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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시문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 (1)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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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

            

    함벽당 유경시13)(柳敬時)



     우리나라에는 본래 이름난 산이 많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홀로 금강산이 제일이다. 중국 사람들이 고려(高麗)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이 있다. 무릇 외국 사람도 금강산의 이름을 듣고 생각이 치우침이 이와 같다. 

     하물며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도 금강산을 한번 보지 못한다면 어찌 평생에 한이 되지 않겠는가. 

     금강산은 영동(嶺東)의 고성(高城)과 회양(淮陽) 사이에 있다. 내가 영남(嶺南)의 안동(安東) 땅에 살아서 대략 거리가 거의 700여 리이다. 한번 벼슬길에 올라 그 사이에 세속에 푹 빠져 있었지만, 금강산에 가보기를 원했다. 

     드디어 정미년(1727) 가을을 맞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였다. 양양과 이 산의 거리는 불과 3일이면 도달할 수 있다. 업무 중 한가한 시간에 정신을 차려 절기(節氣)를 살펴보니 이미 늦어 단풍잎이 지고 눈도 너무 일찍 쌓였다. 가고자 하였으나 또한 갈 수 없어 초봄을 기약하였다가 올봄에 이르렀다.


     고령(高靈) 신척(申滌)이 본도 좌막(佐幕)이 있었다. 편지를 보내 나와 함께 유람하면서 경치를 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먼저 설악(雪嶽)으로부터 시작하여 3월 9일 신흥사(神興寺)에서 모였다. 신흥사는 양양부의 경내에 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고 도착하여 보니 아사 일행은 이미 화암사(華巖寺)로부터 천후산(天吼山) 꼭대기에 올라와 옛이야기를 몇 마디 늘어놓고 있었다. 산의 모든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호응할 겨를이 없었다. 

     산의 사면은 모두 바위로 둘려져 있는데 마치 하나의 병풍처럼 깎여져 있고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조화상(祖和尙)이 거처하던 곳이라 하여 계조굴(繼祖窟)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굴 가운데에는 몇 개의 시렁이 엮어져 있고 좌우에는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문승(門僧) 수도자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다. 절구 한수를 지어 읊었다.


    벽옥이 둘러 병풍을 만들었고        碧玉環爲障

    누가 능히 깎아 만들 수 있겠는가      誰能削得成

    선사의 자취 이미 멀어졌는데        仙師迹已遠

    석굴이 다만 이름을 간직하고 있구나    石窟但留名


     굴 가운데에 돌이 있는데 자연적으로 평평하게 깔려 있고, 그 넓이가 수백여 척이나 된다. 수백 사람이 모여 앉을 수 있다. 비가 올 것 같아 오래 머무를 수 없어 곧 산을 내려와 내원암(內院庵)에서 잠시 쉬었다가 본사(本寺)에 도착하였다. 땅의 형세가 비록 내려와 경내는 좀 널찍하지만 앞뒤 산봉우리의 험준하고 매우 수려함이 모두 눈앞에 있다.

     이날, 낙산(洛山)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비의 기세가 그치지 않아 결국 머물러 묵었다. 아사(亞使)와 함께 나란히 누워 조용한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새벽, 견여(肩輿)로 서쪽 골짜기로 들어오는데 맑은 샘과 흰 돌 사이에 잡초와 바위 꽃이 모두 볼만하였다. 와선대(臥仙臺)에 이르니 개울 위에 평평하고 널따란 바위가 있는데 마치 자리를 깔아놓은 듯하였다. 

     그런데 물이 콸콸 내려가며 맑은 못에 이르는데 앉았다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이미 속세를 떠난 생각을 갖게 한다. 조금 위로 백여 걸음쯤 올라가면 비선대(飛仙臺)라고 부른다. 

     계곡 위에 역시 돌이 있는데 아주 깨끗한 감색 활석(滑石)으로 와선(臥仙)보다 더 위험하였다. 관청 하인에게 태평소(太平簫)를 불게 하기도 하고 소관(小管)을 불게 하여 번갈아 서로 소리를 내고, 한잔 술을 올리게 하며 대화를 하였다. 돌 위에서 오랫동안 그냥 있을 수가 없어 먼저 한 절구 읊었다.


    한가로이 누운 부사인 내가          閒臥黃堂是 

    누워있는 신선은 날아오를 것 같구나      臥仙如飛乘

    역참(驛站)은 비선대요,            馹是飛仙臺

    명예가 신표와 짝하여 함께 노닐거니      名偶符同遊

    나그네는 비선이로다.             客子是飛仙


    내가 와선이라 하니 아사가 대응하여 말하기를, 

    “와선이 먼저 도착하였고 또한 비선이 선경(仙境)에서 함께 노닐었다. 역시 한 신선입니다. 와선이 비선과 같지 않고 더 나는 것이 진짜 신선이니 누워있는 것이 어찌 신선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즉각 희롱하며 답하기를, “위에 비선이 있고 아래에 와선이다. 누가 장차 날을 것인가. 누워 게으름 피우다가 신선이 되기를 경쟁하니 빠른 자는 잘 날지만 한가한 자는 누워있다. 세간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자가 곧 진짜 신선이라네.”라고 하였다. 


    아사가 또 희롱하며 답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자진(子晉)이 날아 신선이 되었다. 극락세계에서는 누워서 신선이 되어 날거나 누워서 저절로 응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진위의 구별을 앞으로 꼭 여러 신선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조금도 떠들 일이 아니네. 신선의 신분도 아닌데 어찌 이 땅의 주인이 되겠는가?”


