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關東) 공령생(功令生)의 응제(應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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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關東) 공령생(功令生)의 응제(應製). 계축년(1793)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강원도는 동쪽은 푸른 바다 끝이고, 서쪽은 경기와 함께 하고, 남쪽은 영남과 호서 지방을 접하고, 북쪽의 관서 지방과 가깝다.
고을이 무려 26개 군이며 산봉우리가 1만 2천 봉이다. 진실로 일국의 이름난 지방이며 삼한의 명승지다. 이곳을 예맥의 도읍지라고 한다. 『직방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28숙(宿)의 분야로는 기수(箕宿)의 자리라고 한다. 천체가 운행하는 도수는 바뀌지 않았느냐. 연해의 삭방(朔方)은 우선 소멸되는 대로 두고 경기 지방의 고을과 호서 지방의 고을은 그 연혁을 말할 수 있겠느냐. 병마와 수군은 무장이 각기 통솔하는 것인데 어째서 모두 없애 버리는가. 삼부와 육사는 감영 제도는 진실로 그렇다. 심하게 고르지 못한 것인가.
한나라 천자는 창해군이라는 군현을 설치하였고 박망후(博望侯)는 선사에 닻줄을 묶었다. 어떻게 멀리까지 관할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얼마나 과장된 말이냐. 멀리는 부상을 함께하고 가까이는 양곡과 인접하였으니 이곳에 소경을 설치한 일이 있었고, 이름난 산악을 바라보고 드넓은 광야를 돌아보니 태봉이라는 국호가 일찍이 있었다. 그 연대와 경계를 모두 상고할 만한 믿음이 있는가.
미노리(未老里)의 상마(桑麻)와 옛 언덕은 다름없는 고향 풍경이며 관음굴의 납의(衲衣)의 영험함은 왕자의 생산을 기원하는 상서에 부합하였다. 화천(花川)의 돌을 쏘아 화살이 박혔다는 고적과 예국의 뛰어난 인물들의 훌륭함은 모두가 아름다움을 들추어내고 성스러움을 기릴 만한데 아직도 기록되지 않았다. 의관(義館)과 천보(天寶)는 구름 같은 산들이 천첩인데 대관령이 자물쇠처럼 가로막고 있으며 쌍성호와 대포(大浦)는 안개 낀 파도가 끝이 없으니 이보다 더 험난한 해방(海防)은 없을 것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수비를 철수하였는가.
경계의 넓이는 천 리에 가깝지만 산협으로 쌓여 있으며 바다는 100년 동안 인구는 더욱 번성하였다. 토지는 가장 척박하고 민생은 최고로 어려운데 세금은 부(夫), 이(里)뿐만 아니라 어염의 이익까지도 다 가지고 갔다. 근래에 근거도 없는 세 가지 세금에 대해 청산 육리(靑山六里)라는 속담을 낳고 있을 지칭이다. 유생에게는 노역이 있고 향교에도 공물을 물리고 있으니 승려는 독경을 못하며 상인은 장사를 못한다. 무릇 고슴도치 털처럼 울연히 일어나는 많은 폐단의 원인을 한마디로 들 수 있겠는가.
만폭동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수점(水岾)을 벗어날 수 없고 도로의 맥락을 찾아볼 수 없다. 기세는 철령을 따라서 백두산에 소급되고 북쪽 경계와 남쪽 줄기는 완곡하게 내려오니 그 풍수는 아울러 들추어낼 수 있겠는가.
청학동은 작은 골짜기이지만 금강산에 견줄 만하고 석응봉의 기괴한 형상은 『지장경』에서 취하여 온 모습이고 또 역시 조화물의 잔재에 불과한 것인가. 한 굽이 평평한 호수는 5리에 흰모래는 곧 영랑(永郞)이 노닐며 약을 만들던 절구와 차를 끓이던 화로가 아직도 희미한 자취를 전하여 주고 있다. 즉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다리는 녹죽과 같고 승(升)은 복숭아처럼 크다. 이것은 산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기름지고 물산이 풍요하여 이용후생에 많은 도움이 되고 곧 모두 찾아내는 정책은 도리어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비파의 악부는 강남에 유포되어 한송정의 이름이 이로부터 더 알려져, 돌 위의 염주는 죽정에서 영험을 보이고 보배로운 높은 글의 경지에 올랐다. 사물 또한 기대하지 않은 만남이 있지 않겠는가. 일출을 공경히 맞을 수 있는 바닷가는 어느 곳이 가장 좋은 경치며 동해에는 조수가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
원주에 주천석이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낭설이 아니다. 울진에 천량혈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말이 아는가. 청평의 문수비에 제사를 올려 기원한 것은 어느 시대이며 도원(桃源)의 효제향(孝悌鄕)은 순박한 풍속이 지금도 전하고 있는가.
