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기(東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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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기(東行記)
삽교(霅橋) 안석경5)(安錫儆)
기해(5월 1일)
아침 일찍 환허대사 신규가 작별 인사를 하였다. 말이 자못 정성스러웠다. 유평부(幼平賦) 한 수를 지어 먼저 주기에 나도 차운하여 화답하였다. 20리를 걸어 간성군의 청사를 지나갔다. 또 남쪽으로 10리를 걸어 선유담에 들어가 뒤 가정에 올랐다.
선유담은 물결이 잔잔하고 넓게 퍼져 운치가 있었다. 물고기와 새들이 많았다. 사면을 둘러싼 봉우리들에도 추한 기상은 없었다. 동쪽은 바다물을 사이를 두고 있고 일대에는 소나무 숲이 있있다. 배들이 돛 가득 바람으로 가니 구름처럼 높은 파도가 일어난다. 작은 언덕이 구불구불 갑자기 선유담의 속으로 들어간다. 정자는 그 머리 앞에 있다. 그윽하고 고요하며 깨끗하여 매우 좋았다.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6, 7리를 가서 소리포를 보았다. 맑고 조용하며 경치가 밝고 동해와 얕은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있서 구경하고 즐길 만하였다. 20리쯤 가서 청간정에 올랐다. 정자는 왼쪽으로 푸른 바위를 끼고 동쪽으로 푸른 바다에 접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만경루와 이어졌다. 만경루는 비교적 높아 멀리에서도 볼 수 있었다. 현판에 택당 이식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만경루는 서남쪽으로 언덕을 등지고 있고 그곳에는 운근정의 옛터가 남아 있다. 서남쪽으로는 설악산과 천후산의 구름과 바위들이 깨끗하게 보였다. 동쪽은 높아 큰 바닷물을 굽어볼 수 있다. 맑은 계곡을 따라 물이 모여드니 그 감상이 참으로 장엄하다. 운근정이 허물어져 아쉽구나.
율촌에서 잤다. 삼연 김창흡이 운근정을 매우 사랑하여 시를 지었는데, 뒷날에 포부가 큰 선비가 있어 반드시 다시 세울 것이다.
경자(5월 2일)
새벽에 일어나 만경루에 올랐다. 일출을 기다렸는데 안개가 가리어 보지 못하여 아쉬웠다. 남쪽으로 20리를 가서 화암사로 들어갔다. 큰 산을 이고 있고 바로 금강산 남쪽이 된다. 관은 자못 돌 색을 띠고 있었다. 앞으로는 계곡물을 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화암은 특별히 수백 길 높이로 우뚝 솟아 대하고 있다. 위에는 물레방아가 12개가 있다고 한다.
남쪽으로 5리쯤 올라가서 석인대 근처이다. 석인대 가의 돌은 사람의 모습이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았다. 세 개로 전체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활처럼 휘어져 길고 위에는 절구 같이 뚫려 있어서 5, 6 곳에 물이 고여있는데 바로 석인대는 남쪽이다. 천후산과 설악산을 마주하는데, 돌 모서리가 뾰쪽하게 솟아 있다. 동쪽으로는 세 개의 호수와 바닷물을 굽어보고 있다.
원호는 북쪽에 있고 영랑호는 가운데에 있고 청초호는 남쪽 바닷가에 있다. 통고로부터 곤강까지 4, 5백 리를 볼 수 있다. 들으니 명나라의 군대가 동쪽으로 와서 조선을 구하러 왔을 때 영랑호에 주둔하였다가 3일 만에 돌아갔다. 돌아갈 때 크게 웃으면서, 천하의 절경이다. 아아, 어찌 가질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한다. 이 말은 삼연 김창흡이 계현(契玄)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영랑호는 탁 트이고 아늑한데 사방 언덕은 모두 흰 모래로 되어 있으며 기이한 돌이 많다. 동쪽은 푸른 바다가 허공에서 아득하게 출렁거린다. 서쪽은 설악산과 천후산, 화암봉과 석인봉이 둘러싸고 있는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장군이 연연하여 떠나지 못한 것인가.
남쪽으로 15리에 양양 땅인 천후산 계조굴로 들어갔다. 5리를 내려와 내원(內院)에 들었다. 또 5리에 신흥사에 들어갔다. 모두 옛날에 구경했던 곳이다. 미타전에서 잤다.