     곧 절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함께 낙산에 이르렀다. 아사는 경치를 구경하다가 혼자 머물고, 나는 이미 익히 본데다, 또한 산에 돌아가 묵을 도구를 챙겨야 했기 때문에 오후에 관아로 돌아왔다.


    11일.

    친히 환곡(還穀)을 나누어 주고 늦게 돌아와 비로소 출발하여 청간정(淸磵亭) 아래에서 묵었다. 아사가 먼저 도착하여 서둘러 수성(水城)으로 직행하였다. 


    12일 새벽, 

     일찍 출발하여 가학정(駕鶴亭)으로 들어가 선유담(仙遊潭)을 보고 수성에 도착하였다. 아사가 또 먼저 출발하였다. 고을 수령은 문중 사람 유준(柳遵)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령이 아침 식사를 마련하였다. 조금 뒤 헤어져 말을 달려 명파역(明波驛)에서 말을 쉬게 하였다. 

     날이 이미 저녁으로 가고 앞길에는 훌륭한 경치가 많았고, 급하여 둘러 볼 수도 없었다. 달빛을 따라 남강(南江)을 건너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렀다. 먼저 해산정(海山亭)에서 아사에게 고맙다는 하고 동쪽 객관(客館)으로 돌아들어갔다. 고을 원종현(沈宗賢)은 일찍이 만난 지가 오래되어 환영이 대단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야 객관으로 돌아와 묵었다.


    13일 아침, 

     해산정에 올랐다. 정자 근처에 지세가 제법 높고 더해서 해산의 절경이 있었다. 뒤로는 무리의 봉우리가 숲을 이루어 늘어섰고, 앞의 암석이 매우 기괴하고 기이한 봉우리가 늘어서 있다. 해변에는 점점이 별처럼 조그마한 봉우리가 7개가 있는데 이것이 칠성봉(七星峯)이다. 남강이 멀고 너른 바다로 빙 돌아 흐르는 곳은 모두 구부려야 볼 수 있는데, 마치 베갯머리의 상 앞에 있는 물건처럼 참으로 뛰어난 경치였다. 

     이것이 현산(峴山)의 낙산(洛山)과 함께 비교할 만하다. 진주(眞珠)의 죽서(竹西)와 비교가 안 된다고 하겠다. 관동팔경을 모두 드러낼 수 없는데, 무엇 때문일까. 어찌 글을 짓고 품평이 없을손가? 군(郡)으로부터 5리쯤에 삼일포(三日浦)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바닷가에서 육지로 들어간 해곡(海曲)에 여파(餘波) 한 줄기가 밀려와 만(彎)을 도는 거리가 10리는 되었다. 

     세간에 전하는데, 신라 때 남석(南石), 안상(安尙), 영랑(永郞), 술랑(述郞) 등 네 신선이 있었는데, 이 포구에서 3일간 놀다가 신선이 갔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한다. 포구 가운데에는 돌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섬이 있고 섬 위에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사선(四仙)이라 부른다. 사선이라는 이름 글자가 일찍이 포구의 남쪽 바위 사이에 새겨져 있었는데 수십 년 전만 하여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려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희미하여 분간되지 않아 알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날은 한 점의 바람과 파도가 없어 아사와 고을 수령, 그리고 나 세 사람은 조그마한 배를 같이 타고 반나절 동안 배회한 뒤 사선정(四仙亭)에 앉아 조촐한 술상을 보아 즐겁게 놀다가 파한 다음, 사운(四韻) 한 편을 읊었다.


    큰 바다의 여파가 한 구역을 만들고 남고       大海餘波作一區

    그 사이에 작은 방장산(方丈山)아구나         此間蕆得小方壺

    네 신선의 자취는 천년의 땅을 간직하고        四仙迹留千年地

    삼일의 이름은 십리호에 전해지네.           三日名傳十里湖


     석실의 누대는 누구의 집인가. 해안의 소나무와 바위의 은행나무 바위 위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고 바위 사이에는 은행나무꽃이 피었다. 황홀하게도 그림과 같다. 가벼운 배로 온종일 외진 연안까지 둘러보고, 또 봉래(蓬萊)로 들어가니 흥겨워 외롭지 않았다. 저녁이 되려고 하여 배를 버리고 말을 타고 20여 리를 가니 이미 금강동(金剛洞) 천발연(天鉢淵)에 들어와 있는데, 절의 승려가 견여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가마를 타지 않고 걷기도 하고 가마를 타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물이 한곳으로 모여 만들어진 조그마한 못이 있었다. 

     그 위로 수백 보쯤 되는 거리에 가로놓인 폭포가 있는데 비록 나를 듯이 빠르게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은 아니지만, 한줄기 맑은 물이 하얀 바위 위로 완만하게 흐르기 때문에 유명하다고 한다. 어린 승려 2, 3명이 폭포를 따라 앉아 있어 서둘러 시주를 하였는데, 유람객의 희롱에도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 10여 보 정도 위로 올라가니 돌 위에 ‘봉래도(蓬萊島)’라는 세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곧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손수 쓴 글이다. 또 그 위로 수십보 거리에 한 암자가 있고 암자의 이름이 폭패(瀑沛)라 하였는데, 아래에 폭포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승려는 이 골짜기는 구경할 만한 곳이라 하였다. 여기에 머무르면서 아사가《문견일기(聞見日記)》를 살펴보니 위에 아주 험준한 곳에 불암(佛庵)이 있었다. 그러나 승려들이 견여를 메고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꺼리고 말을 하지 않아 자세히 찾을 수 없어 그만두었다. 한탄스러웠다.

