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염 스님 비명, 병서. 하교를 받들어 짓다. 이하 동일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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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염 스님 비명, 병서. 하교를 받들어 짓다. 이하 동일하다
(無染和尙碑銘 竝序 奉教撰 下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당나라(昭宗, 888년, 11월)가 무력으로 황소의 난을 멸망시켰다. 천자가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고친 해가 11월 이다. 11월을 창월(暢月)이라고 한다. 해가 작아지는 함지(咸池)의 별이 북두칠성의 북쪽 못 곁에 있으니 곧 오후다.
신라의 두 임금에게 국사를 지낸 선스님(禪和尙)이 목욕을 마치고 가부좌를 하시고 돌아가셨다. 신라 진성왕 2년 11월 17일이다. 나라 사람들이 두눈을 잃은 것 같이 슬퍼하였다. 하물며 문하의 모든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아, 슬프다. 신라에 태어난지 89년 봄이 되었다. 신라 애장왕 6년 12월 28일이다. 승복을 입은 불교의 계율을 한지 65년이다. 세상을 떠난지 3일인데 숭좌에 기대어 있는 얼굴이 엄연히 살아있는 것 같았다. 문인 순예(詢乂) 등이 소리 내어 울며 유체를 받들어 선실(禪室)에 임시로 모셨다.
-이하 주석은 생략-
임금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글월로 조문하고 곡식으로 부의 하여 공양을 돕고 명복을 빌었다. 2년이 지나서 돌을 다듬고 여러 층으로 부도를 만들었다. 그 소문이 경주까지 전해졌다.
보살계를 받은 제자인 무주 도독(武州都督) 소판(蘇判) 일(鎰)과 집사 시랑(執事侍郞) 관유金寬柔), 그리고 패강 도호(浿江都護) 함웅(咸雄), 전주 별가(全州別駕) 영웅(英雄)은 모두 왕손이다. 오직 국가의 중심으로 임금의 덕을 보좌하면서 험난한 길에서 스승의 은혜를 입었다. 어찌 반드시 출가한 연후에 입실제자라고 하겠는가? 드디어 문인인 소현 대덕(昭玄大德) 석통현(釋通玄)과 사천왕사(四天王寺) 상좌(上座) 석신부(釋愼符)와 함께 상의 하였다. 스승이 돌아가시어 임금이 비통하다. 어찌 우리가 마음의 불이 꺼진 재처럼 아무 말없이 스승에 대한 의리를 빠트릴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군, 사, 부의 세분이다.
이에 흑과 백이 서로 호응하여 시호를 내려 줄 것과 탑 이름을 지어 줄 것을 청하자 교지를 내려 허락하였다. 곧 왕손인 병부시랑(兵部侍郞) 우계(禹珪)에게 명하여 한림원(翰林院)시어사(侍御史) 최치원(崔致遠)을 불러 봉래궁(蓬萊宮)으로 왔다. 인재들과 나란히 섬돌에 올라 주렴 밖에서 무릎을 꿇고 명을 기다렸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성주 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신 것 같다. 당 태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덕을 행하시어 사람들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셨다고 하셨다. 옛날 돌아가신 나이 부왕 경문왕과 헌강왕이 모두 스승으로 모시면서 나라가 부강한지 오래 되었다. 내가 처음 왕위를 계승하여 선왕의 뜻을 계승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늘이 아껴서 남겨주지 않아 마음이 더욱 슬프다. 나는 큰 것을 행하는 사람은 큰 이름을 주어야 한다.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탑명(塔名)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하였다.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 가서 벼슬에서 실을 물들이고 금의환향하였다.
돌아보건대 돌아가신 부왕은 국자감 학생으로 선발하여 공부하게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국자감 학사가 되었다. 헌강왕은 국사를 보고 예우하였다. 그대는 마땅히 국사의 이름을 지어서 은혜에 보답하게 하였다. 선왕의 보답은 너가 덕을 베푸는 것이라고 감사하며 말하였다. 황공의 뜻이다. 황공합니다. 전하께서 저의 글이 벼곡식에 알맹이는 없으면서 쭉정이 많은 것을 용서하시고 계수에 남은 향기가 있음을 생각하면서 글을 지어 은덕을 보답하라고 하셨다. 이는 참으로 매우 천행입니다.
대사(大師)는 유위(有爲)의 말세에 무위(無爲)의 신비한 으뜸을 가르치셨다. 소신이 하찮은 재주로 무한이 큰 행적을 기록한 것은 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줄로 깊은 우물을 긷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혹 비석이 이상한 말을 하는 일이 있고, 거북이 돌아보는 이로움이 없으면 결코 산이 빛나는 내가 아름답게 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숲과 골짜기의 냇물 수치로 여겨야 합니다. 청컨대 글을 짓는 것은 피하게 해주세요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양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대개 우리나라의 풍속으로서 좋고 좋다. 그러나 급제한 것이 모슨 소용이겠는가? 그대는 힘쓰라고 하였다. 갑자기 한편을 내어 주는데 크기가 나무토막만 하였다. 시종(侍從)으로 하여금 전하게 하였다. 곧 대사 문하의 제자들이 올린 대사의 행장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중국에서 공부한 것은 피차 똑같이 하였다. 스승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 어찌하여 마음을 배우는 사람은 높고 입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힘들단 말인가.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는 배움에 신중하였다.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덕을 세우고 입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말을 세운다. 곧 이 덕은 혹 말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고, 이 말은 혹 덕에 의지해야 썩지 않는다. 마음은 멀리 후에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고 썩지 않으면 곧 입으로 공부하는 것 또한 옛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또 어찌 감히 전각을 사양하겠는가? 처음으로 두루마기 행장을 살펴보자 곧 대사께서 중국에 유학하여 신라에 돌아온 년도와 계를 받고 선을 깨닫게 된 인연이 고위관직과 관리들이 우러러 보았다. 부처님 상을 안치하고 사찰을 창건하였다.
