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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시문

    삼연선생 영시암 유허비 대신 짓다(三淵先生 永矢菴遺墟碑 代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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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삼연선생 영시암 유허비 대신 짓다(三淵先生 永矢菴遺墟碑 代作)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아, 이곳이 삼연(三淵) 김창흡(昌翕)이 은거했던 옛터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기이한 뜻이 이름 있는 산수를 유람하기 좋아하여 나라 안에 두루 발길이 미쳤다. 유독 설악(雪嶽)의 많은 봉우리와 절벽, 담(潭)과 폭포의 승경의 특출함을 간직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 또한 은자(隱者)와 유사하여 내심 가장 좋아하셨다고 한다.

     선생은 기사년의 큰 화란10) (禍亂)을 만난 뒤로 더욱 세상에 미련이 없어졌다. 드디어 을유년(숙종31, 1705)에 나라 안의 근심을 마치자 마침내 책을 짊어지고 설악산 골짜기 백담(百潭)에 들어가 3년 만에 비로소 벽운사(碧雲寺) 옆쪽에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이미 소실(燒失)되었다. 


     기축년(숙종35, 1709)에 절 동쪽으로 몇 리쯤 더 들어가 조원봉(朝元峰)을 직면한 남쪽에 기둥이 아홉인 판잣집을 짓고서 늘 거기서 생활하셨다. 이른바 영시암이 바로 이것이다. 암자 북쪽을 잘라 누(樓)로 만들어 고명봉(高明峰)을 마주하게 하였으니, 완심루(玩心樓)이다. 그 동쪽으로 백 보쯤에 깎아지르듯이 대(臺)가 있어 옆으로 봉정(鳳頂)을 떠받들고 있는데 그 위에 정자를 지으니, 농환정(弄丸亭)이다. 

     서남쪽으로 2백 보 지점에 또 무청정(茂淸亭)을 두었고, 또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이 수렴동(水簾洞)인데, 이 또한 설악산에서 최고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어서 조그마한 암자를 얽어두고 멸경암(滅景庵)이라 하였다. 이에 오가며 유식(遊息)하는 곳이 비로소 갖추어져 선생이 바야흐로 즐거워하며 여생을 마치도록 나오지 않으려 하였다.

     6년을 지나서 공역(工役)에 이바지했던 유마승(維摩僧)이 갑자기 범에게 물려 죽자, 선생이 마침내 춘천(春川)의 곡운(谷雲)으로 옮겼다. 아마도 이후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던 듯한데, 그 후 20여 년이 흘러 암자도 허물어졌다.

     아, 선생은 맑고 독특하고 세속에 빼어난 운치로 마음을 살피는 고명한 학문을 하고 또 천하의 명산을 얻어 귀의했으니, 비록 불행히도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10년 동안 산새나 물고기와 어울려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홍쟁소슬(泓崢蕭瑟)이 그득한 곳에서 발명한 것 가운데 필시 몹시 즐겁지만 남에게 고할 수 없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유허마저 깊은 숲속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에 매몰되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선생이 작고한 지 27년에 인제(麟蹄) 수령 이후광(李侯廣)이 둘러보고 장탄식하며 비석을 세워 기록하려고 하였는데, 봉조(鳳祚)가 마침 방백이 되어 그 일에 내심 감동하여 기꺼이 조력하였다.

     아, 선생의 고상한 풍치(風致)는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 몇 자(尺)의 비석은 때가 되면 결국 갈라질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계승하여야 뒷날 이곳을 지나는 자가 배회하며 가리키고 탄식하면서 차마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渼湖集』




    「三淵先生永矢菴遺墟碑」 代作 


    嗚呼!此,三淵金先生諱昌翕隱居之舊址也. 先生自少有奇志,而好遊名山水,足跡遍國中. 獨以雪嶽多峰壁潭瀑之勝,而其蘊奇不見,又有類乎隱者,故最心樂之云. 

    先生旣遭己巳大禍,益無意於世. 及乙酉終內憂,遂携書,入雪嶽之曲百潭三歲,始起精舍于碧雲寺側,已而燬. 己丑 又轉入寺東可數里,直朝元峰之南,爲板屋九楹,常處其中,所謂永矢庵是也. 庵北拆爲樓,而面高明峰者曰玩心. 其東百步,有臺陡絶而高,旁挹鳳頂,亭其上曰弄丸. 西南二百步,又有亭曰茂淸. 又東十里而爲水簾之洞,亦一山最勝處也,寘一小架曰滅景. 於是其往來遊息之所始具,而先生方且樂焉,以終其身而不出也. 

    居六歲,維摩之供役者,忽爲虎所囕,先生遂移春川之谷雲. 盖自是不復歸,而後二十餘歲,庵亦圮矣. 

    嗚呼!先生以淸奇拔俗之韻,爲玩心高明之學,又得天下名山以歸之. 雖不幸不得久,而卽十年之間,其俯仰鳶魚,吟弄風月,相發於泓崢蕭瑟之會者,必有所甚樂而不可以告人. 今幷其遺墟,且埋沒於穹林荒翳而不可識其處矣. 

    先生沒二十有七歲,麟蹄守李侯廣矩撫覽太息,謀立碑以記. 鳳祚適爲方伯,竊感其事而樂相助焉. 

    嗚呼!先生之高風,將百世不泯,而惟玆數尺之石,有時而終泐. 則尙能有爲之繼焉,而後之過者,亦得以徘徊指點,咨嗟而不忍去者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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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진도(珍島)로 유배간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1689년(숙종15) 4월에 사사(賜死)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