     늦게 발연사(鉢淵寺)에 내려오니 옛터에 조그마한 비(碑)가 있는데 일찍이 불에 타 희미하여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어떤 늙은 승려가 말하기를,


    “이 절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한 것으로, 진표율사가 이 절을 창건하고 속리산(俗離山)에서 풀 하나를 옮겨다 심었는데 이름이 길상(吉祥)이었습니다. 지금 줄기 몇 개를 잘라 왔는데 잎이 가는 종류의 창포(菖蒲)로써, 마치 파나 마늘 같아 점점 커지면서 아주 쓴 맛이 나 먹을 수 없습니다. 이 절에는 이 풀이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당(僧堂)에서 묵었는데, 승당의 침상은 바위로 만들어졌고 밤에는 물소리가 들리고 돌 사이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아기자기하였다.


    14일, 

     절밥을 먹고 곧 효양령(孝陽嶺)을 오르는데 고갯길을 곧바로 오르자니 높고 험하다. 가마에 타고 있으면 거꾸로 매달려 떨어질 것 같았다. 걸으려고 하면 십중 구는 발에 걸려 넘어지는데, 이른바 앞사람이 뒷사람의 정수리를 신고, 뒷사람이 앞사람의 발가락을 이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사람들이 기가 막히려 하여 거의 감당할 수가 없었다. 산 정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점점 광활해지고, 돌아보니 우뚝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능골산(稜骨山)을 드러내는데 또 개골(皆骨)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고개를 넘어 원통사(圓通寺)에 이르렀다. 절에는 기이하고 볼만한 것이 없어 조금씩 골짜기 깊숙히 들어가니 송림굴(松林窟)이 있고 굴 뒤에는 산봉우리가 가장 우뚝 솟아 아름다웠다. 아래에 큰 바위 하나가 있어 밖은 넓고 평평하며 안은 깊숙하였다. 굴 가운데에는 감실(龕室)이 있고 여러 부처를 안치하였다. 모두 돌로 만든 상으로, 대소 69명의 단식 스님들이 지키고 있으며 향불을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작은 소나무가 돌 위에 서 있는데 몇백 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매우 기이하고 오래되어 송림(松林)이라 부른다고 한다. 아사가 돌 사이로 나아가 두 사람의 성명을 손으로 쓰게 하여 뒷날 알아보기로 하였다. 내가 오언(五言) 한 절구를 지었다.


    주출돌이 허물어진 태고의 세월    石老鴻荒世

    송생현은 봄이네             松生木德年

    감실 가운데에 돌부처 간직하여      龕中藏石佛

    겁화의 재는 수천년을 견뎠구나.     灰劫經幾千

     이에 돌로 된 계곡을 지나 또 고개 하나를 오르니 이름이 박달(朴達)로써 험하기가 희양령과 같아, 이보다 더 위험한 곳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몹시 두려웠다. 다만 계곡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고, 좌우로 소나무가 우거진 그늘 사이에는 다른 나무가 섞여 있다. 두견화(杜鵑花)는 금방이라도 필 듯하며, 나뭇잎이 빠른 것은 벌써 싹이 트려 한다. 

     풍경이 비록 볼만하여도 애써 그만두고, 기어 올라가 눈여겨 볼 겨를도 없이 겨우 산허리에 도착하였다. 언덕이 있었는데 풍혈(風穴)이라 불렀다. 풍혈 앞에는 아직도 눈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눈을 밟아 길을 내도록 하여 올라가 그 굴을 보니 찬바람이 굴 가운데에서 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드디어 고개 위에 도착하여 작은 다리를 지나 북경대에 올랐는데 높이가 몇 천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고 무서워 구부리고 볼 수가 없었다. 다만 12폭포를 멀리서 바라보니 물살이 빨리 떨어져 내리는데 마치 구천(九天)을 따라 떨어지는 것 같았다. 불정암(佛頂庵)으로 돌아와 살펴보니 다만 남은 터만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부터 고개를 내려가는데 견여로 가기에는 더욱 위험하였지만 산을 오를 때 같지는 않았다. 길가에 자그마한 비석이 있는데 절과 탑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잠시 쉬었다가 눈을 비비고 천천히 수십 보를 내려가니 큰 사찰이 있었다. 절의 이름이 유점사(楡岾寺)였다. 노승이 말하기를, ‘이 땅에 최초로 창건하였는데, 53부처가 바다를 건너 와 느릅나무 가지에 앉았으므로 절을 지어 그 부처상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불전(佛殿) 역시 천축산(天竺山) 느릅나무 가지를 본 따 53부처를 나란히 배열하여 여기에 모았다. 이 절은 본래 샘이 없어 거처하는 승려가 항상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까마귀가 땅을 쪼아 샘물이 솟았으며, 지금까지도 물이 졸졸 흘러 마르지 않는 기이한 일이 전해지고 있다. 불당의 앞에 오래된 탑이 있는데 돌을 삼층으로 깎아 탑을 만들어 그 터에 안치한 것으로 모두 12층이다.

      또 그 위에 절을 표시하기 위해 금줄을 감았는데 법전이 화재를 당하여 탔기 때문에 다시 지은 지 겨우 7, 8년이 되었다. 금과 구슬로 휘황찬란하게 하여 사람들이 놀라 쳐다보는데 매우 넓고 화려하다. 이러한 절이 우리나라 안에는 있지 않다. 이 절의 아름답고 웅장함은 이 산의 으뜸으로 아름다운 봉우리가 골짜기의 맑은 물을 빙 둘러 품고 있는 모습은 어떤 싯귀의 아름다운 형식으로도 거의 비할 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하룻밤 자고 가려 하다가 출발하였는데, 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아침에 그쳤다. 