한림랑(翰林郞) 김입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聖住寺) 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덕행으로 남을 감화시켰다. 임금을 위하고 스승을 위한 좋은 명성은 세속을 진정시키고 악마를 항복 받는 위력은 붕(鵬)처럼 드날리고 학(鶴)처럼 돌아와 태부(太傅)에 추증되신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친히 지으신 심묘사(深妙寺) 비에 갖추 기록되어 있다.
돌아오면 모없는 학자인 내가 지금 글을 짓는다. 대사가 열반(般涅槃)의 경지에 든 기간에 우리 임금께서 탑의 이름을 높이고 드러나게 되었다. 입과 손이 장차 의논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때 수제자 비구가 와서 글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뜻을 곧 말하자 그는 김입지의 비를 세운지 오래되어 수십 년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태부왕께서 친필로 지으신 기록은 대개 특별한 대우가 있음을 드러낸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대는 옛 선인의 글을 읽었고 면전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았다. 국사의 행적을 실컷 듣고 눈으로 문하의 제자들이 올린 행장을 취하도록 보았다. 마땅히 넓게 기록하고 자세히 말하여 경이로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후대에 전하도록 해야 한다. 혹 중국인들이 이를 잘 보관하였다가 중국인들이 비웃음을 면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내가 감히 더 이상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대는 귀찮다고 꺼리지 말라고 하였다. 미친 노비의 태도가 남아 있다. 내가 급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새끼를 꼬듯 간결한 것이 좋다. 스님은 채소를 사듯 따지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어지러운 마음을 잡고 억지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한서(漢書)』, 「유휴전留侯傳)」 끝에 나오는 말을 기억하였다. 장량(張良)이 임금과 조용히 천하의 일에 대해서 말한 것이 많다. 천하의 존망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에 기록하지 않았다.
바로 대사께서 살아계실 때 일들이 하늘의 별처럼 뛰어난 것이 많다. 후학에게 경계된 것이 아니면 또한 적지 않는다. 스스로 반고의 『한서』를 조금 보았다고 자부하면서 이에 글을 서술한다. 빛이 왕성하고 또한 온 누리에 밝게 비출 자격을 갖추어 봄바람만 한 것이 없다. 오직 큰 바람과 빛나는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온다. 바로 하늘이 이 두 가지의 경사를 모으고 산악이 신령한 지기를 내려 군자의 나라에 태어난 사찰을 우뚝 서게 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 대사가 바로 그 분이다.
법호는 무명이고, 원각 조사(圓覺祖師)에게 10세 손이다, 속성(俗性)은 김씨(金氏)이고 무열대왕(武烈大王)이 8대조가 된다. 조부 주천(周川)은 골품(骨品)이 진골(眞骨)이고 지위는 한찬(韓粲)이다.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조정에서 장수와 재상으로 집마다 그들을 알고 있다. 부친 범청(範淸)은 골품이 진골로 한 등급 내려와 어려움을 겪었다. 만년에 조 문왕(趙文王)의 옛일을 추종하였다.
모친 화씨(華氏)가 꿈속에서 긴 팔의 천왕(天王)이 연꽃을 내려주는 것을 보고 임신하며 몇 시절이 지나 3월에는 다시 꿈속에 스스로 법장(法藏)이라고 하면서 십호(十護)를 주면서 태교에 충당하게 하였다. 13달이 되어 대사가 태어났다.
어려서 걷거나 앉을 때 반드시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벽에 그리을 그리고 모래를 쌓을 때 반드시 불상이나 탑을 만들었다. 하루도 부모님 슬하를 떠나지 않았다. 아홉 살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은 반드시 입으로 암송하여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신동이라고 말하였다. 12살을 넘기고 학문을 좁게 여기고 불도에 들어가려고 먼저 어머니께 그 뜻을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이전의 꿈 속을 생각하고 울면서 허락하였다. 후에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늦게 깨달은 것을 후회하며 기뻐하고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설악산 오색석사로 출가하였다. 입으로 부지런히 경전을 읽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법성선사(法性禪師)가 있었는데 일찍이 중국에서 선종(禪宗)인 능가선(楞伽禪)을 배워 뛰어났다. 대사가 스승으로 모시고 수년 동안 배웠다.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찾았다. 선사가 말하기를, 빠른 발로 달린다면 뒤에 출발하여도 먼저 도착한다. 나는 너에게서 알았다. 나는 아는 것이 적어 그대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 너와 같은 사람은 중국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사는 알았다고 말 하였다.
