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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시문

    연계기정(燕薊紀程)

    페이지 정보

    조회 331회

    본문

     

    ▪ 연계기정(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1월 5일 

     

    박사호(朴思浩)



    맑음. 머물렀다. 

    세 사신은 징청각(澄淸閣)에서 중국에 보낼 문서를 확인하였고, 집에서 편지가 왔다.

     연광정에 제일강산이라는 4자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금릉(金陵)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또 한 연(聯)이 걸려 있다.


    긴 성 한쪽에는 굽이치는 강물이고        長城一面溶溶水

    큰 들 동쪽 끝에는 점점이 산이네        大野東頭點點山


     고려의 장원 김황원(金黃元)의 시다. 김황원이 정자에 올라 시를 짓는데, 이 연구 하나를 짓고 종일을 고심하여 시를 지으려고 애썼으나 다시 구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통곡하며 누를 내려갔다. 

     상서 이만수(李晚秀)ㆍ홍의호(洪義浩)ㆍ홍석주(洪奭周)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이 누각에 올라 그 다음 시구를 지어 전편을 완성시켰다.


    만호 누대가 하늘에 솟아             萬戶樓坮天半起

    사시에 노래와 악기 소리 달 속으로 돌아가네    四時歌吹月中還 

    극옹                      屐翁  


    구름 연기는 강호 가에 그치지 않고        雲煙不盡江湖上

    시구는 오래도록 우주 사이에 남았네.       詩句長留宇宙間  

    담원                      澹園 


    황학 천년에 사람은 이미 멀어졌는데       黃鶴千年人已遠

    석양에 배는 백운만으로 돌아오네.        夕陽回棹白雲灣 

    삼이                     三怡   


    김삼연(金三淵)의 시


    설악에 숨어 사는 객이             雪嶽幽棲客

    관하에 다시 잠시 노닐어            關河又薄游

    몸을 움직여 맑고 밝은 달이 있어        隨身有淸月

    좋은 밤에 높은 누각에 있네          卜夜在高樓

    칼춤에 고기와 용이 조용하고          劍舞魚龍靜

    술잔 움직여 은하수 흐르네           杯行星漢流

    닭 울고 서로 돌아보며 일어나          鷄鳴相顧起

    흥을 목란의 배에 머물네            留興木蘭舟


    정지상(鄭知常)의 시


    거리에 봄바람 불고 가랑비 지나가니        紫陌春風細雨過

    먼지 가볍게 일지 않고 버들가지 휘어졌네     輕塵不動柳絲斜

    푸른 창 붉은 문에 생황 노랫소리          綠窓朱戶笙歌咽

    이 모두 이원 제자8) 의 집이로구나         盡是梨園弟子家


     또

    비 갠 후 긴 언덕에 풀빛이 푸른데         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임 보내는 슬픈 노래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이 언제나 다 마르리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는 것을     別淚年年添綠波


    이 때, 고금의 시를 새긴 현판 중에서 가장 사람의 입에 즐겨 오르내린다.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의 기문이 장편 가운데 대들보 위에 걸려 있고 문체가 고상하여 예스러우며 가락이 맑고 밝아 사람으로 하여금 즐겨 외게 한다. 정자가 성 위에 있고 앞에는 누대와 돛과 들 빛과 강물이 있어 평평한 모래 밭과 넓은 들 사이에 서로 이어져 있다. 뒤에는 성부(城府)와 상가와 거릿집들의 부성함이 있어 한눈에 볼 수 있다. 중국 항주(杭州)의 유미당(有美堂)에 견줄 만하다.

     다만 성안에 우물이 없고 풍수가가 이 고을의 터는 배가 가는 형국이어서 우물을 파는 것을 크게 꺼리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강물을 길어다가 마신다. 또 2개의 돌기둥을 성 밖에 세워서 누르고 있다.

     부벽루는 장경문 안에 있는데 넓으면서도 아늑하여 연광정과 함께 버금간다. 옆에 모란봉이 있고 앞으로는 능라도를 마주보고 있다.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으므로 맑고 시원한 기운은 더 낫다. 


    양쪽 기둥에,

    조용한 그림자는 벽에 잠겨           靜影沈璧

    떠오르는 빛은 금을 녹인다           浮光溶金


    한 연(聯)구가 걸려 있다.


     영명사가 부벽루 옆에 있고 득월루가 있어 가장 시원하게 앞이 툭 트였다. 기린굴, 조천석, 을밀대는 모두 모란봉 밑에 있다. 동명왕의 구적(舊蹟)이 있는데, 연대가 하도  아득하여서 자세히 상고할 수가 없다.

