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일기(雪岳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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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일기(雪岳日記)
삼연(三淵) 김창흡6) (金昌翕)
8월 24일 맑음.
인제로 가려고 아침을 먹은 후 가묘(家廟) 및 큰 형님(김창집)에게 절하여 작별하였다. 둘째 형님(김창협)은 동문에서 지나면서 멀어졌다. 오후에 석곶(石串)을 지나다가 대유(김창업)를 보고 작별하였다. 저물어 금촌에 도착하여 무덤에 곡을 하였다.
8월 25일 맑음.
선묘(先墓)에 절하여 작별하고 일어나 석실(石室)로 향하였다. 여러 선영을 두루 뵈알하고 도문동(道文洞)에 머물러 있던 말을 취하여 현상 이운(李澐)과 작별하였다. 아호에서 말을 먹였다. 저물어 벽계에 도착하자 양겸이 거기 있었다. 정원과 오두막에는 잡초가 우거져서 볼 수 없었다. 오직 안산의 소나무가 푸르고 빽빽하여 뛰어나 즐거웠다. 밤에는 초당에서 잤다. 시냇물 소리 가득 들렸지만 잠자리는 흔들지 않았다. 밤에 비와 바람이 있었다.
26일 종일 비.
소요곡에 가서 이씨 노인에게 조문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도롱이를 걸치고 돌아오는 길에 비로 자못 많이 젖었다.
27일 맑음.
저녁에 행장을 꾸려 이현을 향해 가다 김충의 애산 집에서 잤다. 말을 빌리려는데 마침 그는 사회에 참가하러 가 오랫동안 앉아서 기다렸다. 술에 취해 돌아오는 그를 비로소 보고 등불을 밝히고 옛정을 나누니 마음이 즐거웠다. 나에게 소주를 권하기에 매우 굳게 사양하고 탁주로 바꾸어서 권하여 강제로 두 잔을 마시고 파했다.
28일 맑음.
닭이 울 때 행장을 꾸려 잠자리에서 밥을 먹고 밝기를 기다렸다 출발하였다. 노새의 등에 종기가 문드러져 탈 수가 없어 김충의의 말을 타고 갔다. 모두 노새의 등에 싣고 갔다. 안개가 많이 끼어 길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송치를 넘고 미원을 지났지만 모두 알아보지 못했다. 장을 잘못 들어 길을 잃었다가 되돌아 나와 4-5리를 가서 또 길을 잃었다. 나루로 향하는 길에서 행인의 지시로 멀리 가지 않아서 돌아왔다.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울업현을 넘는데 자못 높고 가팔랐다. 고개를 다 가자 길이 점점 평탄해졌다. 문득 범파의 하류를 만나 절벽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재 하나를 넘었는데 바로 기사현이다.
커다란 돌무더기가 많아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어 말에서 내려 수 백 보를 걸어갔다. 거친 평지와 깊은 숲 사이로 작은 시냇물 소리가 맑고 아름다웠다. 밭과 밭두둑이 서로 뒤섞여 있고 가까운 길 양쪽에 못과 대를 팠던 흔적이 드문드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정사예가 예전에 살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예전 경기도사 시 정공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못과 대를 보셨는데 굽이굽이 그윽하고 오묘하여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곳에 이르니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만사에서 일컬은 대로 용계일동은 지금은 진실로 옛일이 되어 있었다. 고삐를 잡고 배회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한때의 번영이 잠깐 사이에 폐허로 되어버려 허무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이곳을 지나자 들은 평평하고 강은 넓었다. 길 옆 농작물은 곳곳에 이삭이 무성하게 패었고 또한 아름다운 촌락이 있었는데 대부분 서쪽 둑에 있었다. 얼마 안 있다가 강을 건넜는데 여울 깊이는 말 배에 미치지는 않았다. 여울 이름은 박의암이다. 건넌 뒤에 벼랑길을 따라서 동쪽으로가니 의지할 만한 비취 빛깔 바위가 있었다. 바위 아래에는 땔감을 실은 조각배가 서쪽으로 내려가느라 어지러운 돌 사이를 삐걱거리며 돌아가는데 날아가는 오리처럼 빨라 바라보자니 아득하게 사라졌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니 바로 가정자이다. 말을 먹이며 잠깐 머물렀다. 주인 이름은 이이신으로 인품이 자못 좋았다. 계획한 노정의 구체적이고 상세하여 자못 자세히 알고 있어 막힘이 없었다. 이치부터 여기까지 보통 30리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40리이다. 앞으로 10리를 더 가면 추곡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자 산 기운이 아름답고 예뻤다. 하얀 산기슭과 비취의 소나무들이 곳곳에 모두 그러하였다. 대게 구씨 가문의 묘가 있는 산이 있는데 그 풍수와 기운을 보니 진실로 사람을 묻기에 알맞았으나 전답으로 논하자면 메마르고 물렁함이 너무 심하였다.