밤중에는 새끼줄을 뱀으로 속기 쉽고 공중을 분간하기 어렵다. 물고기는 나무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토끼는 그루터기를 지킨다고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승이 가르친 것과 내가 깨달은 것은 서로 장점이 있을 수 있다. 구슬을 얻고 불을 피웠으면 곧 조개와 부싯돌을 버릴 수 있다. 무릇 도에 뜻을 사람이면 어찌 항상 스승이 정해져 있겠는가. 찾아 떠나가서 부석산(浮石山)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게 화표하건나(驃訶健拏) 화엄을 배웠는데 하루에 30명의 몫을 공부하였다. 남천(藍茜)이 본색(本色)을 잃었다. 작은 비유를 생각하며 동쪽을 바라보면 서쪽담을 볼 수 없다. 저 언덕이 멀지 않은데, 어찌 반드시 땅만 마음에 있는가 라고 말하였다.
갑자기 산에서 나와 바다에 머무르며 중국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려고 하였다. 나라에서 사신이 부절을 가지고 천자를 조회할 일이 있어 그 배에 의지하여 중국으로 향해 갔다. 급기야 바다 한 가운데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거칠어 큰 배가 깨어지고 사람들이 어쩔 수 없었다. 대사는 벗인 도량(道亮)과 함께 널빤지 앉아 바람에 떠다녔다. 밤낮 없이 반달 여 후 표류하다 검산도(劍山島)에 이르렀다. 무릎으로 기어 물가에 이르러 한참 동안 슬프게 바라보며 말하였다.
물고기 뱃속에서 다행히 탈출하여 용의 턱 아래 있는 구슬을 손을 넣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돌이 아니라 물러날 수 있겠는가? 장경(長慶, 821-824) 초에 조정사(朝正使)로 왕자(王子) 흔(昕)이 당은포(唐恩浦)에 배를 대었다. 태워 줄 것을 청하자 허락하였다.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하여 먼저 어려웠던 일을 후에 쉽게 됨을 돌아보며 바가 신에게 공손히 절하고 고래물결에 진중하여 바람의 악마와 잘 싸웠다고 하였다.
대흥성(大興城) 남산(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 화엄(華嚴)을 이야기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부석사에서 배운 것과 같았다. 이때 얼굴이 검은 노인이 그를 잡고, 멀리 사물에서 구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부처을 인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였다. 대사가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 이때부터 필묵을 그만두고 유람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불광사(佛光寺)에서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강서(江西)의 인가(認可)를 받았고 향산(香山)의 백상서(尙書) 낙천(白樂天)과 불법을 같이 배운 벗으로 대답하면서 매우 부끄러워 하면서 내가 여러 사람을 겪어 보았지만 이 신라 젊은이 같은 사람은 있지 않다고 하였다.
다음 날 중국에서 선이 쇠하면 장차 우리나라에서 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마곡보철스님(麻谷寶徹和尙)을 찾아가 만났다. 특별히 가리는 것이 없이 다른 사람이 하기 힘들 것을 쉽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대사를 보고 선문(禪門)의 유검루(庾黔婁)와 같이 남다른 행실을 한다고 말하였다. 철공(徹公)이 대사의 노력을 현명하게 여기고 하루는 불러서 말하기를 옛날 나의 스승 마 스님(馬和尙 일명(馬祖道一))께서 나에게 유언하기를,
봄에는 꽃이 번성하였는데 가을에는 열매가 적다. 이는 도수(道樹)를 반연(攀緣)하는 자가 슬퍼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에게 깊은 이치를 다음 날 제자 중에 재주가 뛰어나 북돋아 줄 사람이 있으면 북돋아 주어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기를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은 거의 예언에서 나왔다. 저 해 뜨는 동방에 속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거의 완숙하다. 만약 네가 동쪽 사람으로 눈으로 말할 만한 사람을 얻어 잘 이끌어 지혜의 물이 바다 밖까지 덮도록 한다면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스승의 말이 아직 귀에 있는데 나는 그대가 온 곳이 기쁘다. 지금 이치를 전해주어 동쪽에서 선종의 으뜸가는 사람이 되어 가서 삼가 실행하라. 곧 나는 지금 강서(江西)의 대아(大兒)요 후세에는 해동(海東)의 대부(大父)로서 스승님께 선사(先師)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거처한 지 얼마 안 되어 스승이 세상을 떠났다. 물건을 머리에 쓰고 이에 말하기를, 뗏목이 이미 버렸는데 배를 어찌 묶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부터 바람처럼 그렇게 유랑하였다. 그 기세는 말할 수 없고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이렇게 분수(汾水)를 건너고 곽산(崞山)에 올랐다. 오래된 자취를 반드시 찾았고 진실한 승려는 반드시 만나 보았다.
무릇 머무는 곳은 인가를 멀리하였고 그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게 여기고 고생을 달게 여겼다. 사체(四體)를 노예처럼 하고 마음은 임금처럼 받들기 위해서이다. 이런 중에 오로지 아픈 사람을 돌보고 의지할 수 없는 고아와 홀로된 이를 도와주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겼다. 혹독한 추위와 더위로 열이 나서 답답하고 손발이 동상이 침입하여도 전혀 개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멀리에서도 예의를 갖추었고 동방의 대보살이라고 소문이 났다. 30년 전 행적은 이와 같았다.
