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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시문

    자서(自敍)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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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자서(自敍) 

         

    미수(眉叟) 허목(許穆)



      세상의 변고를 당하여 속세에서 도피하여 인연을 끊고 은둔하며 혹 행적은 더럽혔지만 삶은 깨끗이 한 사람이 있다. 몸가짐을 깨끗이 바르게 하고 그 권세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 성인은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청사열전을 쓴다.


    김시습(金時習)

     김시습은 본디 창해 사람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5세에는 『대학』과 『중용』을 통달하여 어른들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를 보고는 재주가 기이하고 이름을 시습으로, 자를 열경으로 지어 주었다. 

     세종대왕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러 만나 보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안 된다고 하여 승정원 박이창을 시켜 불러서 보게 하고는 그의 집에 후한 선물을 내리며 “잘 길러라. 마땅히 크게 쓰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그의 호를 부르지 않고 오세동자라고 하였다. 문종 때 이르러 김시습이 어느 정도 장성하자 해박하고 남다른 재능으로 명예가 더욱 커졌다.

     노릉(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김시습은 책을 모두 불태우고 그 길로 도망하여 승려가 되어 속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양주의 수락산, 수춘의 사탄향, 동해 가의 설악산과 한계산, 월성의 금오산은 모두 김시습이 즐겨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스스로 췌세옹 혹은 청한자 혹은 동봉이라 호하였다.

     김시습은 큰 명성을 일찍 얻었으나 세상의 변고를 만나 하루아침에 은둔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미친 척하고 숨어 살면서 괴팍하고 기이한 행적으로 괴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치세에 있으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수치이다. 난세를 만나 세상을 떠나 멀리 가는 것은 선이다.

     결연히 오랫동안 유명한 산천을 두루 다녔으니, 마아갑을 유람하고 개성의 옛 국학을 구경하고 살수에서 칠옹중을 읊고 평양에서는 정전(井田)의 옛 자취를 살펴보았다. 드디어 보현봉에 오르니 신령스러운 봉우리가 8만 4000개다. 그 외 북녘땅에는 아득하고 기이한 초목과 괴상한 금수가 많이 있었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에 이르러 진귀하고 특이한 토산물이 풍부한 것을 보고는 

     백제는 이 때문에 강해졌고 또한 이 때문에 망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기록에 이곳 풍속은 강하고 사나우며 원수 갚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 이것은 백제의 유풍이라고 하였다. 동이(강릉)로 나가 풍악산과 오대산에 올랐고 바닷가를 유람하였으며 월송정을 거닐었고 울릉도와 우산도를 멀리 바라보았다.

     성종 때 환속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벼슬하기를 권유하자 곧 응하지 않고 방랑하며 마음대로 놀면서 자기 뜻대로 하였다. 그의 편지에 말하기를 13세에는 경사와 백가의 책을 두루 읽어 큰 뜻과 기개가 있었고, 19세에는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공부하였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어 천지만물의 조화의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혹자는 아무런 욕심이 없이 속세의 밖을 노닐었고 기기(氣機)의 운행과 변화에 관한 술법을 통달하였다고 말하였다. 직접 자화상을 그러고는 찬하기를 너의 형체는 지극히 용렬하고 너의 마음은 너무도 어리석으니 너는 구렁에 버려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아내가 죽은 뒤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승려의 형상으로 동해를 유람하는 등 사방을 다니다가 끝내는 홍산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이 59세였다. 화장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절 옆에 빈소를 설치하였다가 3년 뒤 장례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 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승려들은 그를 부처라 하고 다비식을 한 뒤에 그를 위해 부도를 세웠다.

     그의 저서로는 사방지(四方志) 1600편과 기산(紀山)과 기지(紀地) 200편과 또 시집이 세상에 전해진다. 음애공(李耔))이 그의 글을 읽고 말하기를 몸은 불가에 의탁하고 있었지만 유자의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하였다.


    『記言』




    「自敍」

      

    當世變. 逃世絶俗. 或有穢其跡而潔其行者. 身中淸. 廢中權. 聖人許之. 作淸士列傳. 




    「金時習」 


    金時習者. 本滄海人. 生八月. 能知書. 五歲. 通大學, 中庸. 長者師之. 集賢學士崔致雲見之曰. 奇才. 乃命名時習. 字悅卿.  世宗聞之. 欲召見之不可. 令承政院召見之. 厚賜其家曰. 善養之. 當大用也. 於是四方號之曰五歲童子. 而不名也. 至 文宗時. 時習稍長成. 旣博達異能. 名譽益多. 及魯陵遜位. 時習悉燒其書. 因亡去. 逃於浮屠. 以絶跡於世也. 楊州水落, 壽春史呑, 海上雪岳, 寒溪, 月城金鰲. 皆時習樂居其間者也. 自號贅世翁. 或曰淸寒子. 或曰東峯. 時習早得大名. 逢世故. 一朝逃世絶俗. 佯狂自隱. 乖詭譎奇

    以取怪而不悔也. 以爲居治世. 潔身亂倫. 恥也. 遇亂世. 離群遠引. 善也. 慨然長往. 行名山澤. 遊摩阿岬. 開京觀古國學. 薩水問七翁仲. 平壤觀井田畎. 遂登普賢神岳八萬四千. 其外漠北之墟多異草木怪獸奇禽. 至江南海陽. 見珍異物產之饒曰. 百濟以此強. 亦以此亡. 其志曰. 其俗尙強悍報仇. 有百濟遺風. 出東暆. 登臨楓嶽, 五臺. 窮海堧. 遊越松. 望鬱陵, 于山. 至 成宗時歸俗. 客勸之仕. 則不應放跡 . 玩戲自恣. 以適意也. 其書曰. 十三. 通經史百家. 磊落慷慨. 十九. 學孫吳兵法. 今已消亡矣. 仍言天地萬物之化以自廣. 或云無欲而遊方之外. 能通氣機運化之法術. 有自畫惟肖. 其讚曰. 爾形至藐. 爾心大侗. 宜爾置之溝壑之中. 妻死不更娶. 作頭陀形. 東遊海上. 適四方. 終於鴻山無量寺. 年五十九. 遺命無燒. 殯於寺傍. 三年將葬. 發其殯. 面如生. 浮屠人以爲佛也. 旣茶毗. 爲之立浮圖. 有四方志一千六百. 紀山紀地二百. 又有詩卷. 傳於世. 陰崖公讀其文曰. 跡佛而儒行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