신축(5월 3일)
새벽에 이화정 위로 나아가 일출을 보았다. 구름이 조금 있었지만, 바다는 고요하고 바람이 없었다. 붉은 덩어리가 솟아오르며 들끓으며 출몰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하였고, 다만 큰 불 수레가 아득한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침 늦게 절문을 나서 남쪽으로 몇 리에서 송림으로 들어갔다. 동해묘를 보았는데 묘의 왼쪽은 바다였다. 앞의 시냇물은 자못 조용하고 넓었다. 지켜서 보호하는 것이 엄하지 않아 백성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기도하니 가히 놀랄 만하였다.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태평루에 올랐다. 태평루 편액 안의 글자는 안평 대군의 글씨로 문미 밖에 걸려 있고, 큰 글씨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문미 안에 걸려 있었다.
서쪽으로 몇 리에 임천(林泉)의 이씨 농막으로 들어갔다. 상사(上舍) 심보(心甫) 이운일(李運一)과 함께 풍류와 사한(詞翰)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내용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나의 풍악축을 찾았다. 그러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문장을 어찌 감히 학문이 높은 사람 앞에 당돌하게 내 놓겠는가. 이에 약간의 시를 외웠다.
이운일이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풍악산을 삼일 동안 유람하면서 이백칠십 수의 시를 얻었는데, 어찌 그대는 이십 일 동안 산중에 있으면서 삼십 수를 채우지 못했는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천 리 길에 피곤하여 붓을 잘 놀릴 수가 없었다. 산 또한 매우 기이하고 장엄하여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말을 찾으려다 붓을 함부로 놀릴 수가 없었다. 이것이 시가 많지 않은 까닭입니다. 어찌 그대의 훌륭한 솜씨를 나의 졸렬한 솜씨에 비교하여 논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임인(5월 4일)
임천에 머물면서 이운일의 만석정을 방문하였다. 이운일이 찾아와 기문를 부탁하여 피곤하여 사양하였다. 달계서원을 구경하였다. 이유(李維)는 덕이 후덕히 쌓여 문행(文行)으로 현달하였다. 근후한 행동과 문장을 지닌 여러 후진이 서숙(書塾)으로 찾아와 공부하고 있었다. 선비들이 파도처럼 모여드니 공경할 만하였다. 저녁에 이운일의 집으로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묘(월 5일)
이운일과 동행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갔다. 말 위에서 시를 지었는데 모두 다섯 수였다. 서림(西林)에 도착하여 서로 헤어졌다. 그의 근후한 풍류와 정밀한 학문을 그리워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였다. 말을 타고 40리를 가서 갈산에서 잤다.
갑진(5월 6일)
구룡령을 넘어 대략 20리를 갔다. 명지거리에서 쉬었다. 10리를 가서 인암에 도착하였다. 바로 강릉 지역이다. 자못 수석이 아름다움이 있었다. 20리를 가서 갈마담에 있는 김해운(金海運)의 집에서 잤다.
을사(5월 7일)
20리의 출발해 갔다. 두일창을 지나 10리의 덕치를 넘었다. 10리를 가서 이치를 넘었다. 홍천의 대올곡을 내려가니 천석이 있었다. 35리를 가서 검산의 합윤에 있는 서씨의 농막에서 잤다. 검산의 동쪽 골짜기에 삼신산 폭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합윤의 하류에는 대암 폭포가 있다. 여름이면 고기가 많다. 또 그 아래에 옥련동이 있는데, 수석이 기이하고 장엄하였다. 문수연과 이어져 있다. 이곳으로부터 기도(棋檮)로 들어갔는데, 또한 하루의 노정이 걸린다.
병오(5월 8일)
험한 길을 들어 대략 30리의 횡성의 당현(唐峴)에서 쉬었다. 또 10여리를 가서 유곡(柳谷)에 있는 이씨의 농막에서 잤다.
정미(월 9일)
아침 일찍 유곡의 강 입구를 나왔다. 비를 만나 초현으로 들어갔다. 잠시 피하니 곧 날이 개었다. 율동을 나와 동현을 지나 개곡창을 지나서 중금에 있는 진씨의 농막에서 쉬었다. 수백(水白)을 지나 횡성 읍내에 있는 이처사 농막으로 갔다. 계암을 향하였다. 이유평과 군자당에서 함께 잤다. 환린(喚獜) 또한 같이 밤을 보냈다. 함께 산수를 유람하고 먼 길을 함께 고생하고 이별하여 각각 동서로 떠나야 했으니, 그 아쉬운 정을 가히 알 수 있다.
무신(5월 10일)
이유평이 먼저 떠나고, 환린도 이별하고 떠났다. 여관에 앉아 가히 무료함을 알 수 있다.