     저녁이 되어 또 하룻밤을 비에 막혀 묵으니 빈 절이 매우 무료하였다. 표훈사(表訓寺)와 장안사(長安寺) 두 절의 주지승 의탄(義坦)[대구(大邱)의 승(僧)이다.]과 상징(尙澄)이 와서 맞이하였다. 

     또한 천기(天機)라고 하는 대사(大師)가 있어 다른 암자를 지키고 있었는데 자못 총명하고 불교의 언어를 잘 알았다. 세 승려가 다시 한담을 나누는데 족히 심심풀이의 즐거움은 되었다.


    16일, 비가 오다 쾌청하게 개여 기분 좋았다. 

    시 한 절구를 읊었다.

     

    산창의 하룻 밤이 비에 어둡고          山窓一夕雨冥冥

    할 일없는 행장 또 잠시 머물었네         蠟屐行奘且暫停

    맑은 새벽 홀연히 새맑은 모습을 보니      淸曉忽看新霽色

    정녕코 한마디로 산신령께 감사하네        丁寧一語謝山靈


      밥을 먹고 곧 선담(船潭)을 지나가는데 못이 배의 모양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구룡담(九龍潭)에 이르렀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아홉 마리의 용이 유점불(楡岾佛)을 품고 서역(西域)에서 나왔는데 절을 지으려 할 때 이곳 연못으로 피신해 와서 하룻밤을 묵었다고도 하고, 또 전하기를 구룡연(九龍淵)으로 들어갔다고도 한다. 축수굴(祝壽窟)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몇 리쯤을 가 은선대(隱仙臺)에 오르니 높고 상쾌하며 탁 트인 것이 북경대(北景臺)와 같았는데, 거의 지나가서 오언(五言) 일률(一律)을 읊었다.


    숨겨진 신선의 경치 즐기고 싶으데      欲說隱仙景

    스님은 북경이 아름답다고 말하네.        僧云北景齊

    험하고 좁은 길 오르내리는데          崎嶇蹊上下

    돌의 높낮이를 알 수 없구나         踆跱石高低

    하늘이 가까이 있음을 지척에서 보는데      咫尺看天近

    아득히 멀리서 바다의 유혹을 보는구나     蒼茫望海迷

    진실을 찾아 이 곳을 오르는데          尋眞登此足

    이름을 제목으로 할 필요가 없구나        名字不須題


     돌 틈에 죽은 친구 권숙장(權叔章)의 이름이 있다. 을유년(1705) 가을 관동의 비장(裨將)으로 있을 때, 놀러 와 구경하였다. 생사의 생각을 떠나 슬픈 감정을 이기지 못해 시 한 수를 읊었다.


    을유년 가을 관동 비장으로              佐幕關東乙酉秋

    고인의 이름 흔적이 돌틈에 남아있네         故人名蹟石問留

    지나간 일 상한 마음 물어볼 곳이 없는데      往事傷心無處間

    난새타고 한가로이 나아가 이 가운데 노는구나     鸞驂倘向此中遊


     이날 밤 자는데 내린 비가 초저녁에 그치고 깊은 곳에는 눈이 쌓이고 고갯길이 미끄러워도 넘어질 위험의 우려가 없지 않았다. 홀로 예쁜 계곡에서 흐르는 신선한 물소리는 새롭게 더한다. 숲 사이 돌 위에 살짝 덮혀 있는 흰 눈 역시 기이하다. 오언시 한 수를 읊었다.

     

    금빛 모래가 밤비에 머무르고             金沙滯夜雨

    여유롭게 오늘 아침을 다스리네            蠟屐理今朝

    넘어질 근심이 낭떠러지에 퍼지고           滑處愁緣壁

    위험한 가장자리는 다리를 오르는데 겁주네       危邊劫上橋

    계곡물의 노래소리는 날개를 달라하고         澗流鳴徵羽

    돌길은 아름다운 옥으로 덮혀있네           石逕布瓊瑤

    산속의 눈은 뛰어난 경치를 더하고           山雪添奇勝

    하느님이 나를 풍요롭게 하는구나.           天公餉我饒


     내수점(內水岾)을 지나가는데, 내수점 아래에는 항상 눈이 쌓여 있고 그 사이에 간혹 정강이까지 빠지는 곳이 있다. 정오에 하늘이 흐려지고 흙비가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삼목과 전나무 사이에 엉겨붙은 눈이 녹아 이슬이 되어 마치 비 맞은 모자와 옷같이 젖어 있었다. 고개 위에 이르니 표훈사와 장안사 두 절의 승려가 교대로 견여를 대기하였다. 회양(淮陽)의 이졸(吏卒)이 환영하고 아사 역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서 골짜기 가운데를 따라 눈길을 만들어 가는데 매우 좁아 견여가 지날 수 없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가니 또 여러 번 넘어졌다. 오언시 한 구절을 읊었다.


    눈쌓여 좁은 길이 모두 묻히고              雪積脛多沒 

    잔교는 위태로워 가마를 기울게 하네           棧危輿欲欹 

    두려워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경계하는데        悚身還自戒 

    위험하게 가는데 바로하기를 이와 같구나         行險正如斯 


     길을 조금 내려오니 조금씩 평탄해졌다. 백헌담(白軒潭)을 지나 물이 돌 위로 흐르는데 돌 모양이 마치 난간(欄杆) 같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 또 이허대(李許臺)가 있는데, 이씨와 허씨 두 성씨를 지닌 사람이 쉰 곳이라고 전한다. 