기자의 옥규(玉圭)는 누가 얻어서 누구에게 바쳤는가. 중국 사신 공씨(龔氏)의 환선(紈扇)은 누가 시를 쓰고 누가 읊었는가.
진평왕이 암석에 새겨 놓은 시구는 보니 익성공(황희의 시호)이 머물렀다. 석정(石亭)의 아래쪽에 있는지 와현(瓦峴)의 위쪽에 있는지 들었느냐.
오죽헌의 호는 현인이 태어났는데 골짜기가 깊어 지초를 캐는 은둔자가 노닐 만하고 유림(柳琳)의 큰 공훈은 잣나무를 만드는 곳은 완연하고 실직의 풍속이 우산(羽山)처럼 높다.
지난 공적과 넉넉한 향기는 지금도 격려시키는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가. 대저 산은 서북에서 일어나고 물은 동남으로 흘러가고 기후는 치밀하고 형세가 완전하여 마을의 촌락과 감영의 관할을 차례로 구비하였다. 관동이 비록 작지만 역시 조선의 하나의 도회지다. 물산으로 곧 산삼(山蔘), 백출(白朮), 마저(麻楮), 봉밀(蜂蜜), 해산물, 석유(石乳)와 호랑이 가죽을 공물로 바친다. 백성은 곧 효와 우애가 좋고, 농업에 힘쓰고 바탕이 곧으며 의리를 좋아하는 선비가 있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안식처를 꾸미려는 사람은 모두 관동으로 돌아 가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비단 산수와 어조(魚鳥)만을 보고 즐길 뿐이 아니다. 무릇 어찌 된 일인지 근래 번식되지 않고 백성의 생활은 나날이 곤궁해지고 농가의 비축이라고는 탕감해 주고 남은 세액을 바치기에도 부족하고, 어부의 집은 쇠잔하여 넉넉하게 진휼하여 주는 실효를 볼 수 없다.
곡식을 사고 파는 액수가 30여 만 포(包)인데 쭉정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군사의 수는 모두 1만 몇천 명인데 빈 대오를 보충하지 못하고 있다. 삼공(蔘貢)은 법을 누차 변경하였음에도 백성의 힘을 덜어 줄 실효는 아직도 까마득하고, 승역(僧役)에 대해 매번 칙령을 내렸으나 승려들이 노역하게 하는 폐단은 연이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도백이 직책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뿐이겠는가. 참으로 나 한 사람의 성의가 부족하여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10년을 하루같이, 밤낮으로 동방 백성들을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농사가 어느 정도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혹시 상처가 조금은 아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밭갈이를 끝내고 등불을 밝혀 놓고 붓과 책을 가지고 있는 자들 역시 사농공상 중에 으뜸이 아니더냐.
민정의 이해와 고을의 크고 작은 폐단을 묻지 않고 누구에게 묻겠는가. 지금 이 공령생(功令生)을 선발하여 시험을 치르는 일은 진실로 한 지방을 흔들어 감화시키고 많은 선비를 교육하는 뜻이다. 풍속과 고난을 묻는 좋은 제도도 그 속에 아울러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정치를 조금의 까다로움도 없이 하고 사물의 모든 해로움을 제거하여 소생시켜서, 선비는 덕의 보답을 받고 농민은 농토에서 일하며 동해에 둘러싸여 있는 8만여 호 모두가 우리의 천억 년 무궁한 혜택을 향유할 수 있게 하겠는가.
그대 제생은 추천장에 성명이 올라 있으니 군왕의 앞에서 들추어낼 책임이 있다. 그대들은 마음을 다하여 조목을 진술하라. 내가 친히 열람하리라.