회창(會昌) 5년(문성왕, 845)에 귀국하였다. 당 황제의 명 때문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서 말하기를, 연성벽(連城璧)이 다시 돌아왔다. 이는 하늘이 보배로 이 땅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벼와 삼대 같이 빽빽하였다. 경주로 들어가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크게 기뻐 하시며 말하기를, 돌이켜 보니 내가 옛날에 꾼 꿈이 우담화(優曇花:삼천년에 한번 꽃을 피는 금륜당에 나오는 상상의 나무)가 한번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세를 제도하기를 원하노라. 나는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북쪽으로 가서 종신토록 살 곳을 찾아다녔다. 마침 왕자(王子) 흔(昕)이 벼슬을 그만두고 산중의 재상(宰相)처럼 지내고 있었다. 우연히 만나려고 소원을 풀고 말하기를,
스님과 나는 모두 용수(龍樹) 을찬(乙粲)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 스님은 내외(內外)가 모두 용수(龍樹)의 자손이다. 진실로 놀라워 미치니 못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다 밖에서 옛날 인연이 진실로 얕지 않다고 할 것이다. 웅천주(熊川州) 서남쪽 모퉁이에 사찰 하나 있는데 이곳은 나의 선조인 임해공(臨海公)이 봉토(封土)로 받은 곳입니다. 중간에 재해를 입어 금전(金田)의 반이 잿더미가 되었다. 자비롭고 명석한 분이 아니면 누가 없어진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을 수 있겠는가. 강제라도 늙은이를 위하여 머물러 달라고 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으면 머물러야지요’ 라고 하였다.
대중(大中, 847-859) 초 나가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또 정비하고 단장하였다. 잠깐 사이에 도가 크게 행해지면서 절이 크게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 먼 곳에서 배우려는 무리들이 천리 먼 길을 반걸음처럼 여기고 찾아왔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문도들이 실로 번성하였다. 대사가 종을 두드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였고, 거울이 피곤함을 잊은 것처럼 하였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지혜의 횟불로 그 눈을 이끌어 주고 법회를 즐거움으로 배를 채워주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정신없는 것을 이끌어 주고 무지한 속성을 변화시켰다.
문성대왕(文聖大王)이 대사가 운영하는 일은 제왕의 독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며 매우 모범적이라고 하였다. 급히 서찰로 우아하게 위로하였다. 대사가 산중 재상에게 대답한 네 마디 말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고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켰다. 대사가 왕의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지어주신 것은 진실로 영광스럽고 지극히 총애하는 것입니다. 용렬한 중이 피리 부는 자리가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것은 실로 바람을 피한 새로 안개비 오는 날 숲에 숨은 표범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때 헌안대왕(憲安大王)께서 사찰의 주지인 동생 위흔(魏昕, 金陽)과 함께 남북의 재상이 되었다. 멀리서 제자의 예를 행하며 차와 향을 예물로 보내어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대사의 명성이 우리나라에 모두 퍼지게 되어 선비들은 대사의 선문을 모르면 일세의 수치가 되었다.
선사의 발에 영예를 표하고 사람들은 물러나와 반드시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직접 얼굴을 뵈오니 귀로 듣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입으로 말씀하지 않아도 이미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하였다. 원숭이와 호랑이 같이 관을 쓴 사람이 있어도 또한 조급함을 멈추고 사나운 마음을 바꾸어 다투어 착한 길로 달렸다.
헌안대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글을 내려 대사에게 말을 청하자 대사가 답하기를, 주풍(周豐)이 노공(魯公)에게 대답한 말은 뜻이 있습니다. 예경(禮經)에 실려 있으니 자리 곁에 새겨 두시라고 하였다.
태사(太師)에 추증 받으신 선대왕(先大王, 景文王)이 즉위하셔서 흠모하여 존중하기를 선조(先朝)의 뜻과 같이 하였다. 예우하는 것이 날로 두터워졌다.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말을 달려 묻게 한 후에 거행하였다.
함통(咸通) 12년(경문왕11, 871) 가을에 왕이 급히 교서(敎書)를 내려 대사를 부르면서 이르기를,
산림(山林)은 어찌 가까이 하시면서 도성은 어찌 멀리하십니까 하였다
이에 대사가 생도(生徒)에게 이르기를,
갑자기 백종(伯宗)에게 내린 명을 보니 원공(遠公)에게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도가 행해지게 하려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부처의 법의 유통을 부촉한 일로 나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홀연히 도성에 이르러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대사에게 절하며 국사(國師)로 삼았다. 군부인(君夫人)과 세자, 그리고 태제(太弟)인 상국(相國)과 여러 왕자, 왕손들이 대사를 둘러싸고 한결 같이 우러러 보았다. 옛날 사찰의 벽화같이 서방(西方) 여러 군장(君長)들이 부처를 모시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제자가 재주가 없어 어릴적에 글짓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일찍이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유(有)에만 집착하고, 무(無)만 고수하면 한쪽 면으로 치우쳐 이해한다. 참된 근원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반야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곧 경계가 끊어진 것은 혹 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경지가 이미 끊어졌다. 진리 또한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전하는 언설(言說)의 도리도 끊어진 것입니다. 이는 깊은 의지이고 말없이 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임금께서이 이르기를,
과인은 진실로 조금 더 배우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이에 무리 가운데 쟁쟁한 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질문하도록 명하자 질문에 따라 답하는데 종을 치듯이 하고 조용히 답변을 다하였다. 막힌 것은 통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없애 주었다. 마치 가을 바람이 음침한 구름을 보내는 듯 하였다. 이에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대사를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하며 말하기를,
몸을 공손히 하여 임금을 향하며 남종(南宗)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순(舜) 임금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하였다.