     청류벽은 부벽루 아래쪽 강가에 있는데, 푸른 절벽 깎아지른 듯이 서서 대동강 물 가운데 흔들리고 바위 면에 청류벽 세 글자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재송정, 초연대도 다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주작(朱雀) 함구문(含毬門 남문)을 지나 나가면 기자 정전(井田)의 옛터가 있다. 넓은 들판에 도랑을 파서 경계를 정하였는데, 구구 백묘(九區百畝)의 제도가 정연하게 조리가 있다. 그 모퉁이에 각각 작은 돌 하나를 세워 표를 하였다. 횡거(橫渠)의 이른바 한 마을에서 한번 시험해 볼 만한 것이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전 구혁도가 있다. 밭두렁에 기자궁이 있는데 궁궐과 비각이 우뚝 홀로 서 있다. 골목에 인현의 비를 세우고 문에 팔교의 편액이 걸려 있고 문안에 돌로 쌓은 구주단이 있다. 가까운 곳에 기자정이 있는데, 돌로 우물 난간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구삼문에서 그 전각으로 들어가니 편액이 있다. 북쪽이 삼익재, 남쪽에 양정, 좌우는 의인방이라 한다. 충도실이라 하여 경서의 뜻을 공부하는 선비로 하여금 거처하게 하고 있다.

     인현서원(仁賢書院)이 외성(外城) 안에 있다. 안에 기자의 화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머리에 후관(冔冠)을 쓰고 있어 천년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엄숙히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솟아오르도록 한다. 우리나라 수천 리가 의관예양(衣冠禮讓)의 풍속이 있게 한 것이 어찌 선성의 팔조의 가르침이 아니랴. 

     옛날 서약봉(徐藥峯) 한 책을 얻어서 이 인현서원 안 상자 속에 넣어 간직하였다. 왼쪽에 어사각이 있는데, 효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이 서원을 찾은 옛 사적이다. 붉은 종이에 봉림대군이 쓴 아무 달 아무 날짜의 글씨를 모시고 있다.

     충무사는 을지문덕과 김양산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을지문덕은 당 태종이 동쪽으로 고구려와 싸울 때 분연히 일어나 홀로 싸워 당 나라의 백만 군사를 손도 못 쓰고 북쪽으로 달아나게 하였다. 김양산은 갑자년(1624, 인조 2)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가 컸기 때문에 세웠다.

     무열사는 정해문안에 있는데, 상서, 석성(石星)과 제독(提督) 이여백(李如栢)의 화상을 모셨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해 준 은혜를 명나라로부터 입었는데, 두 분은 다 원병에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사정은 외성 정전의 동문 밖에 있는데 강가에 우뚝 서서 맑고 깨끗하고 조용하다. 


    대개 황산곡(黃山谷)의 시,


    강남의 물빛 하늘보다 푸르고              江南水色碧於天

    그 가운데 노니는 흰 갈매기 나와 같이 한가롭구나   中有白鷗閒似我

    의 뜻이다.

     기자묘는 칠성문 밖에 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하고 홍살문이 있으며, 무덤 앞에 비석이 서 있는데 기자묘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덤의 모양은 모가 나서 둥글지 않고 꼭대기가 조금 뾰족하며, 높이가 두어 길쯤 된다. 정자각 안 좌우에 종걸이가 세워져 있는데 제향의 기구로 쓰는 것이다.

     선연동이 길가에 있는데 예부터 고을 기생을 장사지내는 곳이다. 작은 무덤들이 인가도 드문 쓸쓸한 들풀 속에 묻혀 있다. 꽃 지고 성긴 비 올 때,  

    넋들이여. 노래 부르는 집, 춤추는 대 안에서 생장한 몸이 어찌 훗날 시인 묵객들이 비 그치고 구름 남은 사이에서 술 따르고 시 읊음을 볼 줄 알았으리요. 


    신광한(申光漢)의 시


    원컨대 선연동 속의 넋이 되기를   願作嬋姸洞裏魂


    하니 죽은 말뼈라도 사는 뜻이 있으므로 시음(詩淫)이라는 조롱을 받는다.

    포정문 안에 또한 오순정, 다경루의 여러 명승이 있다. 무릇 금수강산에는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저녁에 함자승(咸子承)이 거문고와 노래와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나를 맞아 전별의 잔치를 베풀었다. 심문(沈文)은 장에 담가 말린 포육, 소금에 절여 말린 포육, 새우, 고기, 간장 등을 많이 보내어 왔다. 북경 길을 내왕할 적에 반찬거리가 매우 마련하기 어려움을 그 자신이 일찍이 경험하였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그런 말을 해 주고, 이렇게 푸짐히 여러 가지를 보내 주니 감사하다.