     또 미륵대(彌勒臺)가 있다. 둘레가 모두 돌로써 그 돌로 인해 상(像)이 되었는데, 바로 뇌옹(瀨翁)이 부처에게 빌었다고 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암자가 있는데 마하연(摩訶衍)이라 불렀다. 땅이 깨끗한데, 절이 옛날에도 역시 경치 좋은 곳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점심을 먹었다. 조금 돌아 나아가니 이 길은 더욱 좁고 험하였지만, 경치는 오히려 더 좋았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 아름다웠는데 눈으로 다 볼 수 없고 다 기록할 수도 없다. 거쳐 지나간 곳을 말하자면, 산은 봉우리로 이름 붙여진 곳이 가섭(伽葉), 윤필(潤筆), 사자(獅子), 사자암(獅子巖), 대향로(大香罏)와 소향로(小香罏), 금강대(金剛臺)와 청학대(靑鶴臺), 오현(五賢), 혈망(穴望) 등이다. 물은 못으로 이름이 붙여진 곳이 화룡(火龍), 선(船), 구(龜), 진주(眞珠), 벽하(碧霞), 응벽(凝碧) [곁에 채운석(彩雲石)이 있다.], 흑룡(黑龍), 백룡(白龍), 청룡(靑龍), 만폭(萬瀑) 등이다. 

     그 봉우리들이 모두 특별히 뛰어나 가섭과 오현은 부처를 일컬어 이름 붙인 것으로 윤필, 사자, 대향로, 소향로는 그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금강은 산인데도 대(臺)로 이름 붙이고, 혈망은 구멍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청학대라고 부르는 것은 옛날에는 청학이 있어 돌구멍에 집을 짓고 날아서 왔다 갔다 하였는데 수십 년 전부터는 없어져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못은 모두 물이 모여 깊은데 화룡, 흑룡, 백룡, 청룡은 용이 숨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선담, 구담, 진주담은 모두 모양으로 이름붙인 것이고, 벽하와 응벽은 색깔로써 이름 붙인 것이다. 만폭은 만개의 골짜기 물이 모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진주담은 하얀 돌이 평평하게 퍼져 있고 빠른 물이 흘러 내뿜어 흩어져 마치 구슬 같아 진주라고 부른다. 

     돌의 면이 5층으로 되어 있어 발을 늘인 모습이기 때문에 수렴(水簾)이라 하는데 돌의 앞뒤로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놀러 온 사람들이 쓴 이름이 꽤 많았는데 아사의 고조, 증조, 아버지도 대대로 본도를 살피고 지나가다 이름을 새겨 넣은 것으로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알아 볼 수 있다. 아사도 따라서 손수 이름을 써서 그 옆에 새겨 두었다. 나 역시 선배들 옆에 이름을 넣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나란히 써넣었다.

     진주담을 지나 석등(石磴)을 거쳐 서쪽으로 수백 걸음을 올라가니 바위를 떠받친 방이 있었다. 놋쇠로 만든 기둥으로 지탱하여 산허리에서 높고 웅장하였다. 보덕굴(普德窟)이라 부른다. 굴 가운데의 법전(法殿)이 공중에 달려 있고 붉은 칠이 매우 화려하며 관음 불상을 안치하였는데, 놓여 있는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다. 구경꾼들이 철사로 꼬아 만든 줄을 타고 올라 들어갔다. 계곡을 따라 벽하, 응벽, 백룡, 흑룡, 청룡 등 여러 못을 거쳐 내려가 비로소 만폭동에 도착하였다. 

     물의 발원은 앞산에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바위를 만나 폭포를 만들고 골짜기의 가득한 물이 못이 되었다. 거의 만 굽이에 이르는데 내려오는 물이 모두 이 골짜기로 모였다가 나뉘어 아래로 흘러간다. 물소리의 크기가 우레를 치는 것 같고, 맑기는 옥을 두드리는 듯한데 못을 깊게 파고 있다. 

     물의 차갑기는 잠긴 듯하고 검기는 먹물을 뿌려놓은 듯 아름다운데 또한 그 기이한 모습을 표현하기 어렵다. 좌우에 기이한 바위와 돌이 죽 늘어서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놀러온 많은 사람들은 꼭 그 위에 이름을 쓴다. 나와 아사의 성명을 써 석공(石工)에게 주어 새겨 넣도록 하였다. 폭포의 이름을 만(萬)으로 하고 사람의 이름 또한 만으로 하여, 그 이름을 헤아려보고 그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니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스승이다. 이리하여 시 한 수를 읊는다.


    만폭동 가운데에 만개의 폭포수가 흐르는데        萬瀑洞中萬瀑流 

    몇 사람들의 이름이 돌 사이에 남아 있구나        幾人名字石間留  

    선은 내가 우러러 보는 바요 악은 마땅히 침밷으니    善吾瞻仰惡宜唾 

    더러운 마음 씻어내어 어찌 스스로 닦지 않으리오.    洗濯塵心盍自修 


     골짜기를 지나 몇 리 쯤 가니 커다란 돌이 있었다. 좌우로 갈라져 골짜기의 문을 이루고 있어 드나드는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금강문(金剛門)이라고 전해지는데, 문밖에는 표훈사가 있고, 그 제도(制度)의 크고 화려함이 유점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역시 큰 절이다. 