기유(5월 11일)
새벽에 출발하여 길을 원주의 계암을 지났다. 먼저 출발한 이유평이 10리를 지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암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보통리에 닿았다.
경술(5월 12일)
일찍 출발하여 흥원에 도착하였다.
신해(5월 13일)
안산(에 들어갔다. 대략 금강산의 둘레는 1,200리며 그 석봉의 둘레는 260리이다. 큰 산줄기 동쪽을 외금강이라고 한다. 그 길이는 160여 리이다. 서쪽을 내금강이라고 부르는데, 그 길이는 100여 리이다. 토산과 석산을 합하여 큰 봉우리만도 가히 일만 이천 개가 된다. 석산에 크고 작은 봉우리를 합하여 세어보면 또한 일만 이천 개가 된다. 대개 12는 지방의 큰 수이다. 그런 까닭에 불가의 책에 금강이란 말을 실어 놓고, 또한 절로 부합하게 한 것인가.
금강산은 그 바위가 서 있는 것이 열에 아홉이다. 어찌 땅이 이루어진 초기에 성대한 양의 기운이 다 엉겨 모여서 뜨거운 것이 곧바로 올라와서 그렇게 된 것이다.
금강산의 동쪽 산기슭은 바다로 들어가 있고 모두 아름답고 기이하며 아득하여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가 없다. 땅을 차지하고 있는 근저를 헤아리고 또한 아름다운 것은 비교할 것이 없고 심후한 것은 끝이 없다. 그 겉으로 드러나 볼 수 있어 천하에서 깜짝 놀라 주머니 밖으로 드러난 송곳 끝이 두려울 뿐이다. 복희씨는 괘를 그려 예를 분별하였고, 요 임금은 정사를 잘하였으며, 공자는 저술하였다.
일반 사람들에게서 곧 온축된 바를 가지고 논한다면, 또한 천만에 한둘도 되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 중에 구구한 재덕을 가지고 일에 적용하여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아아, 성급하고 망령됨이 심하도다.
『霅橋集』
「東行記」
己亥.
早發喚虛. 大師信奎拜別. 辭頗款. 曲㓜平賦一詩先贈. 余亦次之. 行二十里過扞城郡治. 又南十里入仙遊潭. 登驚亭. 潭澹蕩窃窕. 而紆回有致. 饒菱篿魚鳥. 回面峰巒無麁頑之氣. 東與海水只隔. 一帶松林. 風帆雲濤. 漂搖蕩洋於莙華之上. 小皐蜿蜒. 斗入於潭中. 亭在其頭. 幽閒備灑. 甚可愛. 遵海而南六七里. 見小梨浦. 澄㵛昭映. 與東海隔淺沙洲. 可賞二十餘里. 登淸澗亭. 亭左夾蒼巖. 而東臨碧海. 右聯萬景樓. 樓較高所覽益遠. 板刻澤堂詩. 樓所負西南皐. 有雲根亭墟. 西南見雪嶽天吼山雲石淸. 東峻俯大海水. 陪簁於淸磵之面. 其賞甚壯. 惜平基廢也. 宿律村. 淵翁甚愛雲根有詩. 後有曠士. 必復立之.
庚子.
晨起升萬景樓. 俟日出. 海霞掩蔽可恨. 西南行二十里. 入華巖寺. 所負大山. 卽金剛之南爲也者. 00官. 頗有石色. 前臨磵水. 東對禾巖磈磊. 特立數百何. 上有水臼十二云. 南陟五里許. 上石人臺. 臺上石如人. 並立者. 三處. 全體石也. 窿然而長. 上穿如臼鑊. 而水積之者. 五六. 卽臺南. 挹天孔雪岳. 石角峭拔. 東俯三湖大海水. 圓湖在北. 永郞在中. 靑草在南海. 自通高至袞江. 四五百里可見. 聞天兵. 東救朝鮮時. 天將屯水. 卽湖三日歸. 歸時大笑而曰. 天下絶境. 嗚呼奈有何. 此語. 三淵聞之契玄云. 永郞. 旣醖藉曠潤. 而四岸. 皆白沙皐. 多竒石. 東接碧海渺漾空明. 西擁雪嶽天吼禾巖石人壞瑋之賞. 此所以天將之戀戀. 不能捨者乎. 南行十五里. 入襄陽天吼山繼祖窟. 下五里入內院. 又五里入新興寺. 皆舊賞也. 宿彌陀殿.