    『燕行錄選集』




    初五日  

    晴. 留. 三使臣査對於澄淸閣. 仍修啓. 撥便付家書. 練光亭. 揭第一江山四字. 金陵朱之蕃筆. 又揭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一聯. 高麗壯元金黃元詩也. 黃元登亭賦詩. 得此聯句. 終日苦吟. 更難得句. 遂痛哭而下樓. 李尙書晩秀,洪尙書義浩,洪尙書奭周使行時. 共登此樓. 足成全篇. 萬戶樓坮天半起. 四時歌吹月中還. 屐翁 雲烟不盡江湖上. 詩句長留宇宙間. 澹園 黃鶴千年人已遠. 夕陽回棹白雲灣. 三怡 金三淵詩. 雪嶽幽棲客. 關河又薄游. 隨身有淸月. 卜夜在高樓. 釰舞魚龍靜. 杯行星漢流. 鷄鳴相顧起. 留興木蘭舟. 鄭知常詩. 紫陌春風細雨過. 輕塵不動柳絲斜. 綠窓朱戶笙歌咽. 盡是梨園弟子家. 又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此時古今詩板中. 最是膾炙者也. 任疏菴叔英記文長篇. 揭於中樑之上. 軆格高古. 音調瀏亮. 令人可誦. 亭在頭城. 前有頭坮帆檣野色江流點綴於平沙遠岫之間. 後有城府巿肆邑屋之富. 一擧目而兼有之. 可比於杭州有美堂矣. 但城內無井. 堪輿家謂此邑基是行舟之形. 大忌鑿井故也. 邑人汲江水而飮之. 又立兩石柱於城外以鎭之. 浮碧樓在長慶門內. 縹緲窈窕. 與練光相伯仲. 而傍有牧丹峯. 前對綾羅島. 城巿稍遠. 故淸爽過之. 兩楹揭靜影沈璧浮光溶金一聯句. 永明寺. 在浮碧之傍. 而有得月樓最爽豁. 麒麟窟,朝天石,乙密坮. 皆在牧丹峯下. 有東明王舊蹟. 而年代杳茫. 不可盡攷. 淸流壁在浮碧下流. 翠壁削立. 搖漾水中. 石面大書淸流壁三字. 栽松亭,超然坮. 皆在相望之地. 由朱雀,含毬門出. 有箕子井田遺址. 平原曠野. 溝洫定界. 九區百畝之制. 井井有條理. 夫隅各立一小石以標之. 橫渠所謂可試一鄕者非耶. 有井田溝洫圖. 田畔有箕子宮. 殿宇碑閣. 巋然獨存. 洞豎仁賢之碑. 門揭八敎之扁. 門內有石築九疇壇. 近地有箕子井設石井. 欄以護之. 由九三門入其殿. 扁其北曰三益齋. 南曰養正齋. 左右曰依仁房,忠道室. 使經義生居之. 仁賢書院在外城之內. 奉安箕子畫像. 眉目粹然. 頭着冔冠. 千載之下. 令人肅敬. 愛慕之心. 油然而生. 環東土數千里. 能有衣冠禮讓之俗. 豈非先聖八條之敎耶. 昔徐藥峯得中國人所模寫箕子陳洪範圖一本. 匣藏于院中. 左有御史閣. 奉孝廟潛邸時尋院舊蹟. 紅箋書鳳林大君某月某日字. 忠武祠. 乙支文德及金良產妥享之所也. 文德値唐太宗東征高句麗時. 奮起獨戰. 使唐家百萬之師. 攢手奔北. 良產倡義. 效勞於甲子适變. 香火之設. 有以也. 武烈祠在靜海門內. 奉石尙書星李提督如柏畫像. 我東壬辰之亂. 被再造之恩於皇明. 而兩人皆有功於援兵故也. 閒似亭在外城井田東門之外. 臨江陡起. 蕭灑穩籍. 蓋取黃山谷詩江南水色碧於天. 中有白鷗閒似我之義歟. 箕子墓在七星門外. 松檜鬱然. 有紅箭門. 墓前立碑. 刻箕子墓三字. 墓制方而不圓. 上頭稍尖尖然高可數丈. 丁字閣中. 設鐘簴於左右. 祭享器用也. 嬋姸洞在路邊. 自古邑妓所葬處也. 纍纍衆墳. 埋沒於野草荒烟落花疏雨之際. 魂兮魂兮. 生長於歌榭舞坮之中. 安知異日得見騷人韻士酹酒記咏於斷雨殘雲之間乎. 申光漢詩云. 願作嬋姸洞裏魂. 有買死馬骨之意. 故得詩淫之嘲也. 布政門內. 亦有五旬亭. 多景樓諸勝. 蓋錦繡江山無處不佳麗也. 夕間. 咸子承設琴歌酒饌. 邀余餞行也. 沈文多送漿脯,鹽脯,蝦魚,艮醬之屬. 往返燕路. 饌需極難. 自家曾經此患. 故爲余道之. 有此賑. 可感可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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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연극 배우(俳優)를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 때 이원에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가무(歌舞)를 가르쳤다. 이를 인연하여 조선 시대에는 음악을 담당한 장악원(掌樂院)의 별칭을 이원(梨園)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