     승려의 말에 표훈은 도숙(道宿)의 호로써 처음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하였다. 누각이 있는데 자못 굉장하고 앞이 탁 트였으며 바로 밑에는 큰 계곡이 있다. 계곡에는 돌다리가 있고 누각과 서로 붙어 있는데, 누각의 이름은 능파(凌波)이고 다리 이름은 함영(涵暎)이다. 여기까지 전부이다. 이날 저녁은 그대로 묵었다.


    17일

     새벽 구름과 안개가 드리웠다. 아사 역시 피로로 인하여 신음소리를 내어 두려움 때문에 앓았기 때문에 회복하지 못했다. 유람을 그르칠까 걱정되어 우울했는데, 아침이 되자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더니 천기가 맑고 깨끗하였다. 아사 역시 기운이 좀 소생하여 걸어 오를만하였다. 밥을 먹은 후 절을 지나 북쪽으로 1, 2리쯤 올라가니 이른바 천일대(天逸臺)가 있다. 대가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세가 높아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매우 광대하였고, 원근의 여러 봉우리의 빼어난 색이다. 모두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을 가려낼 수 있다. 

     비로(毘盧)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영랑점(永郞岾)과 같은데, 영랑은 신선이 놀고 거처하던 루이다. 중향성(衆香城)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천 길이나 되는 하얀 절벽이 수십 리를 둘러싸고 있어 완연히 성가퀴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봉우리라고 부르지 않고 성이라고 부른다. 천지조화의 공적이 이와 같이 웅장하지만 한스럽게도 그 사이를 직접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나머지 수미(須彌), 미륵(彌勒), 웅호(熊虎), 일출(日出), 월출(月出), 석응(石鷹), 승상(僧床), 석가(石假), 차일(遮日), 우두(牛頭), 마면(馬面), 귀왕(鬼王), 판관(判官), 무독(無毒), 시왕(十王), 상중하(上中下), 관음(觀音), 지장(地藏), 도솔(兜率), 장경(長慶)같은 것은 봉우리 이름이고, 백운(白雲), 망고(望高), 옥축(玉軸), 안심(安心), 정심(淨心), 양심(養心)은 돈대 이름이며, 기기(畸畸), 은신(隱神), 임적(林寂), 송라(宋羅), 안양(安養)은 암자 이름이다. 

     모두 걸어서는 갈 수 없지만, 눈으로는 모두 볼 수 있으니 마치 직접 돌아본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 산의 경치를 보고싶다고 말하는데 굳이 깊숙이 들어가 찾아볼 필요는 없었다. 다만 정양사(正陽寺) 천일대(天逸臺)에 올라 다 보았는데, 거짓 명성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 

     천일대에서 30여 보를 지나 절로 들어갔다. 이 절이 곧 정양사(正陽寺)이다. 헐성루(歇惺樓) 역시 매우 높고 탁 트여 시원하였으나 오르기에 높고 구경하기에는 넓어 하나같이 천일대와 같다. 법전을 새로 지었는데 6면이 대들보 없는 집으로 높이 우뚝 솟아 서 있다. 조금도 기울지 않았으니 목수의 기술이 참으로 교묘하다 하겠다. 절이 물난리를 만나 탑이 무너지자 탑 가운데 보관하던 53부처를 지금은 향나무 가지로 천축산(天竺山)을 본떠 불상을 안치하였다. 유점사의 고사(古事)를 따른 것이다. 아사의 천일대 시(詩)에 화답하였다.


    천대의 아침 해가 비를 새롭게 맑게 하고     天臺曉日雨新晴 

    정사의 석양은 저물어 노을이 가로 누웠는데    正寺斜陽暮靄橫

    만이천봉 모두 구슬처럼 섰구나          萬二千峰皆玉立

    누가 가르쳐 주려나 하나 하나 깎아 만든 것을   誰敎箇箇削而成


    또 헐성루의 운(韻)에 화답하였다.


    상서로운 아침해 떠오르니 구름 역시 걷히고    瑞旭初昇雲亦收

    높이 솟은 무리 봉우리 중천에 떠 있네       峻羣玉半天浮

    걸어서 이르기 어렵지만 모두 볼 수 있으니     脚難到處觀能盡

    공중에 이 누각이 솟아오른 까닭이네        所以空中起此樓


     아사가 정신이 없어 잠시 쉬었는데, 나는 곧 공무에 묶여 있어 돌아갈 기일이 촉박하여 부득이 홀로 갔다. 먼저 청련암(靑蓮庵)을 지나 암자에서 맑은 계곡과 흰 바위를 굽어 내려다보니 앞에 기이한 봉우리 수십 개가 열을 지어 있는 모습이 마치 병풍 같았고 역시 절경이었다. 

     암자를 돌아 개울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 명연(鳴淵)에 도착하였는데, 물이 흰 돌 아래로 졸졸 흘렀다. 시를 읊었다.


    가파른 낭떠러지 절벽 수천길이고          懸崖壁立幾千尋

    아래는 아득한 못 깊이 측량할 수 없네      下有玄潭不測深.

    한낮에 맑은 우레 길게 내품는데           白日晴雷長自吼

    물결의 중심 의아스럽구나 노룡이 노래하는지    波心疑有老龍吟


     2리를 가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하였다. 불전이 자못 곱고 요사(寮舍) 또한 많았으며, 앞에는 누각이 있는데 이름을 산영루(山影樓)라 한다. 곁에는 만천교(萬川橋)가 있는데 돌을 깎아 개울을 가로질러 만들어 공력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몇 해 전, 물난리를 만나 떠내려가 지금까지 복구할 수 없었다. 

