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석각(東方石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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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석각(東方石刻)
성호(星湖) 이익(李瀷)
우리나라 석각(石刻)은 고적이 역시 많다. 삼한(三韓) 이전에는 상고할 것이 없다. 근세 왕손(王孫)인 낭원군(朗原君)이 편집한 「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이 거의 누락됨이 없다. 경주에는 신라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가 있고 또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의 묘비(墓碑)가 있다. 삼수현(三水縣)에는 초방원비(草房院碑)가 있고, 바로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순수비의 기록이다.
기억해 보면, 실직(悉直)이 처음에는 신라에 속해 있었다. 즉 영동(嶺東)의 땅도 모두 옛날에는 신라의 소유다. 동시에 철령(鐵嶺)의 밖에 까지도 역시 그 순수비가 미쳤다. 그 후에 고구려가 땅을 개척하여 바다에까지 미치게 되어서 다시 이 땅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부여현(扶餘縣)에 백제(百濟)를 평정한 탑명(塔銘)이 있는데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세운 것이다. 또 백제를 평정한 비(碑)가 있는데 역시 당나라 유인원(劉仁願) 이 세운 것이다.
진주(晉州) 지리산(智異山) 단속사(斷俗寺)에는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가 있는데 스님 영업(靈業)이 쓴 것이다. 그 글씨가 사대부들이 많이 탑본하여 완상한다. 쌍계사(雙磎寺)에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가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짓고 아울러 글씨를 썼다.
양양(襄陽) 설악산(雪嶽山)의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가 있는데 왕우군(王右軍)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합천(陜川) 가야사(伽倻寺) 홍류동(紅流洞)에 최치원의 시각(詩刻)이 있고, 보령(保寧) 성주산(聖住山)에는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가 있는데,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것이다.
광양(光陽) 백학산(白鶴山) 옥룡사(玉龍寺)에 도선비(道詵碑)가 있고, 봉화(奉火) 태자산(太子山)에 낭공대사(朗空大師)의 백월서운탑비(白月棲雲塔碑)가 있는데,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문경(聞慶) 희양산(曦陽山)에 지증선사비(智證禪師碑)가 있는데,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신라의 고적이다.
원주(原州) 건등산(建登山) 흥법사(興法寺)에는 진공대사비(眞空大師碑)가 있는데, 당 문황(唐文皇)의 글과 고려 태조(太祖)의 글씨이다. 영암(靈巖) 월출산(月出山)에는 도선(道詵)의 창사비(創寺碑)가 있고, 직산(稷山) 소사평(素沙坪)에는 홍경사비(弘慶寺碑)가 있고, 금산(金山)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에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가 있는데, 왕우군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의흥(義興) 화산(華山) 인각사(麟角寺)에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가 있는데, 민지(閔漬)의 글에 왕우군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에 매향비(埋香碑)가 있고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에 나옹화상비(懶翁和尙碑)가 있고 지공대사비(指空大師碑)가 있는데 다 이색(李穡)의 글로 된 것이다.
또 조선조 무학(無學)의 비가 있다. 임천(林川) 보광사(普光寺)에 원명국사비(圓明國師碑)가 있는데 원(元) 나라 사람 게법(揭法)의 글씨에 위소(危素)의 글이다. 대략 채집하여 기록에 실어서 옛것을 좋아하는 자에게 자료를 제공한다.
『星湖僿說』
「東方石刻」
我東石刻古蹟亦多三韓以前無所攷近世王孫朗原君所輯大東金石錄殆無遺漏慶州有新羅太宗武烈王陵碑又有大角干金庾信墓碑三水縣有草房院碑即新羅真興王廵狩記意者悉直始屬扵新羅則嶺東之地皆古所有而銕嶺之外亦其廵狩所及也後句麗拓地傅海則不復有此矣扶餘縣有平百濟塔銘唐蘇㝎方所立又有平百濟碑唐劉仁願所立晉州智異山㫁俗寺有神行禪師碑釋靈業書其書士大夫多搨摸為玩雙溪寺有真鑑國師碑崔致逺撰並書襄陽雪嶽山有弘覺禪師碑集右軍書陜川伽倻寺紅流洞有崔致逺詩刻保寕聖住山有朗慧和尚碑崔致逺文光陽白鶴山玉龍寺有道詵碑奉化太子山有朗空大師白月捿雲塔碑集金生書聞慶㬢陽山有智證禪師碑崔致逺文以上皆新羅古蹟也原州建登山興法寺有真空大師碑唐文皇文麗太祖書靈巖月出山有道詵創寺碑稷山素沙坪有弘慶寺碑金山黄岳山直指寺有大蔵堂記集右軍書義興華山麟角寺有普覺國師碑閔漬文集右軍書髙城三日浦有埋香碑楊州天寶山檜巖寺有懶翁和尚碑又有指空大師碑皆李穡文又有本朝無學碑林川普光寺有圎明國師碑元揭法書危素文略採載錄為好古者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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