4-5리를 가자 낫을 걸어놓을 만한 곳도 없었다. 작은 재를 하나 넘었는데 삽일재라고 한다. 재를 내려가는데 굽이굽이 돌아가고 험해서 사람으로하여금 근심하게 하였다. 홀로 가니 실로 긴 활의 두려움이 생겼다. 모랫길이 구불구불하고 말발굽 자국이 분명하지 않았다. 돌 하나가 조금 구르면 구만이 되었다. 들의 경치가 아득하여 미원과 폭이 매우 비슷하였다.
물의 오른쪽 변 아래 봉우리가 높고 우뚝하게 있는데 마치 노남금강과 같으니 곧 팔봉이다.
동쪽으로 한 골짜기를 들어가서 있었는데 지장현이라고 한다. 굴기촌으로 향하고자 하였는데 인도할 사람이 없어 걱정이었다. 이때 소를 끌고 가던 사람이 있어 길을 자못 자세히 알려주었다. 재를 넘으려고 풀에 잠깐 앉아서 생콩을 말에 먹이고 말이 힘을 기른 뒤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높이는 천마의 차재와 서로 비슷하였다. 재를 내려 갈 때에는 날이 어두워졌는데 한 길이 구불구불하였지만, 말을 믿고 어두운 안개 속을 갔다. 단풍나무와 하얀 바위 경치는 달랐다. 시내가 있어 물이 맑고 빨라 강으로 다다르니 마치 말과 같았다. 시내를 건너 들에 올라가니 개 짖는 소리가 있었다. 처음으로 이른바 굴기촌에 비로소 도착하였다. 가정에서부터 이곳까지 60여리다.
29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평탄한 언덕에서 산보했는데, 강물이 그 아래에 있었고 왼쪽에서 시냇물들이 흘러들었다. 시내를 건너니 바위가 있고 높이가 10여 길이었다. 위에는 정자를 지을 만하였지만 조금 기울어진 것은 흠이었다. 서쪽 언덕의 가파른 바위는 우뚝하게 마주하였는데 서로 거리는 소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촌로 정기선이란 자가 있어 바위 위까지 따라왔는데 이야기를 자못 정성스럽게 하였다. 서쪽 바위로 옮겨가 올라가 보니 형세가 마치 칼등 같고 서늘하여 오래 있지 못하였다. 돌아와 누워 피곤한 몸을 쉬었다. 정민의 무리가 메밀국수를 주어서 저녁으로 먹었다.
그믐.
일찍 일어나 마을의 말을 빌려서 보따리를 실었다. 계봉의 아들이 따라 왔다. 동쪽으로 10여리를 가서 세 차례 강을 건넜는데 여울물이 말의 배까지 차고 싸늘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계봉은 복통이 나서 뒤에 떨어졌다. 자주 뒤돌아보며 염려했지만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묵세로 하여금 말을 끌고 또 말을 몰게 하였다. 길이 자못 평탄하였다. 홍천읍을 지나 10여 리를 가서 말을 먹였다.
여일촌의 마을 사내들은 모두 벼슬을 가진 관리라고 말하고 사람을 거절함이 매우 굳셌다. 겨우 작은 집을 얻어 휴식하였다. 상점 주인이 기분 좋게 대접하여 붓 하나를 주었다. 길가다가 마령을 넘자 길이 매우 평평하였다. 노새 등에 비록 욕창이 났지만 피곤을 절로 잊었다. 천감역에 도착하여 옛 친구 이승운을 문안하니 승운이 병들어 만나지 못하고 나는 이웃집으로 옮겨 갔는데, 승운의 조카집이었다. 방이 차고 바람이 많아서 겨우 밤을 보냈다. 갑자기 한 사나이가 명함을 내놓으며 저는 이 집 주인의 형이라고 말했다. 인사가 정성스럽고 시원한데 안방에 들어가서 쉬라고 권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9월 초1일 맑음.
