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엄산(崇嚴山) 성주사(聖住寺)의 고(故) 양조(兩朝)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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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엄산(崇嚴山) 성주사(聖住寺)의 고(故) 양조(兩朝)국사
마곡의 법을 이었으며 호는 무염(無染)이고 경주사람이다. 속성은 김씨이다. 무열(武烈)대왕의 9세손이다. 조부의 이름은 주천(周川)이고, 품의는 진골이었다. 벼슬은 한찬(韓粲)에 이르렀다. 고조, 중조는 모두 정승과 장수를 역임하고 아버지의 이름은 법청(範淸)이고 품족이 진골에서 한 등급 내려서 살아 향리의 비난을 받았다.
어머니 화씨의 꿈에 팔이 긴 하늘 사람이 연꽃을 내려주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었다. 또 언젠가 어머니 꿈에 호도인(胡道人)이 십계(十戒)를 주면서 태교를 삼으라는 것을 본 뒤 돌만에 탄생하였다.
12세에 설악의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법성(法性)이라는 선사가 있어 일찍이 거기에서 능가법문을 펴고 있기에 몇 해 동안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장경(長慶) 총에 당나라로 들어가서 불상사(佛爽寺)에 이르러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으니 강서(江西)의 법인(법인)으로 인가(印可)하면서도 부끄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었으나 이같이 동국인을 본 적은 드물다. 뒷 날 중국에 선법(禪法)이 없어지면 동이(東夷)에게 물어야 될 것이다.”
또 마곡보철(麻谷寶徹)화상에게 가서 일을 보되 가릴 것이 없이 하여 남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은 반드시 맡아서 쉽게 해치우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선문의 특이한 대덕이며 덕 높은 어른이다.”
또 철공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스승, 마조(馬祖)께서 나에게 예언하시기를 만일 동쪽 사람으로서 눈에 뜨이게 두드러진 이를 만나거든 그를 길거리로 보내라. 지혜의 강물이 사해에 넘치게 되리니, 그 공덕이 적지 않으리라고 하셨는데 스님의 말씀이 그대에게 맞는도다. 나는 그대가 온 것을 환영하여 다시 동토(東土)에서 으뜸가는 선문을 세우게 하노니 가거라. 기꺼이 가거라.”
이렇게 마곡에게 마음 구슬을 얻고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서 대중(大中) 원년에 처음으로 숭엄산 성주사에 머물렀다. 모여드는 중이 천명, 이름이 십방에 떨쳤다.
이로부터 선사께서 숭엄사 안에서 구슬을 토하고 조사의 근기에서 인가를 주니 이 까닭에 두 조정의 성주(聖主)의 천관(天冠)이 땅에 기울어지고 한 나라의 신하들의 머리가 발뿌리에 닿게 절을 하였다.
선사의 선정을 닦는 여가에 법을 구하러 오는 기연(機緣)에 응대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가 이렇게 물었다.
“혀가 없는 국토에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거늘 어찌하여 서천(西天)의 28조(祖)와 당토(唐土)의 6대는 조사의 등불을 서로 전하여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습니까.”
선사께서 대답하셨다.
“모두가 세상에 허뜨리기 위함일 뿐이다. 바르게 전한 것은 아니리라.”
“하나의 조사에게 두 가지 국토가 갖추어져 있습니까?”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앙산이 말하기를 두 임에 하나의 혀도 없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곧 종지(宗旨)니라.”
“하나의 조사에게 두 가지 국토를 보는 뜻이 무엇입니까?”
“선법을 바르게 전하는 근기에는 법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승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혀없는 국토요, 진리에 맞추어 법을 구하는 사람은 거짓 이름인 말로써 설명을 하니 이것이 혀 없는 국토니라.”
그러므로 효강(孝康)대왕이 스승으로 섬긴 뒤에 정강(定康)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앞의 예규에 따라 받들어 맞이하였으나 나이가 이미 90세인지라 대궐에 나가지 못하였다.
선사는 문덕(文德)은 원년 창월(暢月 11월 27일)에 입적하니 시호는 대랑혜(大郞惠)대사요,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었다.
『祖堂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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