辛丑. 晨出梨花亭上. 觀日出. 微有雲氣. 海靜無風. 不見飜紅沸赤出沒屢浴之狀. 而但覩大火輪踊出濛澒之上. 晩出寺門數界南. 入松林. 見東海廟. 廟左海而前溪水. 頗幽曠. 顧守護不嚴. 祈甿日集. 便成叢祠. 可駭. 西行十里. 登太平樓. 樓扁中字. 安平大君筆也. 懸楣外. 大字華陽先生筆也. 懸楣內. 西數里. 入林泉李氏庄. 李上舍心甫運一. 會話風流詞翰. 皆過絶於人. 而索余楓岳軸. 余顧寂寥數章. 何敢唐突於大至之前耶. 乃誦傳若干篇. 運一曰. 昔吾遊楓岳三日之間. 得二百七十首. 何子之二十日山中. 顧不滿三十首也. 余曰. 千里氣頗疲倦. 不能縱筆. 山又甚奇且壯. 必欲爲相稱之語. 故不能肆筆. 此詩之所以無多也. 抑子之健筆. 以余之拙而何可比論耶.
壬寅. 留林泉. 訪運一萬石亭. 運一求記. 辭以神疲. 見達溪書塾. 李氏維. 以厚德精基. 以文行顕達. 而諸俊進. 皆謹厚有文采. 方聚講於書塾. 音衿濟濟可敬. 夕就心甫. 從容語.
癸卯. 西行運一同行三十里. 馬上呼韻. 皆賦五詩. 至西林. 相別. 戀其篤厚風流. 煥爛文章. 徘徊憫悵不忍遽. 上馬行四十里. 宿葛産.
甲辰. 踰九龍嶺. 凡行二十里. 憇明紙巨里. 十里至印嚴. 卽江陵地也. 頗有水石之勝. 二十里宿渴馬潭金海達家.
乙巳. 發行二十里. 過斗日倉. 十里踰德峙. 十里踰梨峙. 下洪川大兀谷. 時有泉石. 行三十五里. 宿劍山之蛤洞徐氏庄. 聞劍山之東谷有三神山瀑布. 蛤洞洞下流. 有帒嚴瀑布. 魚於夏. 又其下有玉連洞. 水石奇壯. 連文殊淵云. 自此. 入棋檮. 亦檮一日之程云.
丙午. 踰遠入峙. 凡三十里. 憇橫城之唐峴. 又十餘里. 宿柳谷李氏庄.
丁未. 早出柳谷水口. 逢雨入草峴. 少避旣霽. 出栗洞. 過銅峴. 歷介谷倉. 憇中金陳氏庄. 歷水白. 抵橫城邑治李處士庄. 向階嚴. 㓜平同宿於君子堂. 喚獜亦同夜. 而山水同賞. 遠道同苦之餘. 將分袂而西東. 其悵然. 可知.
戊申. 㓜平先去. 喚麟辭退. 坐旅店無聊. 可知.
己酉. 晨發歷原州階嚴. 聞㓜平新發. 不過失十里云. 朝飯階巖. 夕抵寶通里.
庚戌. 早發到興原.
辛亥. 入安山.
大抵金剛之山. 周回可千二百里. 而伅石峰嶂. 周回可二百六七十里. 大脊以東. 謂之外山. 其長. 可一百六十餘里. 以西謂之內山. 其長. 百餘里. 合土山石山而數其大峭. 可修一萬二千峯. 執石山而合大小峭而數之. 亦可得一萬二千. 盖十二者. 地方之大數也. 故釋氏書. 懸揣金剛之言. 亦能自合也歟.
金剛山. 其石之立者. 十蓋八九. 豈非地成之初. 其盛陽之氣. 團聚而炎炎直上而然歟. 金剛之山. 其東麓入海者. 皆竒怪而磅礴. 不知其蟠據據所竟. 料其根柢之入地者. 亦皆瑰瑋. 無比深厚無窮. 則其標之可見. 而驚動於天下者. 恐不過囊錐之末耳. 伏義之畫卦制禮. 大堯之政事. 孔子之著述. 其見於人者. 就所蘊而言之. 亦當爲千萬之一二矣. 今人抱區區之才德. 而欲其悉展於事. 盡見於世者. 嗚呼其躁妄之甚乎.
『霅橋集』「東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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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석경(1718,숙종44∼1774,영조50)의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이다. 부친 중관(重觀)의 임소(任所)를 따라 홍천·제천·원주 등지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부친은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이다. 홍세태(洪世泰) 같은 중인 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였다. 저서로 『삽교집』·『삽교만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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