아침에 인제 관아로 묵세를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탈 말과 짐 실을 말을 얻어 오게 하였다. 종일 피곤하고 아팠고 특별히 기분 좋은 일도 없었다.
초2일.
묵세가 인제 관아의 편지를 보내왔다. 말 한 필 과 관인 두 사람이 함께 왔다. 굴기촌의 말을 돌려보내기 위하여 편지를 써서 묵세에게 주고 돌려보냈다. 건이령를 넘어가니 40리 마노역에 도달하였다. 김흥업의 집을 방문하여 기숙하는데 관솔을 태워 등불을 밝히고 이야기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매우 갈증이 나 물이 먹고 싶었다. 주인이 배 한 개를 주었는데 달고 시원하며 물이 많아 바로 갈증이 가셨다.
초3일.
일찍 일어나 하얀 죽을 먹고 출발하였다. 노새 등에 욕창이 심하여 주인에게 치료하도록 맡겼다. 벼랑을 따라가자 간의진을 건너 인제 관야에 도착했다. 현감의 형과 이야기를 하였다. 식후에 현감의 형을 따라 강변에 나가 앉아서 매사냥을 보았다.
초4일 맑음.
활쏘기를 보았다.
초5일 맑음.
현감의 형을 따라 용연에서 매를 이용하여 물고기 잡는 것을 보고 바위 모서리 가파른 곳으로 가서 자리를 펼치고 배부르게 먹었다. 저녁에는 비가 올 것 같아 급히 달려 돌아왔다.
초9일 맑음.
식후에 벼랑길을 따라서 15리를 가 원통에 있는 아전 박가의 집에서 말을 먹였다. 이 집은 춘발의 처가이다. 녹두 국수를 받아 간식으로 먹고 말에 실을 보따리를 얻었다.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 세 고개를 넘었다. 고개가 다하자 물이 나왔는데 푸른 절벽과 하얀 바위는 시원하게 마음을 씻어 주었다. 저물어 노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말을 달려 람교를 지나 갈역에 도착했다. 희미한 달이 숲 가지에 걸려 있었다. 춘발의 집에서 묵었다.
초10일.
아침 식사 후 석문의 판자집에 도착하니 수리와 단장이 자못 마음에 들었다. 겨울을 지낼 만하였다. 농월대에 올라 형세를 두루 관람하였다. 춘발에게 창을 바르게 하였다.
12일 맑음.
판자집에 가서 거처하였다. 벽운사의 중이 부상을 메고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물결처럼 휩쓸려 갔다. 춘발로 하여금 판자 위에 흙을 더 얹게 하였다.
13일 맑음.
곡연에 들어가 지세남의 집에서 잠시 쉬고 벽운사에 가서 투숙하였다. 동쪽에 암자를 새로 짓는 곳을 보니 지대가 높고 밝아 자못 평소에 생각과 맞았다.
14일 맑다가 늦게 바람.
시냇가에서 한가롭게 놀았다. 시내 남쪽으로 뛰어넘어 바위 위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니 오세암 뒤의 여러 봉우리가 구름 위로 드러내어 흥치가 더욱 오래갔다. 오세암의 중 설총이 와서 보았다.
15일 맑고 바람.
오세암으로 가려는데 스님 한명에서 침구를 갖추어 가게 하였다. 홀로 먼저 시내를 따라 동쪽의 송요경이 점찍어 둔 집터를 보았다. 시내와 연못의 그윽함과 기이함이 봉우리와 고개의 울창함과 빼어남은 벽운보다 더욱 뛰어났다. 보이는 형세는 확실히 벽운만 못하였다. 유홍굴에 도착하여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수렴동으로 들어가니 송요좌가 기숙하던 곳인데 기이한 경치는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유홍굴로 다시 돌아와 시내를 버려두고 동쪽으로 들어가니 산등성이가 비스듬하게 이어져 발을 떨리게 하였다. 서리맞은 잎이 냇물에 가득하여 발을 옮기는 걸 더욱 방해하였다. 간신히 고개 하나를 넘어 떨어진 잎을 비틀거리며 밝고 내려와 오세암이고 여러 봉우리가 호위하듯 빙 둘러 있었다. 숲은 마치 귀신과 같은데 판자집에는 흰빛이 나왔다. 설총과 함께 밤새도록 선(禪)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벽달에 작은 뜰을 거니니 더욱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다.
