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題跋) 삼연 선생이 조생에게 준 첩 뒤에 쓰다(題三淵先生與趙生帖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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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題跋) 삼연 선생이 조생에게 준 첩 뒤에 쓰다(題三淵先生與趙生帖後)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조덕수(趙德粹)는 어린 시절부터 설악산에서 삼연 선생을 따랐다. 문서에 일컫는 시휘(時暉)가 그의 어릴 때의 자(字)이다. 처음에 선생께서 바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도 군은 굳이 머물며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청하자, 선생께서 마침내 어여삐 여겨 허락하셨다. 스스로 부지런히 수업을 받으며 밭 갈고 김매고 물 긷고 절구질하는 일까지 모두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 문서에 실린 『파경집(葩經集)』의 문구와 군에게 준 편지들을 보면 다 상고할 수 있다.
선생께서 설악산을 떠난 뒤로 10년 동안 무릇 행보가 이른 곳은 원근을 묻지 않고 거의 따라가지 않은 곳이 없다. 선생의 장례를 치른 뒤에야 떠났다. 이 당시 세상의 하늘에까지 차올라 선생의 백씨(伯氏)인 우리 조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께서 제일 먼저 혹독한 화를 당하셨다. 선생 자신은 다행히 화를 면하셨지만 그 아드님15)이 선생의 나무 신주를 받들고서 영동(嶺東)의 궁벽한 산골로 유배되었는데, 군은 또 제일(祭日)만 되면 천 리 먼 길을 찾아가서 곡하였다.
아, 주자(朱子)께서 당화(黨禍)를 만나자 평소 그 문하에서 따랐다. 자주 집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고 장례에도 가서 참석하려 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었다. 임인년(경종22, 1722)의 일이 어찌 경원(慶元) 연간에 비할 정도일 뿐이었겠는가.
군은 피하지 않고 의(義)를 향해 나아간 것이 시종일관 이와 같았다.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군은 올해 75세로 재차 운루로 나를 찾아와 선생의 일을 말로 불철주야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에 내가 군의 의리에 감격한 데다 이 첩을 어루만져 보매 먹빛이 이제 막 쓴 듯한 것이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금 선생의 말씀을 듣는 것과 방불하기에 마주보고 눈물 흘리고는 이 글을 써주었다.
무자년(1768, 영조44) 초여름 상순에 운루병부(雲樓病夫)가 쓰다.
『渼湖集』
「題三淵先生與趙生帖後」
趙君德粹自爲童子時. 從三淵先生于雪嶽山中. 此帖所稱時暉者. 其小字也. 始先生不肯遽受. 君固留不去. 久益誠懇. 先生乃憐而許之. 自是受業服勤. 至耕耘井臼之役. 皆甘樂之不少悔. 今觀帖中所載葩經集句及與君諸書. 皆可考也. 及先生離雪嶽十年之間. 凡杖屨所到. 無問遠近. 鮮有不及. 至先生葬而後去. 當是時. 世禍滔天. 吾祖忠獻公. 以先生伯氏. 首嬰其酷. 先生雖幸免于身. 而其孤奉先生木主. 流竄于嶺東窮峽. 君又及其祭日. 間關千里而往哭之. 噫. 朱子之遭黨禍也. 平日遊其門者. 往往過而不入. 葬而不肯赴會者. 亦多矣 壬寅之火色. 何啻慶元之比. 而君之趨義不避. 終始如此. 豈不奇哉. 君今年七十五. 而再過余雲樓之上. 道語先生事. 窮日夜不離其口. 余旣感君之義. 而摩挲此帖. 墨光如新. 怳然復承謦咳於滄桑之餘. 爲之相對流涕. 書此以歸之. 戊子首夏之上澣. 雲樓病夫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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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김창흡(金昌翕)의 장자 김의겸(金義謙)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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