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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시문

    금강일기(金剛日記)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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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금강일기(金剛日記)』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 



      당나라 사람의 말 가운데, “고려국(高麗國)에 태어나 금강산(金剛山)을 한번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으니, 금강산은 천하의 산이다. 나 석산인(石山人)은 사촌동생 수(修)가 관동(關東)에 유람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가서 그를 찾아보고 겸해서 금강산도 보고 자 하였다.

      임인년 4월 7일[정유]에 출발하자 정선조(鄭先祚)가 따라나섰다. 걸어서 곡강(曲江) 40리에 도착하니, 사백(舍伯) 및 여러분들과 전별시를 지었다. 북쪽으로 영해(寧海)를 지나 평해(平海)에 들어갔다. 이곳은 바로 강원도의 남쪽 경계이다. 군(郡)에서 동쪽으로 7리 떨어진 바닷가에 월송정(月松亭)이 있는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써 일본과 지척이요, 한없이 넓은 금빛 물결과 명사십리(明沙十里), 사계절이 비취빛 병풍을 이룬 곳이 월송정의 뛰어난 경치라고 하겠다. 울진(蔚珍) 경계를 지나니 석등현(石磴縣)이 있다. 해안이 있는데 지대가 평평하여 백 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이 망양정(望洋亭)의 옛터이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노송 수백 그루로써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만 리나 끝없이 펼쳐져 회포를 풀 수 있어 망양(望洋)이라는 시를 지었다. 삼척(三陟)을 지나 소공령(召公嶺)에 오르니 고개와 언덕이 길게 이어져 30리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고개의 이름은 관찰사가 순찰한다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 죽관도(竹串島)를 지나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동해비(東海碑)를 보고 삼척읍(三陟邑)에 들어갔다. 삼척군 서쪽에는 죽서루(竹西樓)가 있는데 오십천(五十川)이 합쳐져 흐르고 절벽이 수백 척인데 돌 위에 누각을 세워놓았다. 올라가서 다리를 쉬고 공경스럽게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판상운(板上韻)에 차운하였다. 


    17일.

    북쪽으로 강릉(江陵) 병산촌(柄山村) 반정리(半亭里)에 가서 사촌동생을 만나 손을 잡고 곡을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집과의 거리는 570리이다. 사흘을 묵고 서북쪽으로 강릉부(江陵府)를 지나 7리를 가 오죽헌(梧竹軒 ; 烏竹軒)에 들어가 율곡 선생이 탄생한 곳을 보았다. 계곡과 산이 구불구불하고 유풍(遺風)은 맑고 깨끗하였다. 동쪽으로 3리를 내려가 경포대(鏡浦臺)에 올라가니 들판의 물이 호수를 이루고 주변이 10리에 달하며 바다의 모래가 둑을 만들었다. 호수는 깊지도 얕지도 않은데 거울처럼 조용하고 맑았다. 호수 구비에는 대(臺)가 있고 대 위에 활터를 만들었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워 눈을 놀라게 하였다. 이어서 현판 위에 있는 운(韻)에 차운하고 서북쪽으로 양양(襄陽)을 지나 북쪽으로 20리를 가 낙산사(洛山寺)를 찾았다. 

    낙산사는 해안 산봉우리 위에 있는데 수많은 소나무들이 사방을 막고 있어 사람들이 사는 동네와 떨어져 있는 것 같았으며, 절 아래의 해안에는 바위 구멍이 뚫려 균열이 생기고 깊이를 알 수 없다. 양쪽 해안에 작은 암자 하나를 세워 놓았는데 매번 풍랑이 드나들 때마다 난간과 누각 아래에서 금석(金石)이 쟁쟁 울리는 소리를 내고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이 훌륭한 경관이다. 

     서북쪽으로 간성(杆城)을 지나 청간정(淸澗亭)을 찾았는데 정자는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보이는 것은 계곡의 맑은 물결뿐이었다. 애암포(崖巖浦)를 지나는데 바위돌 가운데에는 위아래가 맷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서로 몇 치 정도 떨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돌멩이를 그 사이에 두고 밤을 지나면 반드시 갈리기 때문에 자마석(自磨石)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또한 명사포(名沙浦)에는 10리나 되는 흰 모래가 펼쳐져 있는데 밟으면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난다. 이 또한 모두 기이한 일이다. 서북쪽으로 고성(高城)의 경계에 이르니 10리에 걸쳐 해안이 펼쳐져 있는데 돌의 형세가 험하고 바다 속에 들어가 있어 해금강(海金剛)이라고 불리운다. 돌 모양이 배를 엎어놓은 것 같았는데 세속에서는 53개의 부처가 돌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착하여 비로소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石谷散稿』




    「金剛日記」


    唐人有言曰.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則金剛. 天下山也. 石山人. 以其從弟脩. 客遊關東不返. 將往搜之. 因觀金剛山. 

    壬寅之四月初七日丁酉. 啓裝. 鄭先祚從之. 行至曲江四十里. 與含伯及諸賢. 賦錢別. (詩見上) 北過寧海入平海. 乃江原道南境也. 郡東七里海上. 有月松亭. 稱爲關東八景之一也, 扶桑咫尺. 萬頃金波. 明沙十里. 四時翠屏. 月松亭之勝景也. 過蔚珍境. 有石嶝縣. 在海岸. 其上土平, 可坐百人云, 是望洋亭舊址也. 惟有古松數株. 登臨聘眺. 萬里無邊. 足以暢懷. 賦望洋. 過三陟. 登召公嶺. 嶺岡長延. 登降三十里. 嶺名. 取道伯巡察之義也. 過竹串島. 見眉叜許先生東海碑. 入三陟邑. 君西有竹西樓. 五十川. 合而成匯. 絶壁百尺. 架石起樓. 登臨歇脚. 敬次栗谷先生板上韻.


    十七日. 

    北至江陵柄山村半亭里. 得從弟. 握哭相叙. 距家五百七十里. 留三日. 西北過江陵府. 行七里入梧竹軒. 觀栗谷先生胎地. 溪山宛轉. 而遺風漢然. 東下三里. 登鏡浦臺. 野水成湖. 彎回十里. 海沙成堤. 湖水不深不淺. 淨明如鏡. 湖曲有臺. 臺上起榭. 綺麗駿矚. 因次板上韻. 西北過襄陽. 北二十里. 尋洛山寺. 寺在海岸峰上. 萬松四塞. 人境似絶. 寺下海岸. 岩穴坼裂. 深不可測. 兩岸架一小庵. 每風浪出入時. 聞金石噌吰踊躍放欄閣之底. 是爲奇觀也. 西北過杆城. 尋淸澗亭. 亭不存. 但見澗水淸流而已. 過崖岩浦. 有岩石. 上下如磨扇. 相離數寸. 人以石子. 置放其間. 經夜. 必銷磨. 名云自磨石. 又有鳴沙浦. 十里白沙. 踏則步步生聲. 亦皆異事也. 西北至高城境. 十里海岸. 石勢崎崛. 入于海中. 稱爲海金剛. 有石如覆舟. 諺傳五十三佛. 石舟渡海. 抵此. 始入金剛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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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규준(1855,철종6∼1923)의 자는 숙현(叔玄), 호는 석곡(石谷)이다. 원래 유학자로서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능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