     개울을 건너 거슬러 올라가니 먼저 지장암(地藏庵)을 지나게 되었다. 암자가 있는 곳의 궁벽한 경치에 그윽한 향취가 있었지만 볼만한 것이 없다. 돌아서 동남쪽으로 골짜기로 들어가니 옥경담(玉鏡潭)이 있었다. 못의 물이 대단히 맑고 푸른데 감히 옥경(玉鏡)에 비견할 만하였다. 못 위에는 바위가 있는데 이름 또한 ‘옥경’으로서 앉아서 쉴만 하였다. 전체가 모두 돌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안팎으로 모두 푸른 빛으로 마치 거울 같다 하여 명경대(明鏡臺)라 부른다. 

     못의 가장자리 너머에는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고 가운데에는 한 개의 문을 설치하였는데 지옥문(地獄門)이라 불렀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꺼려 혹 극락이라고도 부른다. 골짜기를 나와 조금 돌아가니 미타암(彌陀庵) 건물이 보였다. 조금 널찍하여 수십 명의 승려들이 들어설 수 있었다. 

     백천동(百川洞) 삼불암(三佛庵)을 살펴보고 또 조금 돌아가 백화암(百華庵)을 보았다. 암자가 오래되고 지대가 깊어 나무를 잘라다가 샘물을 끌어들여 마실 수 있었다. 해혜(海慧)라고 부르는 대사(大師)가 있는데 자못 아는 것이 많고 도(道)의 기운이 있었다. 다시 표훈사로 돌아오니 아사 또한 정양사에서 이미 내려와 있었다. 함께 잤다.


    아사와 길을 헤어졌다. 아사는 서울 집으로 향하고 나는 관아로 향하면서 내가 먼저 일 절을 읊었다.


    그대는 대신이 되고 나는 노는데 앞장서고        君爲蓮幕我遨頭

    하늘이 관동을 빌려 함께 구경 잘하였네         天借關東共勝遊

    이 아침 말하지 말게나 헤어지기 한스러우니       莫說此朝離別恨

    신선 사는곳 찾아 비단주머니나 거둘걸         仙區物色錦囊收 


    아사가 답하였다.


    나는듯 구경하려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聯翩笻屐山上頭

    하늘이 명소를 빌려 칠일이나 유람하였네       天借名區七日遊

    애써 번거롭게 자네가 막아도 돌아가려는 마음 서둘고 煩君遮莫歸心促

    승려의 도 산 앞인데 구름을 못거두네         僧道前山雲未收 


    아사는 하루를 묵고 장안사를 두루 둘러보고 싶었다. 나는 먼저 돌아가려 하였다. 아사는 다시 만폭동을 구경하고 진주담에 도착하여 돌에 새긴 이름을 보며 앉아 이야기하였다. 잠시 후 헤어지면서 아사가 시 한 절구를 올린다.


    덧없는 세상 깨끗하게 노니는데 이곳이 최고 으뜸이고 浮世淸遊此最奇

    사신이 어찌하여 갈 길을 재촉할까          使君胡乃促行爲

    춘풍이 산에 노닐 뜻을 막지 않고          春風無限遊山意

    다시 진주담으로 갈거나 이별이 서럽구나       更向殊潭惜別離 


    내가 즉각 화답하였다.


    이 날 두 지팡이 또한 진귀하도다           此日聯笻又一奇

    인생의 모이고 흩어짐을 다시 어찌하리오        人生聚散更何爲

    헤어지려 잡은 손 못의 물결 흔들고           臨分更握瑤潭上

    좋은 벗 명소에서 차마 헤어지지 못하네         勝友名區不忍離 


     각기 술 한 잔씩 들고 드디어 헤어져 머리를 돌렸다. 못내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에 내수점(內水岾)을 경유하였고, 갈 때 지나온 곳을 가리키며 정말 자세히 살펴보았다. 더욱 기이하다. 다시 유점사에서 묵기로 하고 고성의 수령에게 먼저 알렸으나 보이지 않았다. 혼자 묵기가 몹시 무료하였는데, 때마침 안석윤(安錫鈗)을 만났다. 즉 승선(承宣) 안중필(安重弼)의 당질이라고 한다. 학문을 하면서 혼자 살았다. 나에게 와서 함께 묵으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 듯했다.


    19일, 

     유점사 골짜기 문을 나와 암석과 계곡의 못 역시 볼만한 곳이 많았다. 15리 쯤 가 구현(狗峴)에 도착하였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부처가 처음 바다를 건너 당시 군수였던 노춘(盧偆)이 그 자취를 찾았다. 개가 인도하여 고개 이름을 이렇게 부른다고 하였다. 이에 짝하여 한 절구를 읊었다.


    짚신에 죽장짚고 봉래산에 오니           芒鞋竹杖自蓬萊

    짙은 안개 드리우고 도의 기운이 내리는구나     剩帶煙霞道氣來

    개끄는 선인 지금은 안보이는데           牽狗仙人今不見

    남은 자취 생각하네 높은 누대에 기대어       緬懷遺迹倚高臺


     7, 8리를 가서 백천교(百川橋)에 도착하였다. 옛날에는 다리가 돌로 만들어졌는데 중간에 물난리를 만나 무너졌고, 나무로 교체하여 그 기세가 매우 웅장하였다. 비석이 있는데 사실이 기록되었다. 이 길은 조금 평탄하였지만, 효령(孝嶺)이나 박령(朴嶺)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이에 짝하여 읊조리었다.