궁을 나오자 재상들이 다투어 맞이하여 논의하려고 하여도 시간이 없고 일반 백성들이 추종해서 받드니 떠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의 옷 속에 보물이 숨겨진 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이웃집 노인이 처마 밑의 보물을 탐하지 않게 되었다. 잠깐 새장 속의 새처럼 괴로워 곧 도망하듯 떠나갔다. 임금께서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글을 내려 상주(尙州)의 심묘사(深妙寺)가 경주로부터 멀지 않으니 선정(禪定)을 닦는 별관(別館) 할 것을 청하였다. 대사가 사양하자 그곳으로 가서 거주하였다. 하루를 머물더라도 반드시 수리하여 엄연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부(乾符) 3년(헌강왕, 876) 봄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이 병환으로 가까운 시중에게 명하여,
우리 대의왕(大醫王)을 얼른 모셔 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이 도착하자 대사가 이르기를,
산승(山僧)의 발길이 왕궁에 이른 것은 한 번이라도 심하다고 할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성주(聖住)가 무주(無住)가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염(無染)이 물들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 임금과 서로 불교의 인연이 있어 도리천(忉利天)으로 가실 날이 있으니 어찌 한번 가서 작별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다시 걸어서 왕궁으로 가서 약이 되는 말을 베풀어 훈계와 경계로 베푸시니 깨닫는 가운데 병이 조금 나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 달이 지나자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상복을 입었다. 울면서 왕손인 훈영(勛榮)에게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다.
내가 어려서 부친의 상을 당하여 정사를 능히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을 인도하고 부처를 받들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말 수 없는 일입니다. 부디 대사께서 멀리 하지 마시고 거처할 곳을 택하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스승의 가르침을 경서에 기록하고 지금 보필할 사람은 바로 삼경(三卿)이 있습니다. 늙은 산승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메뚜기처럼 앉아서 땔나무와 곡식을 축낼 뿐입니다. 세 마디 말로 남길 말이 있으니 관리를 잘 등용하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날 산으로 떠날 여장을 꾸려서 새처럼 날아갔다. 소식을 전하는 역마(驛馬)의 그림자가 바위와 시내 사이에 이어졌다. 역졸(驛卒)들이 가야 할 곳인 성주사(聖住寺)라는 것을 알고 모두 뛸 듯이 기뻐하며 손을 모아 말고삐를 고쳐 잡고 왕의 노정에 지체될까 걱정하였다. 이로 인해 기상시(騎常侍)의 무리들이 아무리 급한 임무를 부여받아도 손쉽게 거행할 수가 있었다.
건부제(乾符帝)가 석명(錫命)하던 해(878), 국내에서 도를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는 계책을 올리게 하였다. 특별히 서한을 보냈는데 하늘의 은총을 입은 것은 그럴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나라에 이익을 주는 것에 대한 물음에 대사는 하상지(何尙之)가 송 문제(宋文帝)에게 바칠 말이라고 대답하였다. 태부왕(太傅王)께서 이를 보시고 동생인 남궁상(南宮相)에게 일러 말하기를,
삼외(三畏)는 삼귀(三歸)에 비교되고 오상(五常)은 불교의 오계(五戒)와 비슷하다. 왕도(王道)를 잘 실천하는 것이 부처의 마음에 부합된다. 대시의 말이 지극하여 나와 그대는 마땅히 노력하자고 하였다.
중화(中和)의 가을에 서쪽으로 피난하여 임금께서 시중에게, 나라에 큰 보주(寶珠)가 있는데 평생토록 궤에 감추어 두는 것이 옳은가 묻자, 옳지 않습니다. 때때로 꺼내어 많은 백성들의 눈을 일깨워 사방 이웃 나라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아주 귀한 구슬이 있는데 빛을 감추고 숭암산(崇巖山)에 있다. 그 감춘 것을 열기만 하면 삼천세계를 환희 비출 것이다. 어찌 수레 열둘을 비추어 구슬과 비교가 되겠는가. 나의 부왕께서 간절히 맞이하셔서 두 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옛날 찬후(酇侯)는 한왕(漢王)이 대장(大將)을 임명하면서 마치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같이 한다고 하여 비난하였다. 상산(商山)의 네 노인을 부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천자께서 피난하셨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서 문안드려야 하나 근왕(勤王)을 두텁게 하려면 부처에게 귀의함이 먼저다. 장차 대사를 맞이 해야 하고 반드시 세상에 흡족하게 해야 한다. 내 어찌 감히 권력 하나에 의지하여 나이 많고 덕망 있는 분에게 무례하게 하겠는가. 이에 사자를 정중하게 하고 말을 겸손하게 하여 부르셨다.
