기록하다.
『遊雪嶽錄』
丁未 方伯金載瓚 麟蹄守吳遠謨
雪嶽峙襄麟界 傑然爲東國名山 余守襄陽之明年春 回勞農山間 一至神興寺 觀繼祖窟 窟上石峯張0 窟下有動石 儘奇觀也
至秋欲遍遊山中 而未有助發其興趣者 適聞巡相公登雪嶽
九月初三日丁卯
直向神興 是日微雨新晴 山光如畵 於賞楓爲宜 過土王城下 仰觀瀑布 掛流數千丈 入倉堂洞觀臥仙 飛仙等臺 還宿神興之海楓樓
初四日戊辰
踰晩頃嶺至永矢庵 洞口登沙彌臺小憩 聞巡相觀瀑於寒溪 度日暮當踰大乘庵 故先人菴而候焉 卽金三淵避世卜築之地 右有遺墟碑閣 夜二更巡相至 余晉見道願從之意 相公曰 踰越險阻 恐匪老人良圖也 余曰 襄州本雪嶽一半 雖謂之主人不爲過也 主人雖老 敢不從大賓之後乎 且上公挾天風而昇仙嶽 必得鍊丹之術 下官願爲劉安雞犬矣 相公笑而許之
初五日己巳
巡相前導 余與麟蹄守從之 相公亟命便服從行 余念山中脫俗態亦一奇事 故穿褒衣而行 兩溪之曲 有兪泓窟 昔兪公以方伯避雨於此 因以得名 此卽十二瀑下流也 巡相遇適意處 必下藍輿而坐 轉入水簾洞 石逕如線 或欹或斷 綠崖攀藤寸寸而下 相公顧余曰 爲老人慮 余笑曰 下官亦爲相公慮矣 洞壑稍豁 白石平鋪 層層作坎 丹葉滿潭 眞所謂竟日忘歸處也
自此石益奇而路益險 至雙瀑東南 兩流始分 而二之末復合爲一 白石淸潭 曲曲可愛 過此則無水焉 始覺行到水窮處也 曲山腰而行 至鳳頂洞口 有石峰森羅 巡相先到 其下命官隸吹鐵笛 聽之依然如緱山笙 入鳳頂菴 菴左有冽井 大石盖于上 今秋已三合氷 菴北石峰束聳 不知其幾千仞 如鳳鳥昻頭 西有塔臺東有靑峰 卽最上頭也 余老矣 上山之初 若不能躋攀 及其進 進不已 自不覺其占地 步已高 若使半塗而廢 則豈復知上面有許多好光景哉 且今行苟無巡相先導之力 則亦不能嚮望而有所跂及 政猶學問之功 雖在於自己分上勉焉不怠 而若夫策勵而振發者 亦必待於嚴師畏友 嘗見退陶老先生詩曰 讀書人說遊山似 今見遊山似讀書 豈不信然哉 俄而巡相登塔臺 而余則不能從 雖然 古人進修之功 不以晩暮而間斷 豈可徒發卓爾之歡 而遂廢秉燭之功哉 韓文公詩曰 於何玩其光 以至歲向晩 此又余之所當勉者也
初六日 庚午
從菴北凹處而下 鳳頂菴塔臺之交也 一條路如繩直垂 無容旅處 攀綠而下者 可十里過戴經峰 矗石成峰而 右白石皆有文如 綠籤萬軸 峰之得名者以此 循溪而稍東 萬木陰翳 兩厓迴合過數里 而遇白石淸川 得此於寂寞之濱者亦奇矣 少憩而行逶迤山腰 踰數嶺而得五歲菴 菴北石峰 縹緲西南峙萬景臺 一山精英結轖於此 儘所謂天造而地設也 菴有梅月堂畵二本 嗚呼此老以五歲神童 早被知遇 而景泰乙亥之後 佯狂入山 與南秋江諸公 幷美齊微 淸風卓節 山與高 而水與長 今於一孤菴裏獲瞻遺像 豈可以祝髮垂珠而少之哉
相與致敬而退 自臺北而下 卽昨日所過兩溪之曲也 復至永矢菴 午後巡相向楓樓 余拜謝 相公戒之曰 愼勿取路大乘 盖愍余之老也 余曰 是菴
七日 辛未
入大乘洞口肩輿僧蹶然仆地 余墮落溪水 不用相公之言 以至於此 政所謂滄浪自取也 過槽潭 俗呼槽爲歸于余 念麟鳳龜龍是爲四靈 夫以麟蹄一邑有龍頭菴有鳳頂 獨無以龜得名之地 見今此潭之巖 背有文尾短而尖 有似乎龜請易名曰 龜尾潭以備四靈之一 登大乘嶺 回視日昨經過處 五歲之萬景 永矢至南臺晩景之左右峰 皆在膝下0鳳頂爲前峰所遮而不可見 下山腰十里 寔爲寒溪 登觀瀑臺 有九天銀四大字刻 此政乾坤逞技之處 造化得意而成者也 比之昨日所見十二瀑 則細柳之眞將軍棘門灞上之兒戱 必有能卞之者矣 臺下路絶險 下臨無地間多石 齒鑿鑿揣惴然 如將隕墮 班孟堅幽人之夢 無或類此歟 向寒溪嶺遇水石佳處 舍輿息肩酌溪水 澆飯而喫 溪上有巨巖 巖之左右丹楓輝映 請名之曰 停車巖 踰嶺是爲五色石峯峭拔羅列 亦雪嶽之一支也 止宿于五色村
初八日 壬申
早起飯藥水五椀 儘覺數日勤苦盡向毛孔散也 踰凉峴則官吏持入馬來待矣 噫 世之譚山水者 必以楓嶽雪嶽幷稱 邑誌又曰 白頭以南 雪岳最高玆山磅礡深廣 彌亙數百里 其寺刹之勝 臺窟之奇 瀑布之壯 與楓岳相爲佰仲 而獨慨夫古今人遊山者 皆舍雪岳而之楓嶽 正陽戶外常滿遊人之僂 水簾洞裏長鎖綠苔之逕
以故遊山錄多出於楓岳 而不少見於雪嶽 使高人住錫之地 逸士幽棲之所 埋沒而不見稱於世 豈山水之遇不遇 亦有數存於其間耶
今余所遊歷者 讒三之二 而皆石峰崒嵂 可望而不可登 且聞自食堂洞南踰麻背上般若臺 則內面萬千氣像呈露於前 爲奇勝 又自食堂洞 東轉而上 則有內外石門 又轉而上 則四面皆石屛 中有高臺 爲一山之最勝處 而人跡罕到 世未有知之者 雖然妙處不在於窮搜遍歷 而在於足目之外 局於足目之所到 而不知體驗於身心者 非善觀山水者也 於山而必識其重厚之體 於水而必法其周流之用 然後資之學問 而有仁靜知動之妙 措之政事 而有鎭物容衆之效 若是者 眞有得於山水之樂而不然 則只做得間謾遊 有何益哉 聯幷記之以爲後之入山者勉焉 重陽日 雪嶽主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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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오년(1786, 정조 10년) 10월에 양양현감으로 도임하였다.
4) 『列仙傳』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이 7월 7일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부려 세상과 작별하고 하늘로 떠났다고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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