『弘齋全書』
「關東 關東功令生應製」 癸丑
王若曰. 江原爲道. 東極滄溟. 西拱畿甸. 南接嶺湖. 北近關塞. 郡凡二十有六. 峯有一萬二千. 誠一國之名藩. 而三韓之勝區也. 地是濊貊之都. 職方可按歟. 星分箕宿之次. 躔度不改歟. 沿海朔方. 且置銷刻. 畿邑湖縣. 能說因革. 兵馬水軍武帥各領. 而竝闕則那. 三部六司營制固然. 而不齊緣甚. 漢天子置郡曰蒼海. 博望侯繫纜於仙槎. 曷逌遙管. 何亦浮夸. 遠拱扶桑. 近挹暘谷. 斯有小京之設. 粤瞻名嶽. 顧視曠野. 夙著泰封之號. 其年代境界. 皆有攷信之文歟. 未老里之桑麻古陌. 依然枌楡之物色. 觀音窟之衲衣靈應. 實符玄鳥之禎祥. 花川射羽之勝蹟. 蘂國拔髦之盛典. 悉合揚休頌聖. 而尙稽於紀載歟. 義館天寶. 雲山千疊. 而嶺阨如鎖. 雙成大浦. 烟波萬頃. 而海防莫險. 則今胡撤其守歟. 疆近千里. 而山峽殆遍. 海晏百年. 而生齒益繁. 土最确而民最窶. 賦不止於夫里. 利盡括於魚鹽. 伊來白地三稅. 諺稱靑山六里. 儒有役而校有貢. 僧不唄而賈不售. 凡係百弊之蝟起. 可以一言而毛擧歟. 源窮萬瀑. 不出於水岾. 而脈絡道里. 仍無可尋. 勢從鐵嶺. 直溯於白頭. 而北戒南條. 曲有自來. 風水幷可揚扢歟. 靑鶴小洞. 竊比於金剛. 石鷹奇形. 取象於地藏. 亦云造化之糟粕歟. 一曲平湖. 五里明沙. 卽永郞盤桓之地. 而丹臼茶竈. 尙傳其依俙蹤跡. 則神仙之說. 不可盡誣歟. 杠如菉竹. 升大桃子. 乃于山強大之所. 而沃壤饒產. 多賴於利用厚生. 則搜討之政. 反歸太膠歟. 瑟底詞曲. 流布於江南. 寒松之名. 自此增價. 石上念珠. 示靈於竹頂. 洛伽之兆. 至登寶什. 物亦有不期之遇歟. 日出之寅賓海隅. 何處最勝. 潮信之不及東洋. 其理可推. 原州有酒泉石. 無已齊諧. 蔚珍有天糧穴. 得非唐荒. 淸平文殊之碑. 祝釐者何代. 桃源孝弟之鄕. 不沫者淳風歟. 箕子玉圭. 孰得而誰獻. 龔使紈扇. 誰寫而孰詠. 爾見眞平王勒詩. 爾聞翼成公駐節之在石亭之下瓦峴之上歟. 軒號烏竹. 賢人篤生. 洞採紫芝. 隱者考槃. 而柳琳之膚勳. 柏田宛然. 悉直之餘俗. 羽山崒彼. 其往烈賸馥. 至今有風勵之美歟. 大抵山起西北. 水注東南. 風氣密形勢全. 而井里之聚落. 營府之統轄. 次第備焉. 關東雖小. 亦王服之一都會也. 物產則有蔘朮麻楮蜂蜜海錯石乳文豹之貢. 人民則多孝友力田質直好義之士. 數樂土而營菟裘者. 無不以關東爲歸. 蓋非獨山水魚鳥之爲可悅眼而已. 夫何挽近以來. 地財不殖. 民生日困. 田家之蓄積. 不足當寬蠲之餘稅. 漁戶之凋殘. 未見有優恤之實效. 糶糴之包三十餘萬. 而糠粃居多. 軍額之摠萬有數千. 而虛伍難充. 蔘貢屢變. 其法. 而吾民息肩之驗. 奈遲徯應. 僧役每煩飭令. 而緇徒荷擔之弊. 相續前後. 此豈但承流分憂者之未副職責. 實由予一人誠未孚而惠不究耳. 肆予宵旰之念. 憧憧於東民者. 癸甲以來. 十年如一日. 不敢以稼穡之稍登. 或幾其瘡痍之少完. 而輟耕篝燈. 握鉛而懷槧者. 又非四民之長乎. 民情之怎利怎害. 邑瘼之若大若小. 不於是問而又誰問. 今此功令生抄啓試取之擧. 固出於風動一方敎育多士之意. 詢謠俗訪疾苦之良䂓美制. 亦欲兼寓於其間. 何以則政無一毫之煩苛. 物得衆疵之蘇祛. 士食舊德. 農服先疇. 而環東海八萬餘戶. 共享我千億年無疆之利澤歟. 咨爾子諸生. 名登剡薦. 責任對颺. 其可悉乃心條陳之. 予將親覽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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