16일 바람이 붐.
설총과 이별하고 뒷 산등성이를 걸어 올라갔다. 곧바로 10리를 올라 비로소 고개 정상에 도착하였다. 안과 밖의 봉우리들을 한 번에 볼 수 없었다. 밖의 산을 내려다보니 만 개의 창들이 나란히 늘어서 한결 같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완전히 황산의 그림과 비슷하였다. 고개를 따라 북으로 올라 또 4-5리에 두 개의 하얀 바위를 비스듬히 따라 작은 측백나무를 밟고 점점 고개를 내려왔다.
또 많은 바위를 만나 어렵게 십여 리를 걸어서 보문암에 도착했다. 멀리 바라보니 온갖 봉우리들이 빽빽이 늘고 암자 동쪽만 봉우리가 없어 바다 경치가 멀리까지 보인다. 실제로 천하의 기이한 광경이다. 암자는 비어 스님이 없었다. 기둥 앞에 조용히 앉아 낙엽을 모아 차를 끓이고 밥을 먹고 곧바로 향로대를 올라가니 암자의 남쪽 모퉁이에서 조망이 더욱 기이하였다.
시내를 따라 내려와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물줄기가 떨어지는 것이 만 길이나 되어 내려다볼 수조차 없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정신은 두근거리고 담은 흔들렸다. 가장 위험한 곳에 이르자 하나의 썩은 소나무가 가로질러 있는데 폭이 겨우 수척이라 한 번만 헛디뎌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곳을 지나느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좌우가 모두 만 길의 절벽이니 이곳이 이른바 마척암이다. 화산에 청룡암이 있는데 험난함은 비길 바가 없다고 하는 말을 예전에 들었는데 이 곳과 비교하면 어떨지 알지 못하겠다. 어렵게 십 리쯤을 가 식당암에 이르렀다. 암석이 평평하고 반들반들하여 앉을 만하였다. 좌우 빽빽하고 빼어난 봉우리와 절벽이 매우 많았다. 그 중에 금강굴이 최고로 기이하였다. 곁에 매우 아름다운 붉은 절벽이 있어 우러러보고 굽어보며 깊은 숨을 몰아쉬니 정신과 마음속이 시원해졌다. 빼어난 경치의 아름다움을 논한다면 곡연 가운데에서도 짝이 될 만한 것이 매우 적을 것이다.
다만 하나의 구비에 그친 것을 보니 층으로 드러나지도 첩으로 나타날 수도 없어 화창하지 못하다. 이곳이 상식당인데 비선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식당은 경치가 매우 졸렬하였으나 또 와선대라고 새겨져 있었다. 십 리를 가서 신흥사에 도착하였는데 자리 잡은 곳이 거칠고 누추하였다. 남쪽에 권금성, 토왕성이 있어 은은하게 둘러 호위하는 것 같았다. -下略
『三淵集』
「雪岳日記」 乙酉
八月
二十四日晴. 將往麟蹄. 朝食後拜辭家廟及伯氏. 歷違仲氏于東門. 午後徑由石串. 見大有作別. 暮到金村哭墓.
二十五日晴. 拜辭先墓. 起向石室. 遍謁諸塋. 取道文洞駐馬. 與玄祥 一作李澐 作別. 秣馬鵝湖. 暮到檗溪. 養謙在焉. 園廬蕪漫. 不堪着眼. 惟案山松翠森秀可喜. 夜宿草堂. 溪聲滿聽. 不至聒睡. 夜有風雨.
二十六日. 終日雨. 往吊李叟于逍遙谷午飯. 披簑而返. 中路頗沾濕.
二十七日晴. 向夕俶裝踰梨峴. 宿金忠義愛山家. 將以借馬也. 適其往赴社會. 坐待良久. 始見乘醉而返. 明燈敍舊. 意欵欵也. 勸我以燒酒. 辭之牢甚. 則換取白酒以進. 强飮二盃而罷.