이에 대사가 말하기를,
외로운 구름이 산에서 나오는 것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이겠는가. 대사를 만나봄에 선조(경문왕)의 예와 같이 예가 더욱 빛나 손꼽을 만하다. 직접 음식을 공양함이 첫 번째이고, 손수 향을 전하는 것이 두 번째이고, 세 번 경의를 표하는 것이 세 번째이다. 작미향로를 잡고 영생의 인연을 맺는 것이 네 번째이고, 법명 광종을 더한 것이 다섯 번째이다. 다음 날 관리들에게 대사의 거처에 가서 기러기처럼 줄을 지어 하례 한 것이 여섯 번째이다. 나라 안에 시를 연마하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전송하는 시를 짓게 하고 재가 제자로서 왕손(王孫),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가장 먼저 시를 지어 그것을 거두어 시축(詩軸)을 만들고 시독(侍讀)이고 한림(翰林)의 재자(才子)인 박옹(朴邕)이 인(引)을 지어 작별 선물로 증정하게 한 것이 일곱 번째이고, 행사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명하여 정결한 방을 준비하도록 하고 그곳에서 작별한 것이 여덟 번째이다.
고별에 임하여 신묘한 비결을 구하자 이에 눈짓하여 구하자, 진요(眞要)를 들려주자고 하였다. 순예(詢乂)와 원장(圓藏), 허원(虛源)과 현영(玄影) 같은 이는 사선(四禪) 중에서 청정(淸淨)을 얻은 사람이다. 실을 뽑듯 지혜를 풀어내고 뜻을 기울려 태만함 없고 임금의 마음을 계발함에 여유가 있었다. 임금께서 매우 즐거워 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경배하며 말하기를,
옛날 저의 부왕께서 비파를 버린 증점과 같은 현인이었고, 지금 저는 증삼과 같은 아들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서 공동산(崆峒山)의 가르침을 청하여 얻었고 가슴에 간직하고 혼돈의 근원을 열게 되었습니다. 저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하던 강태공은 사실 명예를 낚으려는 자이며, 흙다리[圯橋]위의 유자(孺子) 또한 대개는 노옹의 자취를 밟은 사람입니다. 비록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여도 세 치의 혀를 희롱했을 뿐이다. 나의 스승께서 비밀한 말로 마음을 전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받들고 실천하며 감히 실추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태부왕(太傅王)께서 중국어를 잘 하셔서 소리가 금옥 같았다.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도 관계 없이 입을 열면 변려체(騈儷體)의 대구를 이루는 것도 마치 오래 전에 문장을 지어 놓은 것 같았다. 대사가 물러 나온 후 다시 왕손인 소판(蘇判) 김일(金鎰)의 청에 응하였다. 함께 수차례 말을 나누고 곧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날 임금 중 장수 하는 분은 있어도 정신이 깊지 못하였다. 우리 임금님께서는 겸비하셨다. 신하는 재상이 될 만한 재주는 있어도 덕망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는 온전히 갖추었습니다. 나라가 잘 다스려 질 것이라고 하였다.
마땅히 덕을 좋아하고 스스로 사랑하라고 하고 이에 돌아와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이에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어 방생장(放生場)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새와 짐승이 기뻐하고 아주 잘 쓴 글씨를 성주사(聖住寺)의 제액(題額)을 썼다. 마치 용과 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성대했던 일이 마치고 창성한 것도 기간이 홀연히 다 한다.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즉위하여 양조(兩朝:경문왕, 헌강왕)에서 은혜 입은 것을 본받아 행하였다. 승려와 신도들에게 거듭 사신을 보내어 영접하게 하였다. 늙고 또 병들었다고 사양하였다. 태위왕(太尉王, 진성왕)께서 은혜의 흐름이 바다 같고 덕 있는 사람을 존경하기를 높은 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즉위 한 지 90일에 안부를 물어 열 번이나 다녀갔다. 조금 있다 머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의(國醫)를 보내 치료하게 명하였다. 도착하여 아픈 상황을 물으니 대사가 미소 지으며 노병(老病)일 뿐 번거롭게 치료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루에 두 번 먹는 미음을 반드시 종소리를 들은 후 올리도록 하였다. 제자들은 대사가 식력(食力)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몰래 종을 치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치게 하였다. 이에 눈치채고 상을 거두라고 하였다.
장차 열반에 드시면서 시중 드는 사람에게 명하여 유훈을 대중에게 알리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내 나이 이미 중수(中壽, 80)를 넘었으니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 나는 멀리 떠날 것이니 너희들은 잘 지내도록 하여라. 공부를 한결같이 하여 지키되 잃지 마라. 옛날의 관리들도 마땅히 힘써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 말씀을 마치고 움직이지 않고 입적하셨다.