    발연에서 와 백천으로 가니              來自鉢淵去百川

    자못 험란함을 알았지만 빼어남 모습 서로 솟았도다   方知夷險絶相懸

    구경꾼의 말에 절승을 찾아 쉬라고           寄言遊客休探勝

    천금 지키기를 정말 삼갈하리   .          殊護千金各愼旃


    여기서부터 스님이 제공한 견여를 사양하고 수레를 타니 역시 조금 기분전환이 됨을 느꼈다. 웃으면서 읊조리었다.


    산에 가는 행색이 중의 어깨에 의지하고         入山行色依僧肩

    위태로워 번번히 넘어지는구나             到底臨危輒汗顚

    말을 탄 오늘 아침 다시 상쾌하니            跨馬今朝還快意

    속세의 인연이 승선의 인연을 감히 웃는구나       塵緣堪笑僧仙緣


    40리를 말을 달려 고성에 도착하여 곧바로 해산정(海山亭)에 올라 한 수 읊었다.


    명승지를 두루 일 동안 답사하고         遍踏名區七日行

    돌아와 다시 해산정에 올랐네           歸來更上海山亭

    멀리서 삼신도가 땅에 닿았고           蒼茫地接三神島

    아득히 먼 봉우리 북두칠성에 닿았고       縹緲峰連七點星

    누대에서 보는 우뚝 솟은 신선의 집은       樓觀凌空仙所宅

    풍광이 눈에 차는데 모두 형용키 어렵도다     風光滿眼盡難形

    관동팔경 말고는 모두 사양하고         關東八景頭皆讓

    품평을 어찌하랴. 홀로 이름 빠뜨리고       題品如何獨漏名


     고을 원이 묵고 가라고 만류하여 간성 수령도 또한 이미 도착해 있었다. 묵어 가는 것이 매우 고달프고 여행길이 몹시 바빠 곧장 고별하였다. 단서(丹書)와 현종(懸鐘) 두 바위를 보았다. 

     단서는 바위에 수십 개의 구멍이 있고 색깔이 모두 붉으며, 바위의 면에 붉은 글씨를 새겼다. 종과 같은 바위는 모양이 마치 종을 매다는 나무 기둥과 같았는데 바위 면에 현종(懸鐘)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다시 돌아 감호(鑑湖)를 방문하였다. 호수는 바다물이 일직선으로 들어와 모이는데 십리가 된다. 호수의 색은 밝고 푸른데 마치 거울 같았다. 아, 중원(中原)의 경호(鏡湖)가 이와 같을까. 주인 최호(崔琥) 등 세 사람이 나와 술과 안주를 내놓았다. 저녁을 명파(明波)에서 묵었다.


    20일

     일찍 출발하였다. 오시(午時)에 간성에서 말에게 먹이고 청간, 영랑호를 거쳐 강선역(降仙郵)에서 묵었다. 새벽에 상운(祥雲)의 역리(郵吏)가 와서 감영의 관문(關文)을 보여주었다. 기호(畿湖) 지방에 도적떼가 횡행하여 경계를 엄히 한다는 보고를 들었다. 임금의 밝은 덕의 세상에 망덕한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이 서둘러 관아로 돌아왔다.

      

    21일, 

    아, 내가 여행 때문에 10여 일을 해이해졌다. 이 일은 거의 재미로 넘길 수 없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지난날의 빚을 갚는 것이다. 어찌 지금의 삶 또한 조금이라도 신선이 될 만한 인연이 없지 않아 그러하였는가. 내가 무술년(1718, 숙종 44년) 가을, 평안도 절도사를 보좌하여 묘향산을 유람하고, 금년 봄 또 현산(峴山)에서부터 금강산을 밟아 보았다. 

     저 묘향산 또한 넓고 대단하며 영변(寧邊)과 희천(熙川) 사이는 수백 리나 되는데, 기세가 매우 웅장하고 험하며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나, 금강산의 빼어남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몸 만약 이 산을 구경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평생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산을 구경하는데 봄에는 마땅히 철쭉꽃이 좋고, 여름에는 마땅히 녹색 숲이 좋으며, 가을에는 마땅히 붉은 단풍이 좋고, 겨울에는 마땅히 쌓인 눈이 좋다고 말한다. 지금 내가 여행한 이후에는 가을 단풍과 겨울눈이라 하겠다. 여름의 녹색 숲은 미치지 못한다. 산속의 늦은 봄에는 철쭉꽃이 아직 피지 않았으니 좋은 경치를 좋아하니 않는다. 나는 산이라 하는 것은 사계절의 풍경을 기다리지 않고 감상하고 경치를 즐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산을 돌아보건대, 만이천봉의 진면목은 스스로 감상하게 된다. 또한 어찌 내 여행의 잘못을 조급하게 후회하겠는가? 나는 7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외진 고을의 수령으로써 한 사람의 서리가 게으름 피우는 것도 막지 않았다. 또한 공무에 매여 여행을 하니 기일이 매우 촉박하여 아주 깊은 곳까지는 찾아볼 수가 없어 한 산의 기이한 경치만 모두 구경하였다. 

     끝내 숲에 구애받지 않고 즐기는 사람이 한 켤레의 짚신과 한 개의 죽장을 짚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오직 가는 곳에 뜻을 둘 뿐 세월은 계획하지만 두루 돌아다니며 두루 보는 것과 같지 못하였다. 이것이 내가 개탄하는 바이다. 이에 산에 올라 감상한 것을 대략 기록한다. 후일 와유(臥遊)의 기본이 된다고 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