二十八日晴. 鷄鳴治行. 蓐食待曙而發. 騾背瘡爛不堪騎. 騎金忠義馬以行. 具附騾背而行. 大霧不辨路. 踰松峙歷迷源. 都不分曉. 誤入獐. 地名迷路. 旋卽復路. 行四五里又迷行. 向津路遇行人指示. 不遠而復. 迤右踰欝業峴. 頗峻急. 峴盡路稍夷. 輒逢泛波下流. 緣遷東北行. 右踰一峴. 乃幾思峴也. 嵬磊多石不可騎. 下馬行數百步. 荒原幽藪間. 小溪淙琤. 田塍交錯. 夾路有池臺䟽鑿痕. 可知爲鄭司藝舊業也. 先考甞爲京畿都事時. 歷訪鄭公. 見其池臺之美. 曲曲幽妙. 似非人世. 雅言所及. 亹亹不厭. 挽語中所謂龍溪一洞. 在今日眞成千古. 攬轡彷徨. 不覺有榟澤丘墟之感. 過此而野平江豁. 路傍稼事. 在在茂秀. 亦有好村落. 多在西岸. 無何涉江. 灘深不及馬腹. 灘名卽博議暗也. 涉後遵遷而東. 有翠巖可據. 下有扁舟載柴而西下. 回軋亂石間. 迅若飛鳧而逝. 望之杳然. 陟一高臯. 卽佳亭子. 秣馬少留. 主人名李以信. 人品頗好. 擘畫路程曲折頗詳暢. 自梨峙至此衆云三十里. 而實則四十里也. 前進十里曰楸谷. 過此山氣明媚. 白麓翠松. 在在皆然. 盖有具家墓山焉. 觀其風氣. 允宜人之居葬. 而以田土論之則瘦軟太甚. 行四五里. 無可掛鎌處. 踰一小峴曰揷日 一作月 峴. 下峴曲曲回阻. 令人意瞀. 單行實有長弓之怕也. 沙路紆轉. 馬蹄不歷. 一石稍轉而爲九萬. 地名 野色莽然. 恰與迷 一作述 源爭闊狹. 水右邊下. 有頑峰屹峙若奴. 一作努力 男金剛卽八峰也. 東入一谷. 踰所謂地藏峴. 欲向屈其村而患無嚮導. 有一牽牛者指路頗詳. 將越峴少坐班草. 秣馬以生菽. 休養馬力而後始登登焉. 其高可與天磨車峴相伯仲. 下峴有暝色. 一路紆回. 信馬而行晻靄中. 紅樹素石. 景色異常. 有溪淸駛. 赴江如馬. 涉溪登原. 有犬吠聲. 始到所謂屈其村. 自佳亭至此六十里.
二十九日晴. 早飯後散步平臯. 江水在其下. 左有溪流會之. 涉溪有岩. 高起十餘丈. 上可着亭. 稍欹側爲欠. 西岸巉岩. 屹然作對. 相距一牛鳴. 有村老鄭起先者隨至岩上. 談話頗欵. 移登西岩. 勢若劍脊. 凜不可久臨. 歸卧休憊. 丁敏輩供蕎麥麵. 以當夕飯.
晦日. 早起借得村馬以載槖. 癸峰子隨來. 東行十餘里. 三次涉江. 灘水及馬腹. 寒凜不可堪. 癸峰以河魚痛落後. 屢顧懸懸竟不至. 使墨世牽騎且叱駄. 路頗坦夷. 過洪川邑. 行十餘里秣馬. 與日村村漢皆稱品官. 拒人甚牢. 僅得一斗屋以休憇. 店主快意見待. 遂贈一筆. 行踰馬嶺路甚平. 騾背雖瘡. 自忘疲頓也. 到泉甘驛. 問舊識李承雲則病不相接. 移就隣舍. 乃承雲姪家也. 越房踈冷多風. 僅得經夜. 俄有一漢出欵. 云是主人之兄. 而人事欵暢. 勸以入歇內房而不從焉.
[九月]
初一日晴. 朝送墨世於麟衙. 使傳書得騎卜以來. 終日憊痛. 殊無悰緖.