대사의 성품은 공손하고 근신하였다. 말이 화기한 분위기를 깨트리지 않았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몸가짐이 겸손하고 말은 낮고 느리다. 학승들을 반드시 선사(禪師)라고 불렀다. 손님을 접대할 때는 존비를 나누어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는 자비가 가득 차고 제자들이 기뻐하며 따랐다. 5일을 기한으로 온 사람들에게 의심을 묻게 하였다.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곧 말하기를,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은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너희들이 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어찌 멀리 하겠는가. 설령 농부라도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달리면 곧 마음도 따라오니 도사(導師)와 교부(敎父)라고 어찌 종자(種子)가 따로 있겠느냐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저 사람이 마신 것이 나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고, 저 사람이 먹은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니 어찌 노력하여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않겠는가. 혹 교(敎)와 선(禪)이 같지 않다고도 말하지만 나는 그런 근본 취지를 보지 못하였다. 말은 본디 많은 것이나 내가 알지 못한다. 대개 비교해 보면 같아도 함께 하지 않고 자기와 달라도 비난하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서 참선하여 마음의 근본은 쉬는 것이고 이것이 수도자의 행동에 가깝다고 하였다. 그 말씀은 분명하고 순서가 있고 그 뜻은 심묘하고 믿음직하다. 상(相)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상이 없음을 알 것이고 길을 가는 사람이 부지런히 갈래 길 속에 갈래길이 있음을 보지 못 하는 것과 같다. 젊어서부터 노쇠할 때까지 자신을 낮추는 일을 기존으로 하였다. 먹는 것을 다르게 하지 않고 입는 것을 반드시 늘 같은 옷을 입었다. 무릇, 건물을 짓고 수리할 때 대중보다 먼저 일을 하며 매번 말하기를 조사께서 일찍이 진흙을 이기셨는데 어찌 내가 잠시라도 편안히 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물을 긷고 나무를 지며 친히 하면서 또 말하기를,
산이 나 때문에 더럽혀졌다. 내가 어찌 편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자기 몸을 극복하는 것에 힘쓰고 모두 이와 같다. 때사께서 어려서 유가의 경전을 읽고, 그 여운이 입에 남아 있어 응대할 때 운어(韻語)를 많이 사용하였다.
문하의 제자로서 이름을 들 수 있는 사람은 2천명이다. 그 중에서 무리와 떨어져 절에 앉아 지낸다. 승량(僧亮)과 보신(普愼), 순예(詢乂)와 심광(心光) 등이 있다. 모든 법손(法孫)이 많고 무리가 번선하여 가히 마조도일의 용자(龍子)를 길러서 신라가 중국을 능가한다고 말하였다.
논하여 말하기를,
인사(麟史)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공후의 자손은 반드시 그의 조상을 본받는다. 옛날 무열대왕(武烈大王)이 을찬(乙粲)이었을 때, 고구려의 정벌에 원군을 청할 계책으로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명을 받들고 소릉황제(昭陵皇帝, 당 태종)를 알현하였을 때. 정삭(正朔)을 받들고 복장(服章)을 바꾸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고 중국 의복을 하사하시고 특진의 관작을 주었다.
하루는 여러 왕자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는데 크게 술자리를 베풀고 보화를 쌓아 두고 마음대로 가지라고 하셨다. 무열왕이 술을 마시는 일은 예법를 지켜 어지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셨고 화려한 비단은 지혜를 써서 많이 얻으셨다. 하직하고 나올 때, 황제께서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며 나라의 인재라 감탄하셨다. 그곳에서 올 때, 황제께서 직접 쓴 온양(溫陽)과 진사(晉祠)의 두 비문(碑文) 및 친히 저술한 『진서(晉書)』한 질을 하사하셨다. 이 때, 봉각에서 이 글을 배껴 겨우 2본을 받쳤는데 하나는 저군(儲君 태자)에게 주고, 하나는 우리에게 주었다.
또 높고 귀한 관리들에게 동문 밖에 나가 전송하라고 명 하셨다. 각별한 은총과 두터운 예우에는 지혜가 어두운 사람이라도 보고 듣고 놀라게 할 정도였다.
이로부터 우리의 땅이 변화하여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렀다. 8세(世) 손인 대사께서 중국에 유학하여 배운 것으로 우리 나라를 교화시켜 이상적인 나라로 변화시켰으니 비할 데 없이 크다. 이런 분이 아니면 누구를 위대하다고 말 하겠는가. 선조(先祖)는 두 적국을 평정하시고 문명을 접하게 하였다. 대사께서 불법을 방해하는 악한 것을 물리쳐 마음의 덕을 닦게 하였다.
그러므로 천승(千乘) 제후국의 임금이 양조(兩朝)에 걸쳐 경배하였고, 사방 백성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 들었다. 원하는 대로 따르면서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5백 년마다 현인이 나타난다는 말처럼 성인이 세계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상을 본받는 다는 말에 어찌 부족하겠는가. 문성후(文成侯, 張良)는 한 고조(漢高祖)의 사부(師父)가 되어 만호(萬戶)에 봉해지고 제후가 된 것을 크게 자랑하여 한(韓)나라 정승의 자손으로 지극히 명예로운 것은 이것이 비루한 일이다.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테양 위를 날아갈 수 있겠는가. 중간에 그쳐서 학 위에 한 몸을 얹고 다니는데 한 낱 덧 없는 몸일 뿐이다.
