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추 부사 이재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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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22년 병인(1746) 10월 28일(경인) 지중추 부사 이재의 졸기
지중추 부사 이재(李縡)가 졸(卒)하였다. 이재의 자는 희경(熙卿)이요, 본관은 우봉(牛峯)이니, 고 상신(相臣) 이숙(李䎘)의 손자였다. 품성이 맑고 순수하며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인망이 당대에 뛰어났었다.
신축년‧임인년의 화가 일어났을 적에 그의 숙부인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자, 드디어 어머니를 모시고 인제(麟蹄)의 설악산으로 은퇴하여 벼슬길에 생각을 끊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을사년 경화(更化) 이후에는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단 한 번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을 뵙고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입을 다물고 어물어물하기만 하는 시론(時論)의 폐단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책에 뜻을 기울이고 있는 참이어서, 그의 말을 등한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용인(龍仁)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에 사방에서 배우러 찾아온 자가 매우 많았고, 근세의 모든 선비들이 그를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한원진(韓元震)은 선정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데, 그가 심성(心性)을 논한 말이 이재의 말과 합치되지 않아서 이재가 시를 지어 변론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학자들이 도암 선생(陶菴先生)이라고 일컬었다.
『英祖實錄』
庚寅/知中樞府事李縡卒. 縡字熙卿, 牛峰人, 故相䎘孫也. 稟性淸粹, 少以詞章名, 旣立朝, 標望冠一世. 及辛、壬禍作, 其叔判書晩成死於誣獄, 遂奉母歸隱于麟蹄之雪嶽, 絶意仕宦, 潛究性理之學. 及乙巳更化, 屢被召命, 嘗一入覲, 進萬言封事, 極陳時論含糊鶻突之弊. 上方注意蕩平之治, 踈其言不用, 縡遂退居龍仁. 四方來學者甚衆, 近世諸儒皆以縡爲宗匠焉. 韓元震先正權尙夏門人也, 其論心性之說, 與縡不合, 縡嘗作詩以辨之. 至是卒, 年六十七. 學者稱爲陶菴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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