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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시문

    양양 사군 권운경 진을 전송하는 서(送襄陽使君權雲卿 縉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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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양양 사군 권운경 진을 전송하는 서12) (送襄陽使君權雲卿 縉 序)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천하의 일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실상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름이 실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지 않는 것을 일러 관(窾)이라 한다. 비록 이름을 붙이는 것에 실로 근거한 바가 있다면 단과 관은 분별할 수 있다.

     양양은 중국의 동남쪽에 있어 우리나라와의 거리가 몇천리인지도 알 수 없다. 어떻게 우리나라 영동(嶺東)의 고을에 그 이름을 취하였는가. 우리나라는 일마다 중국을 모방하니, 주(州)의 이름을 양주(楊州)라 하고 청주(淸州)라 하는 것이나 부(府)의 이름을 강릉부(江陵府)라 하고 회양부(淮陽府)라 한다. 

     강의 이름을 금강(錦江), 한강(漢江), 낙동강(洛東江)이라 하는 것이 적지 않다. 그 이름이 단과 부합하는지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옛날에 중국 사람들이 교남(嶠南, 영남)을 보고 산음(山陰 산청(山淸))의 물과 지세를 보고 그들의 고을과 닮았다고 하였다. 아는 자가 그 이름을 지었다. 이에 이제 우리나라의 양양이 중국의 양양과 같은 이름을 지은 데에 근거가 있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 고을을 지날 때 서쪽 산악이 우뚝한 것을 보고 그것이 현수(峴峀)임을 알았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밟으면서 그것이 대제(大堤)임을 알았고, 영랑호(永郞湖)에서 배를 타면서 마치 포도주가 막 발효하는 빛깔과 같아서 그것이 한수(漢水)임을 알았다. 그러나 사군(使君)의 자리에 있는 자가 양공(羊公)에 부끄러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공의 높은 풍모와 넓은 국량은 한 시대에 탁월하였다. 더 이상 진(晉)나라의 인물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즉 이 고을을 다스릴 때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고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서 휘파람 불며 소요하는 가운데 한 고을을 안정시킬 것이다. 훗날 이 고을을 떠나 대각(臺閣)의 높은 자리에 오를 적에는 이 고을 백성들이 한 조각 비석에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단지 이 고을 산천의 아름다운 이름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이름이 천 년 동안 서로 부합한다. 양양의 이름을 얻는데 근거가 없지 않다. 마침내 「동제곡(銅鞮曲)」의 후속으로 떠나는 길을 노래 한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꽃처럼 펼쳐진 오봉산에 승방이 열려          葩敷五峯開蓮房兮

    영롱한 사찰이 부상이 빛나네              玲瓏金刹耀扶桑兮

    수많은 고래와 용 뛰어오르고 날아오르는데         千鯨齊踔萬龍騰兮

    높은 파도 바다는 출렁이고 천지는 무너지네         高浪蹙海乾坤崩兮

    이화정 주위엔 눈 같고 흰 꽃이 피었고          梨花亭畔花似雪兮

    소반 같은 밝은 달이 하백이 출몰하네            素月如盤出沒馮夷窟兮

    목란주 띄워 계수나무 노질하여 영랑을                         蘭舟桂棹邀永郞與之遨兮

    맞이해 함께 노니는데

    천후산에 대풍이 불자 온 나무가 흔들려 소리 내고        天吼之山大風簸萬木披拂

    而刁調兮

    가볍고 따뜻한 옷 입은 공자 앵무배로 술 마시네            輕裘公子酌鸚鵡盃兮

    금병풍에서 담소하는데 「낙매곡」 한 곡조 들리니           金屛笑坐一聲落梅兮

    저물녘 현산에서 돌아갈 생각 잊었네           落日峴山忘歸來兮


    『於于集』




    送襄陽使君權雲卿 縉 序  


    天下之事. 貴參名責實. 名副實謂之端. 名實不相符謂之窾. 苟參名實有所據. 端與窾立可辨. 襄陽在中國東南. 去我東不知其幾千里. 惡取乎名我嶺東府哉. 我國事事倣中國. 其如名州曰楊曰淸. 府稱江陵稱淮陽. 江以錦以漢以洛者不尠. 未知其斯名端耶窾耶. 向也中國人. 見嶠南山陰流峙. 謂與渠鄕似. 知其立名. 乃親睇者爲. 安知今之襄陽. 侔中國襄陽不有據也. 吾嘗過玆府. 見西岳巀嶭. 知其爲峴峀. 躡海壖鳴沙. 知其爲大堤. 泛永郞湖如葡萄醱醅. 知其爲漢水. 而獨未知位使君者. 不塊羊公乎否也. 今公之高風雅量. 卓絶一世. 非復晉代人物. 則其莅斯府也. 足以輕裘緩帶. 奠一邦於嘯遨之中. 他日去而軒騫㙜閣也. 府之民. 其不墮淚於一片石乎. 然則非獨府之山川佳名爲不窾. 責實之端. 相符於千載. 而襄陽得號. 不爲無據也審矣. 遂續銅鞮曲. 以道其行云. 歌曰. 

    葩敷五峯開蓮房兮. 玲瓏金刹耀扶桑兮. 千鯨齊踔萬龍騰兮. 高浪蹙海乾坤崩兮. 梨花亭畔花似雪兮. 素月如盤出沒馮夷窟兮. 蘭舟桂棹邀永郞與之遨兮. 天吼之山大風簸. 萬木披拂而刁調兮. 輕裘公子酌鸚鵡盃兮. 金屛笑坐一聲落梅兮. 落日峴山忘歸來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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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이 글은 1611년(광해군3) 즈음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는 권진(權縉, 1572~1624)을 전송하며 쓴 서이다. 권진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운경(雲卿), 호는 수은(睡隱)이다. 내직으로는 승지ㆍ우참찬ㆍ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경주 부윤ㆍ함경도 관찰사ㆍ양양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 때 반정 공신들로부터 계축옥사 때 김제남을 곤욕시켰다는 무고를 받고 양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민성휘(閔聖徽)에 의해 왜인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