우리 대사께서 속세를 초월하여 중간에 중생을 제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이 깨끗하게 하는 것을 견줄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성덕의 형용은 옛날부터 송(頌)을 사용하였으니 게송(偈頌)도 비슷한 것이다. 침묵을 깨고 명(銘)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가도가 상도가 되고 可道爲常道
풀 위의 이슬을 꿰는 것과 같네 如穿草上露
즉불이 진불이 되고 卽佛爲眞佛
물속의 달을 잡는 것과 같네 如攬水中月
상도가 진불을 얻은 것은 道常得佛眞
해동의 김 스님이구나 海東金上人
본래 근본이 성골이 가지로서 本枝根聖骨
상서로운 연꽃의 태몽을 얻었네 瑞蓮資報身
오백년 땅에 태어나 五百年擇地
십삼 세에 속세를 출가하여 十三歲離塵
화엄이 대붕의 길을 이끌어 雜花引鵬路
험한 바다 위에 배를 띄웠어라 窽木浮鯨津
요 임금의 태양 아래 관광하고서 觀光堯日下
큰 뗏목을 능히 버릴 수 있었구나 巨筏悉能捨
선배들 모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先達皆嘆云
고행으로 따라갈 자가 없다네 苦行無及者
불교를 탄압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沙之復汰之
동방으로 귀국하니 하늘의 복이라 東流是天假
마음의 구슬은 마곡(麻谷)을 비추었고 心珠瑩麻谷
눈의 거울은 도야를 밝혔구나 目鏡燭桃野
봉황이 와서 자태를 드러내어 旣得鳳來儀
뭇 새들이 다투어 뒤를 따랐네 衆翼爭追隨
천변하는 용을 한번 보시게 試觀龍變化
어찌 범상한 생각으로 헤아리겠는가 凡情那測知
인방에서 방편을 드러내 보이면서 仁方示方便
성주사에 억지로 주지하였는데 聖住強住持
송문에 석장을 머물 때마다 松門遍掛錫
산길은 송곳 세우기도 어려웠다오 巖徑難容錐
대사는 삼고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我非待三顧
칠보로 영접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我非迎七步
나가야 할 때 또 나갔나니 時行則且行
부처가 불법의 유통을 부촉한 일 때문이었네 爲緣付囑故
두 임금이 아래에서 절을 하였고 二王拜下風
한 나라가 감로에 젖었건만 一國滋甘露
동천의 가을날에 학처럼 나왔다가 鶴出洞天秋
해산의 저물녘에 구름처럼 돌아갔다오 雲歸海山暮
나오는 것은 섭룡보다 귀하였고 來貴乎葉龍
떠나는 것은 명홍보다 높았나니 去高乎冥鴻
물 건너면서 소보를 좁게 여기다가 渡水陿巢父
골에 들어 낭공보다도 뛰어났어라 入谷超朗公
한번 섬에서 돌아온 뒤로 一從歸島外
세 번 호중에서 노니는구나 三返遊壺中
사람들이 제멋대로 시비를 논하지만 群迷漫臧否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다 하리오 至極何異同
이 도는 담박해서 맛이 없고 是道澹無味
억지로라도 마시고 먹어야 하리니 然須強飮食
남이 마신 술은 나를 취하게 못하고 他酌不吾醉
남이 먹은 밥은 나를 배부르게 못한다네 他飧不吾飽
대중에게 훈계하여 사심을 버리게 하되 誡衆黜心何
명예와 이익을 겨와 쭉정이로 여기라 하고 糠名復粃利
세속에 권면하여 몸을 단속하게 하되 勸俗飾身何
인과 의를 갑옷과 투구로 여기라 했네 甲仁復胄義
계도하며 버리는 일이 없었나니 汲引無棄遺
그야말로 천인사라 칭할 분이라 其實天人師
옛날 세상에 계실 때 昔在世間時
온 나라가 유리처럼 환하구나 擧國成琉璃
스스로 적멸하여 돌아가신 뒤로는 自寂滅歸後
밟는 곳마다 가시풀이 돋는구나 觸地生蒺莉
어찌 그리 일찌감치 열반에 드셨는지 泥洹一何早
고금에 걸쳐 누구나 슬퍼할 일이로다 今古所共悲
사리탑을 쌓고 다시 비석에 새겨 甃石復刊石
유골을 보관하고 자취를 드러냈나니 藏形且顯跡
고니 같은 흰 탑은 청산에 점을 찍었고 鵠塔點靑山
거북 등의 비석은 취벽을 버티고 섰도다 龜碑撑翠壁
이것이 어찌 본래의 마음이리오 是豈向來心
문자만 살피는 것은 헛수고일 뿐 徒勞文字覛
그저 후세에 지금을 알게 하려 함이니 欲使後知今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것이로다 猶如今視昔
천년토록 스며들 임금의 은혜요 君恩千載深
만대토록 흠앙할 스승의 교화로다 師化萬代欽
누가 자루 있는 도끼를 잡을 것이며 誰持有柯斧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탈 것인가 誰倚無絃琴
선의 경지를 지킬 사람이 없다 해도 禪境雖沒守
객진이 어찌 침노하게야 놔두리오 客塵寧許侵
계봉에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雞峯待彌勒
길이 동쪽 계림에 건재하리라 長在東雞林
『孤雲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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