初二日. 墨世傳麟衙書. 以馬一匹及二官人來. 爲送屈其馬. 作書付墨世還送. 行踰健伊嶺四十里. 到馬奴驛. 訪金興業家寄宿. 燃松明話. 至夜深渴甚思水. 主人餽一梨. 甘爽多水. 頓瘳渴喉.
初三日. 早起喫白粥而發. 騾背瘡甚. 托主人以調治. 行緣 缺 遷越看儀津到麟衙. 與主倅兄敍話. 食後隨主倅兄出坐江邊觀放鷹.
初四日晴. 觀射帿.
初五日晴. 隨主倅兄往觀龍淵放鷹捕魚. 就岩角危峭處設席飽食. 夕有雨意急馳還.
初九日晴. 食後緣遷行十五里. 秣馬于圓通朴吏家. 乃春發婦翁家也. 受菉麵點心. 得馬輸槖. 行入暗谷越三嶺. 嶺盡水出. 翠壁白石. 洒落洗心. 迫暮不徜徉可嘆. 馳過藍橋到葛驛. 微月掛林抄矣. 宿春發家.
初十日. 朝食到石門板屋. 修粧頗愜意. 可以過冬. 登弄月㙜. 周覽形勢. 使春發塗窓.
十二日晴. 往處板屋. 見碧雲寺僧擔佛入谷. 村人皆奔波. 使春發加土板上.
十三日晴. 入曲淵暫憇池世男家. 往投碧雲寺. 觀東菴新搆處. 地高明頗愜素尙.
十四日晴. 晩有風. 閑游溪邊. 跳越溪南. 坐岩上東望. 五歲菴後諸峰. 逈出雲表. 興寄悠遠. 五歲僧雪捴來見.
十五日晴風. 將向五歲菴. 使一僧携枕具而往. 獨先沿溪而東. 觀宋堯卿所占屋基. 溪潭之幽奇. 峰嶺之森秀. 殆過碧雲. 而面勢端的則有遜焉. 到兪泓窟. 迤入水簾洞. 乃宋堯佐宿處. 其奇勝不可盡述. 還到兪泓窟. 捨溪東入. 土岡邐迤. 令人足酸. 霜葉塡磎. 尤妨步屧. 艱踰一嶺. 蹣跚坐葉. 而下至五歲菴. 諸峰環衛. 森若鬼神. 板屋生白. 與雪捴終夜談禪. 曉月步小庭. 尤覺惺然.
十六日風. 別雪捴步上後岡. 直上十里. 始至嶺上. 內外峰巒. 一覽無餘. 下瞰外山. 萬戟攢列. 一一干霄而上. 宛似黃山啚. 循嶺北上又四五里. 斜從二素岩. 蹂踏短栢. 稍稍下嶺. 又逢磊礧. 艱步十餘里. 至普門菴. 平看萬峰森列. 菴東峰缺. 海色萬里. 實天下之奇觀也. 菴空無僧. 靜坐前楹. 取落葉煎湯澆飯. 卽上香爐臺. 卽菴之南偏. 眺望尤奇. 沿澗而下. 度一畧彴. 則瀑落萬仞. 不可睨視. 凜凜移步. 魂悸膽掉. 到極危處. 斜掛一條朽松. 廣纔數尺. 一跌則不可取矣. 過此登登降降. 左右皆萬仞絶壑. 此所謂馬脊岩也. 甞聞華山有蒼龍嶺. 危險無雙. 未知比此如何耳. 艱行十許里. 至食堂岩. 岩石平滑可坐. 左右峰壁森秀者甚多. 其中金剛窟最奇. 傍有丹壁甚佳. 仰挹俯嗽. 神襟爲之洒落. 若論其勝美具會則曲淵中亦少其匹. 但觀止一曲. 不能層現疊出爲未暢. 此爲上食堂. 刻飛仙臺三字. 下食堂勝致頗劣. 亦刻卧仙臺. 行十里到神興寺. 處地野陋. 南有權金城土王城. 隱隱環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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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호는 삼연이고 자는 자익(子益), 본관은 안동,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이고 농암 김창협(金昌協)의 아우로이다.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를 즐기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경종 즉위 후에 집의(執義)와 세제시강원 진선(世弟侍講院進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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